2010년 인도에서 발간한 국가 안보 보고서가 흥미롭다. 인도를 세계 5대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다음이다. 식민모국 영국은 물론, 유럽의 최강국 독일보다도 앞에 두었다. 갸우뚱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종합 국력을 산출하는 기준에 시비를 걸어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자의식의 변화이다. 객관적 지표 이상으로 세계 속 인도의 위치와 위상에 대한 자기 인식이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내가 보태고 싶은 점도 하나 있다. 이 다섯 나라들 가운데 인도가 가장 젊은 국가라는 점이다. 국민 평균 나이가 28세, 팔팔한 청춘 국가이다. 인구의 65%가 35세 이하이며, 25세 이하의 인구만 5억500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이 인도의 주역이 될 30년 후, 즉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7년의 인도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일본과 러시아는 가뿐히 앞서갈 공산이 크다. 미국, 중국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할 가능성이 높다.
2012년에는 <비동맹 2.0>이라는 보고서도 발간되었다. 21세기 인도의 대외 정책을 종합한 준공식적인 문건이다. 교수, 외교관, 군 장성, 언론인 등 대표적인 전략가 8명이 공동 집필했다. 그간 인도에서는 인도의 규모에 걸 맞는 세계 전략, 장기적인 대계(Grand Design)의 부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화평굴기, 조화세계, 책임대국, 신형대국관계, 일대일로 등 새로운 개념을 연신 발신하고 있는 중국에 견주면 확실히 그런 바가 없지 않았다. 마침내 인도에서도 외교의 종합적인 청사진을 제안하는 대전략이 제출된 것이다. 이 또한 자의식 변화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비동맹은 독립 초기 네루 총리의 정책 브랜드였다. 세계를 미-소가 강요하는 냉전 구도로 인식하지 않았다. 신생 독립 국가의 제1과제는 좌우 양단간의 선택이 아니라고 했다. 내부 분열을 피하고, 외부 개입을 차단하여, 국가를 건사하는 것이 으뜸 과제였다. 동서 양 진영에서 모두 자유로운 국가적 자율성 확보에 주력한 것이다.
공교로운 것은 그의 딸이 집권했던 1970~80년대에 비동맹 노선이 크게 굴절되었다는 점이다. 소련으로 편중되고 말았다. 인도 외교사를 서술한 교과서를 보더라도 유독 1980년대가 소략하다. 아프가니스탄에 세워진 소련의 괴뢰 정권을 지지했던 것을 최대의 불명예로 삼는다. 비동맹의 암흑기였다.
비동맹 2.0은 무엇인가? 해양과 대륙 사이, 인도-태평양과 유라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미국은 거듭 인도에 구애하고 있다. 미국-일본-필리핀-호주(오스트레일리아)로 이어지는 해양 동맹에 인도를 편입시키고자 한다. 장차 미-일 동맹만으로는 중국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인도를 키워 중국을 견제하자는 1960년대 갤브레이스-케네디의 '인도 모델'의 최신판이다. '민주주의 가치 동맹'이라고 세련되게 포장하는 방식 또한 판박이로 닮았다.
그런데 인도가 미국-일본과 크게 갈리는 지점이 있다.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역사이다. 이 방면으로는 중국과 공감대가 크다. 서세동점의 물결에 기민하게 타고 올라 승승장구했던 일본과는 달리 인도와 중국은 현대사의 굴욕을 맛보았다는 경험적 유사성이 있다. 아편 전쟁의 발발과 무굴제국의 종식은 동시대적 현상이었다.
아시아의 양대 문명 대국이었다는 역사적 자부심도 무시 못 할 대목이다. 양국 정상이 만나면 늘 불교를 매개로 했던 누천년 교류사를 아름답게 복기한다.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에서 중-인 합작이 전개되고 있는 밑바탕이다. 민주주의와 반제국주의 사이, 인도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인도-태평양과 유라시아 사이, 인도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미국이 주도하는 일극 세계의 지속이냐, 중국이 추진하는 다극 세계로의 재편이냐, 13억 인도의 선택이 관건적이다.
여기 비동맹 2.0은 여전히 소극적이라며, '다동맹(Multi-Alignment)'을 주창하고 나선 인도의 지식인이 있다. 샤시 타루르(Shashi Tharoor)이다. 양자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양자를 모두 아우르는 '제3의 대국'으로서 인도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과도 무관치 않은 인물이다.
악연이라고 할 수 있다. 2006년 유엔(UN) 사무총장 선거에서 반기문에게 석패한 후보가 바로 타루르였다. 그는 유엔에서 잔뼈가 굵은 국제 관료였다. 20대였던 1978년부터 업무를 시작해 근 30년을 유엔에만 몸담아 일했다. 선거 당시 50세로 매우 젊은 편에 속했지만, 경험과 경력만큼은 출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고배를 마신 것은 미국이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후일담이다. 유엔 내부에서 신망이 두터운 타루르가 사무총장이 되면 영향력 행사가 힘들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반면 반기문은 고분고분하고 고만고만한 인물이었다. 한국은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파병해준 몇 안 되는 충실한 동맹국이었고, 반기문은 당시 외교부 장관이었다. 기특해보였을 것이다. 패권국의 입맛에 따라 두 인물의 운명이 갈라졌던 셈이다.
내 나라 출신이 '세계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사로운 관점을 버리고 '천하위공'의 시야에서 보자면 유엔 사무총장에 더 적합한 사람은 타루르였다. 그의 풍부한 경험과 빼어난 식견이 태평천하에 한층 기여했을 것이다. 누구처럼 소신 없이 처신으로 일생을 영달한 출세지향형 인간이 아니었다.
반기문 사무총장 또한 그의 자질만은 인정했던 모양이다. 부총장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거절한다. 그리고 평생을 헌신했던 유엔 조직을 아주 떠나버린다. 인도로 돌아와서는 정치인이 되었다. 국민회의 소속으로 케랄라 주 의원이 된다. 국민회의는 이 국제적인 인사를 십분 활용했다. 당 대변인도 시켰고, 외교부 장관도 맡겼다.
그러나 제 정당에만 충성하는 당파적 인물도 아니었다. 인도인민당 출신 모디 정부의 정책을 옹호하는 발언이 빌미가 되어 국민회의 대변인에서 물러나야 했다. 할 말은 하는, 소신파이다.
국제 행정가와 정치인 경험만 있었다면 구태여 타루르를 만나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고난 문인이기도 했다. 열 살 때부터 글을 썼다고 한다. 신동이었다. 지금까지 출간한 책이 50권을 넘는다. 게다가 장르도 불문이다. 인문사회 서적은 그렇다 쳐도, 소설까지 잘 쓴다. 베스트셀러도 여럿이다. 지성과 감성을 골고루 갖추었고, 이론과 실무를 두루 겸비했다.
대학에서는 역사학을 전공했다. 그와 나눈 네 시간의 대화 가운데 "역사학도로서'(as a student of History)"라는 표현을 여섯 차례나 썼다. 그래서인지 인도에 관한 교양서 가운데 그가 집필한 책들이 내 취향에도 딱 들어맞았다. 장기 지속적인 문명사의 지평에서 20세기 인도의 경험을 짚는 안목이 발군이었다.
특히나 최근에는 21세기의 인도와 세계를 전망하는 <팍스 인디카(PAX INDICA : India and Worl of the 21st Century)>까지 출간한 마당이다. 인터뷰를 하기에 적임자가 아닐 수 없었다. <비동맹 2.0>과 <팍스 인디카>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 나누었던 그와의 대화를 소개한다.
남아시아 : Neighbor First
이병한 : 한국에서는 남아시아 뉴스가 드문 편입니다. 그래서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가 무굴제국과 대영제국을 거치며 근 500년의 정치 공동체를 지속했다가, 20세기 후반 분할된 국가라는 사실조차 잘 알려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분할 체제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비대칭성인 것 같습니다. 삼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규모가 압도적입니다.
타루르 : 비대칭성은 남아시아 국제 관계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인도가 거인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남아시아 8개국에서 인도가 차지하는 비중을 수치로 따져볼까요. 면적은 70%를 차지합니다. 인구는 75%입니다. GDP는 80%에 달합니다.
이병한 : 동아시아에서도 중국의 비중이 압도적입니다. 그래도 그 비대칭성의 격차는 남아시아처럼 현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일본은 여전히 세계 3대 경제 대국이고, 미-일 동맹은 견고합니다. 중국의 규모를 상대할 수 있는 세력 균형이 작동하는 셈이죠. 그러나 남아시아에서는 이에 견줄 만한 대상이 없더군요. 2억이 넘는 인구에 핵무기까지 보유한 파키스탄조차 인도 앞에서는 '소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루르 : 인도와 파키스탄의 격차는 대분할 당시부터 뚜렷했던 것입니다. 파키스탄은 출발부터 예외적인 탈식민 국가였습니다. 식민 모국의 행정력을 거의 계승받지 못했어요. 콜카타도 뉴델리도 모두 인도에 귀속됩니다. 대영제국의 핵심 유산이 부재한 채로 새 국가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지요. 파키스탄에 속한 영토 또한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이 많았습니다. 면적으로는 인도의 3할, 인구로는 인도의 2할, 종합 국력으로는 인도의 1할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병한 : 그럼에도 인도-파키스탄의 분할 체제가 남아시아 현대사를 규정했던 것은 파키스탄의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봐야겠죠?
타루르 : 인도를 부정하는 것을 건국 이념으로 삼은 파키스탄은 미국과의 군사 동맹을 선택했습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의 국력 차에도 불구하고 군사력만큼에서는 균형을 이루었죠. 그러나 과대 성장한 군부의 존재가 인도-파키스탄 관계의 정상화에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비대해진 군부가 남아시아의 화해 조류에 거듭 딴죽을 거는 것이지요.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슬람 근본주의를 수용하기도 합니다.
인도-파키스탄 정상 회담이 열리고 나면 어김없이 파키스탄의 수구파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합작하여 테러가 일어나고는 합니다. 그러면 인도에서도 다시 힌두 근본주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게 됩니다. 특히 선거 국면에서 대분할 체제를 악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파키스탄에서는 인도를 표적으로 삼고, 인도에서는 파키스탄을 적대하면서 표를 구합니다.
이병한 : 한국에서는 그런 기제를 '적대적 공존'이라고 표현합니다. 북조선(북한)을 선거에 악용하는 것을 '북풍'이라고도 하지요. 이슬람 근본주의와 군사 국가의 결합은 파키스탄의 건국 이념과 가장 동떨어진 모습이기도 할 텐데요. 인도와의 적대적 경쟁이 파키스탄의 역사 경로를 굴절시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로서는 분단 체제 하의 북조선을 연상케 합니다. 실제로 두 나라는 핵무기 개발에서 긴밀하게 공조한 적도 있었죠.
타루르 : '적대적 공존'보다는 '적대적 의존'이 더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이병한 : 파키스탄 외에도 남아시아에는 여러 소국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국 간에도 비대칭성이 역력하더군요.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 스리랑카, 몰디브, 아프가니스탄을 합해도 파키스탄에 못 미칩니다. 인도와는 비교 불가이고요.
타루르 : 지리적으로도 인도의 중심성이 두드러지지요. 인도만이 주변 소국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하면 모든 국가와 육지와 바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해 남아시아의 다른 소국은 인도 외에는 직접 접촉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인도를 통해야만 서로를 만날 수 있다고 할까요. 남아시아의 국제 관계가 인도를 축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요.
이병한 : 네팔, 부탄, 몰디브와 인도의 관계 또한 유럽식 '국가 간 체제'로는 설명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타루르 : 부탄은 오랫동안 인도의 '보호국'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인도가 부탄의 내정에 간섭하지는 않지만, "대외 관계에 관해서는 인도 정부의 조언과 지도를 받는다"라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었죠. 부탄이 유엔에 가입한 것도 1970년대고요. 이 조항이 개정된 것은 2007년입니다. 1947년 이후 60년 만에 규범적 의미에서의 '국가 간 체제'로 전환된 것입니다.
이병한 : 그러나 여전히 인도의 준보호국 같다는 인상이었습니다.
타루르 : 실제로 그런 측면이 크지요. 지금도 부탄의 공공 지출의 절반 이상이 인도의 원조에 의한 것입니다. 네팔 역시 '특수 관계' 속에서 사실상의 인도 세력권에 편입되어 있고요. 몰디브에서도 반정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면, 인도군이 파병되어 진압한 사례가 있었죠. 사실상 인도군이 남아시아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병한 : 소국 연합으로도 인도와 견줄 수 없는 힘의 차이가 분명하다면, 남아시아의 평화 체제 또한 기존의 '국제 질서'나 '세력 균형'과는 다른 차원에서 탐색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부탄의 사례가 인상적이었던 것도 부득부득 '독립 국가'로 홀로 서야 한다는 근대적 강박 관념에서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국가 간 체제는 상호간에 에너지 낭비가 심한 고비용 저효율 체제 같거든요. 특히 소국의 국력 소모가 더 심할 수밖에 없고요. 국가 간 체제의 기원이 유럽 내전, 30년 종교 전쟁에 있었다는 점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합니다.
타루르 : 아무래도 인도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남아시아 역내 관계를 원만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대국(Great Power)의 지위에도 도달하기 어렵겠죠. 인도와 소국 사이의 1 대 1 관계는 역시 피차간에 부담스럽습니다. 압도적인 우위의 상대와는 대립과 적대보다는 협력과 공생을 도모해야 합니다.
파키스탄만 하더라도 과도한 국방 예산을 민생 분야로 돌리고, 이웃의 거대한 시장과 무역과 투자를 활성화하여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그래서 발족한 기구가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AARC)이지요. 다자적인 틀 안에서 약소국을 억압하지 않은 대국 모델을 구축하고 새로운 대-소국 관계를 마련해 가야 할 것입니다.
비록 저와 속한 정당은 다르지만 모디 총리도 그 점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취임식 때 이웃 국가의 수장을 모두 초대하는 파격을 처음으로 연출했었죠. 이웃이 먼저다(Neighbor First)를 외교 정책의 첫 순위로 내세우기도 했고요. 남아시아 연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델리에 남아시아 대학교도 만들어졌습니다. 2010년도에 개교했지요. 저 자신도 매년 한 차례씩 강의를 나가고 있습니다. 8개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남아시아 공동체 건설을 위한 역사적 문화적 기반을 다지고,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병한 : 저도 방문해 보았는데요. 동아시아 대학이 부재한 현재로서는 한없이 부러운 마음이 일더군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남아시아 대학이 꼭 델리에 들어서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인도의 부동의 중심성을 재차 환기시키는 것 같았거든요. 가령 대분할의 고통을 가장 오래 겪은 방글라데시의 다카에 세워졌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타루르 : 동아시아 대학 건설의 움직임은 있습니까?
이병한 : 없지 않았는데, 지금은 지지부진한 상태인 듯합니다.
타루르 : 남아시아 대학교의 패착을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웃음) 베이징이나 도쿄는 피하는 쪽으로요. 서울이 유력할까요?
이병한 : 저라면 제주도에 짓자고 할 것 같습니다. 한반도 분단의 비극(4.3 사건)을 경험한 곳이고, 반도와는 다른 역사성도 간직한 장소입니다. 바닷길로 남중국과 서일본, 나아가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연결망이 오래 작동한 곳이기도 하거든요. 다른 후보지로는 오키나와, 대만 등이 떠오릅니다. 저마다 동아시아 현대사의 모순이 응축되어 있는 곳들이지요. 자연스레 인도의 동아시아 정책으로 넘어가 볼까요? 'Look East'는 한국 언론에서도 가끔 회자되는 정책입니다.
동아시아 : Act East
타루르 : 탈냉전과 함께 처음 터진 일성이 Look East였습니다. 실패로 끝난 소련과의 준동맹을 교정하는 방침이었죠. 냉전기를 통해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3대 축으로 부상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주시하고자 했습니다. 히말라야부터 태평양까지를 아우르는 발상입니다. 길게 보면 건국 초기 네루가 모색했던 범아시아주의 노선을 회복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병한 : 아시아 관계 회의가 열린 것이 1947년이었습니다. 29개 국가의 대표들이 뉴델리에 집결했었죠. 여전히 독립 이전이거나 건국 이전인 나라도 있었고요. 인도의 독립과 동시에 그만한 국제회의를 개최한 것이니 네루는 역시나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국의 독립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문명을 재건해야 한다는 목표가 처음부터 뚜렷했던 것이지요.
인도에 머물면서 네루의 <인도의 발견>도 읽어보았는데요. 워낙 대작이라 완독하는데 한 달이나 걸렸습니다. 동남아시아를 '대인도권(Greater India)'으로 서술한 지점이 눈에 띄더군요. 저만 해도 동북아 출신인지라 동남아를 아울러 '대중화권(Greater China)'으로 접근하는 편향이 없지 않았거든요. 벵골 만이 동인도와 동남아 사이의 '지중해'였다는 점도 이제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동남아시아를 한층 입체적으로 접근하는 복안을 갖게 된 셈입니다. 동남아시아는 중국, 인도에 유럽까지 흔적을 남긴 중층적인 문명권입니다.
타루르 : 동아시아 거의 모든 국가의 정신 문명에 인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힌두교와 불교는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확산되었죠. 미얀마, 타이,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티베트, 중국, 한반도, 일본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언어 생활과 문자 체계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지요. 표기법의 상당수가 산스크리트어의 파생물이죠. 인도인으로서 자긍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문화의 확산이 군사적 팽창을 수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기독교 문명이나 이슬람 문명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지요. 인도가 확보하고 있는 소프트 파워라고 생각합니다.
이병한 : 그런데도 현재 동북아와의 민간 교류가 활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관광객의 비중도 낮은 것 같아요. 유럽인과 아랍인이 훨씬 많습니다. 동남아시아만 해도 한류의 영향이 꽤 컸는데요. 미얀마에서 벵골 만을 지나고, 윈난 성에서 히말라야를 넘으면서 존재감이 사라지더군요. 작년 울란바토르부터 자카르타까지 제가 가는 곳마다 들리던 빅뱅의 노래가 콜카타서부터는 뚝 끊어졌습니다.
타루르 : 빅뱅은 저도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싸이를 제외하고는 K팝스타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인도는 발리우드라는 또 다른 글로벌 대중문화의 발신지이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정부 차원에서 민간 교류 증진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Look East 단계를 지나 Act East 단계로 진입했지요. 중국, 일본, 한국의 동북아 3국을 겨냥해서는 역시 불교라는 문명 유산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나란다 대학교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죠. 나란다 대학교가 자리했던 비하르(Bihar)에 또 다른 국제 대학을 건설 중입니다.
이병한 : <대당서역기>의 현장법사가 유학했던 곳이죠?
타루르 : 그렇습니다. 비단 현장뿐만이 아닙니다. 동북아와 동남아에서 무수한 유학생들과 승려들이 진리를 찾아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나 케임브리지 대학교보다 훨씬 오래전에 아시아의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이 모여서 학습하고 토론하고 수련했던 곳입니다.
이병한 : 델리에는 남아시아 대학교가, 비하르에는 국제 대학이 들어서는 것이군요.
타루르 : 비하르의 대학 설립은 동북 개발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인도의 동북 지역은 1947년의 대분할과 1971년의 소분할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곳입니다. 뉴델리/펀자브 중심으로 국가 개발이 추진되면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곳이기도 하고요. '동북 개발 2020'의 수립과 함께 중앙 정부에서도 주력하고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은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에 산재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중국, 네팔, 부탄,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에서 그들의 가족망, 친족망, 종교망, 경제망이 작동하지요. 그 연결망을 십분 활용하여 인도의 동북 지방을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허브로 발전시키려고 합니다.
아시아 고속도로(Asian Highway) 프로젝트 또한 동북지방으로 연결됩니다. 인도에서 동남아까지 자동차로 일주하는 행사가 처음 열린 것이 2004년도였어요. 제가 기획에 참여했던 이벤트이기도 했습니다. 인도의 델리에서 출발해 방글라데시를 지나 미얀마와 타이를 통과하여 베트남까지 가닿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이병한 : 작년(2015년)에 베이징에서 출발해서 하노이까지 이르는 기차를 타 본 적이 있는데요. 뉴델리에서 베이징까지 기차 여행을 할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았다는 기대가 이네요. 국가 간 체제가 강요한 단절과 고립(land-locked)을 돌파하여 동유라시아의 연결망(land-linked)을 재가동시키는 움직임 같습니다. 히말라야에서 태평양까지, 지리상의 '재발견'이기도 하겠고요. 19세기형 식민(Dependence)과 20세기형 독립(Independence)에서 21세기형 상부상조(Interdependence)으로 이행한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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