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6년 10월 11일과 13일 발행된 유라시아 세계 체제 ① 내가 윤여준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 ② 유라시아 vs. 유메리카…'문명 전쟁'의 시작에서 이어집니다.) 천년의 근대화, 동방의 민주화 윤여준 : 자연스럽게 한국 얘기로 화제를 돌려볼까요? 서문에서 조선과 고려, 발해와 신라, 고구려와 고조선을 재인식하고 재발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재인식, 재발견해야 한다고 염두에 둔 것인지,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이병한 : 국사의 족쇄에서 벗어나자는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터널 속에 갇혀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홀로 질주해 왔던 것이 아니거든요. 남(非我)과 항상 투쟁만 해왔던 것도 아니고요. 교류하고 교감해 왔던 시간이 훨씬 더 깁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외침을 당했네 하는 것도, 20세기와 같은 난세에 직면하여 그 혼란상을 과거로까지 소급 적용한 것이라고 봐요.
과거는 중국에 종속되고, 20세기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냉전기에는 미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는 '자학사관'도 떨쳐낼 필요가 있고요.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북방 국가적 속성이 강했던 역사를 복기해보면 꼭 중원과의 비대칭적 관계만 도드라졌던 것이 아니에요. 그때 이미 오늘 대화에서도 거듭 등장했던 투르크족, 즉 돌궐과도 긴밀했고요.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 등 반도 국가 또한 바닷길을 통해서 일본은 물론이요 동남아시아, 아라비아 상인, 페르시아 상인들과도 연결되어 있었죠.
한반도를 중원과 열도만이 아니라 북방과 남방을 아울러서 유라시아와 재접속시켜 재인식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취지였습니다. 당장 민족 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한글 창제부터가 중화 문명의 정수를 이 땅에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북방 문자를 차용해서 활용했던 것이잖아요? 즉 중원과 북방, 나아가 서역까지 활짝 열려 있었던 몽골세계제국의 유산을 고려와 조선이 흡수하고 있었기에, '민족 문화'도 창달될 수 있었던 것이죠. 내재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윤여준 : 흔히 반도에 갇혀서, 반도인의 의식, 편협하다고 이야기를 많이 해왔죠.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현재의 '한민족'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섞여 어울려 살아 왔고, 한반도 역시도 밖으로 크게 열려 있었고 문화적 교류도 활발했으며, 그만큼 포용성도 컸다고 봐야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공간 감각의 쇄신은 그럴 수 있겠다 싶은데, 시간 감각에서도 독특한 얘기를 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근본적으로 평등하다고 했죠?
이병한 : 전 진보사관 자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오늘이 어제보다 더 나은 것인가? 미래가 현재보다 더 좋아질 것인가? 진보라는 관념이야말로 근대인이 만들어 놓은 최상의 픽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가공된 '허튼 소리'죠. 상품 논리와도 흡사합니다. 신상품, 새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발상. 하늘 아래 새 것 없다는 옛 말씀과 정반대의 논리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이 있어야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도 존중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했던 말에도 의미가 돋아나고 생기가 살아나죠. 그리고 우리의 현재에도 충실할 수가 있습니다. 미래의 사람들이 우리를 돌아볼 것이니까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조상들과 앞으로 내가 살았던 땅에서 살아갈 후세들이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평등한 만큼이나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 또한 근본적으로 평등한 것이고요. 고대는 노예제라서 낙후된 것이다? 중세는 봉건제라서 후진적인 것이다? 오만한 발상입니다. 미래가 항상 더 좋아지는 것이라면 누가 과거를 돌아보고 역사를 공부하겠습니까.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한 말씀들은 무용지물이지요. 근대인들의, '신청년'들의 교만한 마음입니다.
동서양의 시간관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로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이란 '역사의 종말' 상태입니다. 지상의 시간이 끝나고 천국으로 승천하든, 지옥으로 떨어지든 현세 밖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죠. 그러나 동방의 사람들은 그런 시공간을 따로 설정하지 않았어요.
역사는 종말도 없이 종언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역사의 심판'이 있을 뿐이죠. 역사의 심판이란 신의 심판이 아닙니다. 인간의 심판입니다. 나와 다를 바 없는 평등한 인간, 다만 나보다 더 늦게 태어나서 나와 동일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의 심판이 있을 뿐이죠.
저는 이게 어마어마한 도덕적 압력을 행사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심판이란 곧 후세의 심판이거든요. 그 후세가 누구입니까? 공허한 관념이 아니에요. 바로 내 딸과 아들이고, 손주들이고, 그들의 자식들이고 그렇잖아요? 그들에게 욕보이지 않고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신의 심판'보다 훨씬 더 실감나는 공포이지 않았을까요? 내 자식이 내 삶을 심판할지어니! 당장 오늘 하루, 나의 일상이 서늘해질걸요. 내 새끼들 보기에도 부끄럽지 않는 아비와 어미로 살아가겠다는 결심과 결기만큼 결연한 것이 또 있을까요?
이걸 정치적으로 제도화하면 통치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되는 거겠죠. '신의 심판'이 지배하는 문명에서는 역사 기록이 엄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동일한 인간을 심판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문명은 다르죠. 당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까지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즉 후세가 알게 될 것입니다 라는 도덕적 압박감.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겁박하지 않으면서도, 어마어마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무시무시한 문명이었던 것입니다.
윤여준 : 진보사관의 한계는 당장 우리의 현실을 봐도 설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산업화, 민주화 다 이루었는데 결과는 '헬조선' 아닙니까?
이병한 : 불과 100년 전 조상들이었다면 돌고 도는 거라고 보셨겠죠. 어지러운 시대와 조금 더 평안한 시대가 있을 뿐이다. 치세와 난세가 돌고 도는 거지, 계속 좋아진다, 점점 더 좋은 시절이 온다? 이런 것이 말이 되냐고 혀를 끌끌 차셨겠죠. 변화에 대한 과도한 숭배야말로 난세의 현상이거든요.
혁명에 대한 시적인 열정은 순간적일 뿐입니다. 산문적인 냉정을 요구하는 시간, 건조한 역사적 시간이 훨씬 더 길지요. 당장 공자부터가 역사서의 제목을 <春秋(춘추)>라고 지었잖아요. 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지났나 싶으면 어느새 여름이고. 찰나에 대한 집착과 열광이야말로 '근대인'들의 전염병이었던 것 같아요. 지난 100년, 20세기는 온통 찰나적 변화에 광적으로 몰두했던 '혁명의 세기'였습니다.
윤여준 : 한반도의 분단 체제 극복 또한 좌우 남북이 공히 앓고 있는 고금 간의 분단을 해소하는 작업과 필히 연동될 것이라고도 밝혔습니다. 언뜻 파악이 쉽지 않은 대목인데,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병한 : 좌파나 우파나 제가 보기에는 다 신(新)파들입니다. 길게 보면 개화파의 후예들이죠. 그들이 3.1 운동 이후에 좌와 우로 갈라졌던 것이고, 그게 결국에는 분단으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물론 해방 공간에서 좌우 합작이 성사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외세였다고 생각합니다. 내부의 역량보다 외부 세력의 힘이 여전히 더 컸던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남 탓만 하는 것은 비생산적이죠. 서세의 힘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지금 도리어 남북 간의 알력은 더욱 심해진 것 같고요. 그렇다면 더더욱 당시 남북 분단을 막아내지 못했던 내적인 원인들을 깊이 탐구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큰 화두이지만, 아주 간략하게 짚자면 근본적으로 양쪽 모두 얕았다고 할까요? 신파들의 경박함, 경솔함?
깊고 넓지 못하면 얕고 좁아지기 마련이죠. 사고의 지평이 좁고 얕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지도 못하게 되고요. 당장에 급급한 단기적 사고가 남북 분단과 남북 대결과 결코 무관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저 자신의 20대에 대한 냉정한 평가과도 연결되는데요. 돌아보면 저 또한 엄청나게 날카로웠어요. 가장 날선 방식으로 맹렬하게 비판을 가하는 것이 '진보적'이라는 착각과 도착 속에 빠져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글과 책을 읽고서는 그것으로 온갖 세상물정을 다 재단하려고 했고요. 무모했죠. 무지하고 무식했기 때문입니다. 거칠었고 경직되었던 것입니다. 공부가 부족하고 사고가 얕으면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했던 저의 오류가 실은 20세기 내내 '신청년'들에게서 반복되었던 것이 아닐까? 좌/우파 공히 도쿄에, 모스크바에, 파리에, 워싱턴에 홀려서 살아왔던 것 아닐까? 그러면서 본디 가지고 있었던 500년, 1000년 간 축적되어왔던 지식과 사상과 문명을 다 잃어버린 것 아닌가. 그 얕디얕은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이 별거 아닌 것을 전부인양 내세우며 다투어왔던 시대이지 않았던가.
이런 깊이의 부재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남북 간의 재통합도 간단하지 않을 거라고 보는 것이고요. 좌우 간의 분단보다 고금 간의 분단이 더 심원한 것 같습니다. 고금 간의 심층적 분단 체제가 해소된다면 좌우와 남북 간의 표층적 분단 체제 극복은 더 쉬워질 것도 같고요.
가령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이 앞으로 무엇으로 대일통을 달성할까요? 중국공산당이 대만을 접수할 수 있을까요? 대만식 민주주의가 대륙으로 확장되겠습니까? 좌우 합작, 국공 합작은 외세가 드셌던 시절, 즉 항일 전쟁기의 연합 전선 구호였거든요. 결국 21세기의 양안 관계는 '중국 문명', '중화 문명'으로 하나를 회복해가는 과정일 것이라고 봅니다.
한쪽은 항일 전쟁과 공산주의로 100년, 다른 한쪽은 일본의 식민지와 미국의 동맹국으로 100년을 보냈는데, 통일 국면에서 크게 합의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거 밖에 없다고 봐요. 그래서 국명 또한 '중화국'이라든가, '중국'으로 낙착되지 않을지. 우리가 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로 쪼개져서 100년을 넘게 아웅다웅 했지만, 결국은 중화 문명, 중국 문명의 복원으로서 하나가 되어가자고 합의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북조선과 남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요.
윤여준 : 서강대학교 사학과 정두희 교수의 <하나의 역사, 두 개의 역사학>이라는 책을 보면 북한의 민족사 서술이 '김일성 민족'의 역사로 탈바꿈되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민족임에도 두 개의 상이한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향후 민족 재통합의 과정에서도 큰 장애가 되지 않을까요? 과연 그것이 극복이 가능할지?
이병한 : 단기적인 면과 장기적인 면을 동시에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일단 백두혈통으로 3대 세습까지 내려온 것은 단기적으로 유효만 측면이 분명히 있죠. 정권의 정통성을 혈연에서 구하는 것이니 탈냉전 이래 '고난의 행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조선이 쉬이 붕괴되지 않고 지속하고 있는 저력의 근간을 이룬다고 봅니다.
북조선 체제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북조선이 국가로서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행한 것이거든요. 북조선의 급작스러운 붕괴야말로 한반도 및 동아시아의 재앙적인 상황이죠. 탈냉전 초기 발칸 반도를 휩쓸었던 피바람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김일성 일가의 핏줄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두혈통이 지배하는 왕조적 국가의 성격에다가, 그 인민들의 정체성까지도 '김일성 민족'으로까지 규정해가는 것은 장차 남북 사이의 재통합 과정에서 엄청난 장애가 될 것임에 분명합니다. 다만 그 지난한 과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해서라도 저 나라가 저런 지경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역지사지 해볼 수 있는 공감 능력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고슴도치처럼 잔뜩 웅크린 채 가시를 바짝 세우고 있는 것이거든요. 저 멀리로는 세계 최강국 미국이 적대국으로 도사리고 있고, 가까이로는 분단국 한국과의 국력 차이도 현저하게 벌어져 버렸고. 식민 모국이었던 일본과도 관계를 정상화하지 못한 세계에서 유일한 탈식민 국가에요.
'병'이라는 것이 내 몸과 외부 환경의 부조화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내/외부의 불균형 상태가 병으로 드러나는 것이죠. 즉, 저들에게만 달라지라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분단 체제의 또 다른 당사자로서 우리들 또한 함께 변화해가야 하는 것이죠. 북조선과 '헬조선' 중 어디가 더 병들었는지 피장파장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당장의 '체제 전환'이라는 외과 수술적인 방식이 아니라, 북조선이 처한 환경과 조건부터 개선시켜주면서 그들 내부의 원기를 북독아 활력과 생기를 되찾아가는 '한의학적 방식'으로 접근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래야 김일성 집안으로만 과도하게 응축되어있는 울혈을 그들 스스로도 풀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항일 무장 투쟁만이 유일한 독립 운동이 아니었고, 항일 무장 투쟁조차도 김일성 혼자서 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들을 북조선 인민들도 너그럽게 수용해갈 수 있는 기력을 회복시켜주어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현재 남쪽이 북쪽보다 훨씬 더 힘이 세잖아요? 그러면 그럴수록 완력으로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넓게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품어주는 덕성과 아량을 베풀어야죠. 소인배의 정치가 아니라 대장부의 정치를 펼쳐야 합니다.
체제 경쟁에서 밀린 저들의 자존심을 배려하기 위해서라도 너무 앞에다 대놓고 '통일, 통일'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수도 있어요. 장기적인 과제는 후세에 맡긴다는 통 큰 자세로 저들의 '정상 국가화'부터 도와야 한다고 봅니다. 별개의 국가로 살아간 지 어언 70년이라면, 재결합 과정도 그 만큼의 호흡으로 접근하는 편이 서로 간에 득이 되리라고 봐요.
나이 지긋하신 원로 통일 운동가들도 내가 눈감기 전에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조바심을 덜어내셔야 한다고 보고요. 내가 최선을 다하되 내 생에 안 되는 일들은 후세의 지혜를 믿고 맡긴다는 태도가 바람직합니다. 남한에서 이승만을 '국부'라고 추앙하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북쪽에서 김일성은 '국부'를 넘어서 일종의 '태조'거든요. 베트남 사람들이 호치민에 대해서 가지는 감정과 비슷할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과연 남북 간의 재통합 과정에서 북쪽 인민들이 '태조 김일성'의 지위까지 격하시킬 수 있을까요? 정말로 쉽지 않은 과제이죠. 그러면 그럴수록 멀리 보면서 에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여준 : 남쪽은 어떻습니까? '연행록과 견문록' 부분에서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헛개화'라고 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자랑했던 한국인들로서는 기가 찬 말이 아닐 수 없는데…. 일단 왜 헛개화라고 보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진 개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보는 것인지?
이병한 : 지금 한국에서 행복감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드문드문 한국에 돌아오다 보니 아무래도 외국과의 차이에 민감해지게 되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의 표정이 가장 눈에 들더라고요. 밝지가 않습니다. 집합적으로 울화병에 걸려 있는 듯한. 신명이 없고, 신바람이 나지 않죠.
지난 100년간의 근대화, 즉 산업화와 민주화의 한계는 이론적으로 설파할 것도 없이 경험적으로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미 '헬조선'이라는 즉자적인 말로 분출되고 있으니까요. 산업화를 이끌었던 개량파도 민주화를 주도했던 개화파도 돌아보면 결국은 남을 따라하고 따라갔을 뿐이죠. 그 모델이 임계점에 달한 것이고요.
윤여준 : 서구화를 곧 근대화로 생각하고 따라간 세월이었죠.
이병한 :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이미 헛개화와 진개화를 분류했습니다. 개화라는 것은 끝이 날 수 없는 부단한 과정이라고 하면서, 서유럽의 문명 또한 개화의 종착역이라고 할 수 없다고 진단하거든요. 어떻게 그 시절에 그리 나이도 많지 않았던 유길준이 그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을까요?
어릴 때부터 축적해온 수천 년 동방 문명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얕지 않았던 거죠. 촐랑촐랑거렸던 '신청년'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가 제시했던 진개화의 방안이라는 것도 조선 문명의 전면적인 실현이거든요. 사농공상,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군자처럼 사는 것, 만인이 성인처럼 살아가는 것, 그런 '근대화', 그러한 '민주화'를 머리 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國民皆士論(국민개사론)'을 개진했던 것이고, 興士團(흥사단)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저력과 근성이 단절된 것이야말로 남북 분단의 가장 큰 해약이라고 봅니다. 한학적인 소양을 갖추면서도 신문물 습득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북과 남 양쪽에서 모두 배제되어 가거든요. 그래서 남쪽은 친일파와 친미파 등 얼치기 개화파들이 득세하게 되고, 북쪽은 친소파, 친중파가 다투다가 '주체 사상'으로 쪼그라들면서, 한말로 치자면 '위정척사파'들이 주도해가는 나라꼴이 된 것이죠. 결국 유라시아 전체를 놓고 보아도 인문 국가의 최전선에 있었던 조선의 후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다른 성격의 군사 국가가 되어버렸고요.
남쪽 역시도 소인배들이 지배하는 품격이 없는 나라가 되었죠. 혹자가 '개돼지'를 운운했다고 하는데, 실상은 한국의 지배 엘리트들의 의식과 품성과 양태야말로 천민적이잖아요. '제대로 된 엘리트'를 양성하는 시스템의 부재가 얼마나 치명적인 사태인지를 진보파에서도 깊이 숙고해봐야 합니다. '각성된 노동자', '깨어있는 시민'만이 결코 전부가 아니에요.
민주정이든 공화정이든, 과두정이든 독재정이든, 결국 최종 의사 결정자는 한 명이에요. 최고 권력자는 어떠한 정치 체제이든 한 명이고, 그 한 사람 곁에는 소수의 지배 집단이 있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 체제의 형식을 불문하고 동일한 사태입니다. 지배 집단의 숫자를 가지고 정치체를 나누는 서구의 정치학 자체가 수준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 년 전이나, 천 년 후나 국가를 이끌어갈 그 최고의 정예 집단을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는 너무나도 중요한 과제가 되거든요. 그게 부재해요. 오늘의 서울대학교가 조선의 성균관보다 수준이 훨씬 떨어지거든요. 밥상머리에서 전수되는 家學(가학)의 전통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영어 유치원이니 조선족 보모들에게 교육을 '아웃소싱'해버려요.
大學(대학)의 근간이 되는 小學(소학)이 붕괴된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나서 민중을 개돼지로 취급하는 엘리트와 민심을 천심으로 떠받드는 엘리트와는 천양지차이거든요. 엘리트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없다는 리얼리즘에 즉하여 제대로 된 엘리트를 키워내야 하는 것이지요. '교조적 민주주의'가 결여하고 있는 이 치명적인 한계가 '헛개화'와도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따라하고 따라 갈 역할 모델도 없어요. 자민당이 독주하는 일본이 모델입니까, 트럼프와 힐러리가 경쟁하는 미국이 모델입니까. 아니면 극우파들이 난동하는 유럽이 모델입니까. 유럽의 몇몇 국가에서 신선한 좌파 정당이 등장했다고 솔깃해하는 진보 진영 지식인이나 정치인을 보면 저는 좀 딱해요. 아직도 120년 전 유길준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헛개화'를 또 하자는 것인가. '다시 백년'을 반복하자는 것인가. 장탄식하게 됩니다. 자력갱생해야죠. 자강불식해야합니다.
윤여준 : '헛개화'를 서구적 근대에 대한 추종이라고 풀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박사는 이 책에서 '지구적 근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탈냉전 이후 유라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서구적 근대의 종언이고 '탈서구적 근대'의 개막이라고도 했습니다. 유라시아는 지구적 근대의 중원이고 20세기 억압되었던 역사의 무의식이 중국몽, 인도몽, 아세안몽, 터키몽, 이란몽으로 피어난다고 했죠. '진개화'와도 연결되는 발상일 것 같은데요. 일단 지구적 근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병한 : 제 용어는 아니고, 싱가포르에서 뵈었던 프라센지트 두아라 교수가 쓰는 개념입니다. 냉전기가 동구적 근대(사회주의)와 서구적 근대(자유주의)가 경합했던 절정기였다. 그들의 체제 경쟁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던 냉전 구도가 깨지면서, 아시아의 여러 문명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죠. 비서구적 문명들이 집합적으로 재등장하면서 탈서구적 근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독법입니다. 다만 제가 조금 더 보태고 싶은 것은 그 '지구적 근대화'라는 것도 1000년의 스펙트럼으로 다시 봐야한다는 것이죠.
자유 시장, 신분제 해체, 고도의 관료제 등 우리가 흔히 '근대성'으로 일컫는 현상의 다수가 중국 송나라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송나라에서 근대적 시스템의 맹아가 등장했고, 바로 그 다음이 원나라, 즉 몽골세계제국이었어요. 몽골은 유라시아를 대통합하지 않았습니까. 그 유라시아 연결망을 통하여 송나라에서 구축된 시스템들이 서쪽으로 차츰차츰 옮아갔던 것이죠.
제가 최근 몇 년간 읽었던 책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송학의 서천(宋學の西遷)>을 꼽습니다. 사서삼경을 비롯한 고전부터 주자학의 정수들이 어떻게 서쪽으로 번역되어 가는지를 추적한 역작입니다. 페르시아어, 아랍어, 라틴어 등등으로 계속 번역되어가죠. 그 1000년에 가까운 번역 끝에 프랑스어로도 번역이 되요.
그리고 프랑스에서 일어난 현상이 뭐다? 바로 프랑스 혁명이라는 거죠.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서 발원한 송학이 서쪽 끝에 자리한 서유럽까지 전파되면서 유교적인 인문 사회, 즉 서구에서 말하는 '계몽주의'가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책의 부제가 '근대 계몽으로의 길'이거든요. 말 그대로 '천년의 근대화'라고 할 수 있죠.
프랑스 혁명이라는 것이 왕의 목을 친 것이잖아요? 그런데 맹자를 읽으면서 살았던 동방에서는 숱하게 있었던 일이거든요. 왕이 왕답지 못하면 그 왕의 목을 따고 왕다운 새 왕으로 교체하는 것이 '革命(혁명)'이었으니까요. 그 혁명을 서유럽도 18세기에는 해볼 수 있게 된 것이죠. 우리가 그간 배워왔던 서구 주도의 세계사를 전면적으로 다시 써야할 시점입니다.
윤여준 : 이 엄청난 '반전의 시대'를 맞이해서, 중국, 인도, 아세안, 이란, 터키 모두 나름의 꿈을 꾸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한국몽'을 꾸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꾸어야 할 한국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병한 : 다소 우려스러운 흐름 중의 하나가 고구려에 대한 과도한 관심인 것 같아요. 북방 감각을 환기시키는 선에서 그치면 좋겠습니다. 북방의 잡다한 민족들이 혼거했던 잡종 제국 고구려가 '우리만의 나라'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런 큰 영토와 강한 군사력에 바탕을 둔 대국주의나 제국몽에 열광하는 것이야말로 '지난 100년'의 낡은 논리에 가깝습니다.
당분간 통일이 되기도 쉽지 않겠지만, 혹여 남북 연합 수준이나마 통합이 된다하더라도 100년간 억눌려 왔던 민족주의가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고려인, 미국과 일본의 동포들까지 아울러 일시에 분출하면 그건 정말 곤란한 사태일 것 같아요. 제가 하노이에서 살 때 베트남 원로 지식인을 종종 만났는데요.
술이 적당하게 취하면 '우리가 왕년에는 동아시아의 넘버 투였다.'고 회고하시거든요. 내면 깊숙이 대국에 대한 열망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일면 이해는 하면서도, 그런 점이 도리어 저는 걱정이에요. 서둘러 동아시아의 모든 구성원들이 '천하위공'을 집합적 가치로 삼는 공부를 다시, 새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 100년처럼 외부 세력의 농간질이 아니라, 내부 세력들 간의 갈등과 반목으로 '다른 100년'을 열지 못할 수도 있거든요.
재차 <송학의 서천>에 빗대어 말하면, 송나라는 중국 제국의 역사 속에서 작은 왕조였습니다. 북방 민족들에게 힘에서 밀려나 남방에 터전을 두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0년의 근대화'를 추동하는 소프트웨어, 운영 체제를 만들어 낸 것이거든요. 한국 및 통일 한반도의 국가 규모에서 해야 하는 일도 그런 방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유라시아 견문을 다니며 한국 출신이라는 혜택을 참 많이 봅니다. 음악,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대중문화의 영향이 굉장해요. 가는 곳마다 환대받고, 현지 사람과 쉽게 친해질 수 있고요. 사람들의 손마다 들린 핸드폰부터 여성들의 화장품까지도 한국산이 각광을 받고 있죠. 제조업과 문화 산업은 자생력을 키워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글로벌 브랜드까지 생겨난 것이고요. 그런데 고급 문화만은 전혀 그러하지 못해요. 한국 학자들의 학문과 사상이 나라 밖으로 거의 유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30년 정도가 기회의 시간이라고 봅니다. 중국은 여전히 중국공산당이 일정하게 사상 통제를 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남방의 불교와 서역의 이슬람을 소화하고 나서 '신유학'이 만개한 것처럼 되기에는 힘들어 보입니다. 그러한 역할을 주변의 소국들이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중국 같은 대국은 일대일로 같은 메카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우리는 그 유라시아를 대통합하는 하드웨어에 어떠한 소프트웨어를 장착시켜 송출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유라시아의 사상과 학문과 문화의 교류와 교감을 선도하는 촉매라고 할까요? 불교 국가 500년, 유교 국가 500년, 압축적 서구화 100년. 이 얼마나 비옥한 토양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유라시아의 동서남북을 둘러보아도 한국 같은 나라 드물거든요.
윤여준 : 글쎄요. 지금 한국의 지식 사회는 거의 미국 출신 학자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형편인데…. 지금 이 박사가 말한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이병한 : 대중문화에 종사하는 분들, 예전에는 다 미국 팝송 듣고 할리우드 영화 보며 성장하셨을 거예요. 지금은 자립하셨잖아요. 독자적으로 문화 상품을 만들어서 전 세계로 수출하고 계시잖아요. 지식인만 이런 일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浩然之氣(호연지기)가 없어요. 맥아리가 없습니다.
동방지사의 기상이 100년 사이에 완전히 꺽인 것입니다. 사무라이와 카우보이의 완력에 눌려 버렸습니다. 고작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에서 삐딱한 맨션을 날리는 포즈만 취할 뿐이죠. 한국에 돌아오면 신진대장부들의 호연지기를 '점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소수의 전위나마 그들의 역량을 결집시키고 자생적 담론을 발신할 수 있는 거점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잃어버린 '사기'(士氣)를 북돋고 싶어요.
윤여준 : 제 주변의 연배가 있는 지식인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쇠퇴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의 쇠락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위태롭게 한다고 여기죠. 굉장한 불안감과 공포심이 있어요. 한국의 지식인이나 일반 국민들이 미국에 대한 정신적 의존도가 너무 크다고 할까요.
아무리 한미 동맹이 중요하고 미국이 우리에게 도움 준 것이 많다 하더라도, 주체적으로 미국이 중요하다고 인식해야 하는 것이지 미국이 자비롭고 은혜로운 나라라서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미국의 세계 전략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고 한국을 도운 것 역시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니까.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순간이 오면 우리가 붙잡는다고 미국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미국에 잘해야 하고, 심하게 말하면 미국을 잘 섬겨야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최근 미국 쪽에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타격을 검토하겠다는 말이 나왔다고 하죠. 박근혜 대통령도 몇 차례 전쟁 운운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실제 국정 운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헷갈리기도 하고요. 그래도 선제공격 얘기까지 나온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인 것 같습니다.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은 어떻게 보시는지?
이병한 : 제가 군사 안보 전문가가 아니라서 당장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서 답변하기는 힘들고요. 아무래도 현재 정권을 쥐고 있는 세력의 천박한 속성을 보건대 남북 긴장을 최대한 고조시킴으로써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낡은 술수를 재가동시키겠죠. 그러나 남북 간의 알력이 국지전은 몰라도 전면전으로 비약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 같고요.
다만 역사학자로 전망해 보자면, 역시나 장차 가장 큰 문제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세력 전이 같습니다. 미국의 고위 관료와 엘리트도 시간은 중국의 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의 정보와 지식을 수집하고 있고, 지구본을 돌리면서 전략을 짜는 사람들이잖아요. 30년, 40년이 지나면 미중 간 역전이 벌어진다는 것,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걱정인 것은 그 사실을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에 불리하다면,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은 것이죠. 즉, 더 이른 시기에 중국을 눌러버리는 것입니다. 20년, 30년 후에 양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하면 승패를 예단하기 힘들지만, 지금이라면 우리가 중국을 압도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즉 미국이 확보하고 있는 정확한 지식과 정보가 한반도 주민들에게 엄청나게 위험한 판단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생겨난 지 300년도 채 안된 국가입니다. 200년 이상 '성장'만 해온 나라에요. 단 한 번도 하강이라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2등 국가, 3등 국가로 밀려나본 경험이 부재하죠. 그래서 '성숙'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성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한다는 자연스러운 역사를 경험해보지 못한 순수한 철부지 '근대 국가'라는 점에서 치명적인 파국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하강하는 미국을 잘 관리하는 것이 전 세계가 협동하고 협심해야 하는 집합적인 과제라고 봅니다.
윤여준 : 하강하는 미국의 반대편에 부상하는 중국이 있습니다. 일대일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군요. 후안강 교수를 직접 만나기도 했고요. 후안강은 중국의 일대일로를 500년의 식민주의, 200년의 제국주의, 20세기의 패권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중국은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세계는 일대일로를 통해서 기존의 서양 사전에는 없는 단어인 '윈윈이즘', 즉 윈윈의 시대로 진입할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이 박사는 이걸 '공영주의'로 받았는데, 중국의 일대일로를 통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대안으로서 세계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보편적 가치나 새로운 문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까?
이병한 : 지난 한 달 동안 이런 질문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딘가 좀 어긋나 있는 질문 같아요. 중국이 이런 것을 할 수 있다고 보느냐? 혹은 중국에 어떤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이냐? 미국 만능론에서 중국 만능론으로 바뀌었다고 할까요?
윤여준 : 일단 일대일로가 그렇다고 하니까요.
이병한 : 일대일로는 열린 프로젝트라고 봅니다. 이제 초입기고요. 시진핑 집권기에 한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백년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건국 100년인 2049년을 내다보는 30년 계획 정도는 되겠죠. 그러나 중국의 일방적인 프로젝트만도 아닙니다. 유라시아 국가들이 다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성사될 수가 없는 합동품이에요.
일대일로의 범위를 보면 중국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공영주의'라는 말도 나온 것이겠죠. 인도나 러시아, 이슬람과 유럽 등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국가이자 문명권인데 중국이 어떻게 홀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겠습니까? 다국적, 다문명 프로젝트입니다.
저는 현재의 중국을 결코 과대평가하지 않아요. 모자라고 부족한 지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이웃 나라로서 개입할 여지가 큰 것이지요. 중국이 자본주의/민주주의 이후의 새 문명을 구현할 수 있을지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견인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강하는 미국을 잘 관리하는 것이 인류의 집합적 과제인 것처럼, (재)부상하는 중국을 잘 다스리는 것도 세계적인 숙제거든요.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소 닭 보듯, 남 일로 볼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일대일로가 실패한다면? 미국식 자본주의라든가 영국식 제국주의를 중국이 반복한다면?
그건 중국의 규모로 보건데 호모 사피엔스 전체의 재앙이거든요. '역사의 종언'을 너머서 '종의 멸종'을 우려해야 할 가공할 상황이 되는 것이죠. 중국의 14억 인구가 미국인처럼 소비하고 영국인처럼 유라시아를 지배해서는 인류의 미래가 없어요. 제발 自他不二(자타불이)의 정신을 발휘해서 지구를 위해서도, 후세를 위해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일대일로 사업은 '天下爲公(천하위공)'의 기준에서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나누어가지길 바랍니다.
윤여준 : 9월 22일자 <내일신문>에 추잉치우 베이징 대학교 교수가 쓴 칼럼이 있습니다. 한 대목을 읽으면 이러해요.
"동북아에는 북한의 위협을 구실로 남북 대결 구도를 만들고 사드 배치로 한중 갈등을 조성하는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가 없다. 그래서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안보가 아닌 경제 측면에서 동북아가 아닌 다른 지역의 서쪽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이건 동북아가 막혔으니까 서쪽으로 경제를 뚫는 것으로 일대일로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훨씬 현실주의적인 독법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병한 : 현상적으로 틀린 이야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실제로 중국 입장에서 보면 동아시아야말로 가장 곤란한 곳이죠. 미국과 더불어 일본이 있는 장소이니까요. 공을 들였던 한국마저 한-미-일 동맹 강화로 이탈하는 모양새이고요. 통 말을 안 듣는 형제국, 북조선도 있죠. 중국이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전략을 짤 때, 가장 골치 아픈 곳이 동북아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출로를 서쪽에서 구하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역으로 동북아를 이대로 방치하거나 우회한다면 후안강이 말하는 공영주의 세계가 펼쳐지기도 힘들어지게 됩니다. 이쪽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만이 중국이 원하는 미래상이 펼쳐지고 중국몽도 실현되는 것입니다,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가 없다? 견제가 곧 억제는 아니거든요. 지금 시점에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수준의 정책만 추진했어도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사이에 또 그만큼 시대가 변했잖아요? 시세가 더 기울었습니다. 미국의 힘은 조금 더 떨어졌고 중국은 소위 'G2'라는 불릴 정도로 올라갔고. 동일한 정책이라는 것도 시세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것이니까요.
지금 동북아 균형자 정책을 취한하면 훨씬 더 탄력이 붙고 실현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때는 무르익었는데, 정작 이상한 사람이 권좌에 있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울 뿐이죠. 밖에서 보면 안에서 있을 때부터 더욱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한국을 바라보게 되는데요. 한국은 국운이 기울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배치 등으로 제 숨통을 스스로 죄어가고 있어요.
참으로 딱한 것이 박정희였다면 지금의 박근혜처럼은 하지 않을 것이에요. 아버지 정도의 식견만 갖추었어도 매우 달랐을 것입니다. 그보다 못한 것이죠.
윤여준 : 오늘 대화에서도 나온 말처럼 남북한이 조선 문명과는 너무나 상이한 두 개의 국가가 되어 반목하고 있는 풍경이 70년째 이어지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 동학 운동에 주목하자고 했죠. 서학과 국학의 분단 체제를 허물고 구학과 신학의 분단 체제를 극복하는 동아시아학이 지향해야 할 덕목을 상당 부분 내장하고 있다고요.
심지어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부터 해방 100주년이 되는 2045년까지를 21세기형 동학 운동을 재개하는 기간으로 삼자고 제안했습니다. 동학을 계승하고 보완해서 통일 국가의 헌장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말까지 했어요. 동학의 어떤 부분이 민족 통일의 정신적 뼈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병한 : 동학이 겨냥했던 말이 서학이지 않습니까? 유럽이나 미국, 혹은 일본을 경유해서 들어온 학문이 서학이었던 것이죠. 그 서학이 지금의 대학을 재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학은 자연과학, 공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문학과 사회과학, 예술 분야까지 온통 서학 천하입니다.
반면에 국학이 아주 가늘게 연명하고 있어요. 국사나 국문학 등의 제도에 힘입어 지속하고는 있죠. 그런데 이들 국학은 지나치게 폐쇄적입니다. 우리 것을 지킨다고 하는 사명의식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서학과도 담을 쌓고 이웃 나라에 대한 공부와도 소원해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동아시아 문명 전체의 지평 속에서 살펴야 할 것인데, 오히려 일본이나 중국에 더 적대적인 것도 같고요. '이웃애'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제가 동학 운동에 깊은 애정을 갖는 것은 일단 이름부터가 독보적이고요. 한국의 근현대사가 배출한 최상의 어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상적 지향에서도 매우 독특합니다. 유학을 고수하자는 위정척사파도 아니었고요. 내 것만을 섬겼던 국학파도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친일파, 친미파, 서구파는 더더욱 아니었죠. 조선이 축적해온 유교 문명을 가장 급진적으로 민주화/민중화시키려고 했던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학의 경전들이 사서삼경과 단절된 것이 아니거든요. 그걸 더 쉽게 풀어서 이야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민도 상인도 여성도 조선 문명의 정수를 골고루 누리게 사는 세상을 지향했던 흐름이 동학으로 표출되었던 것입니다. 서원이나 성균관에서 엘리트 자제들만이 누렸던 한학의 고급 교육을 만인이 배울 수 있는 '평생 교육'으로 전환시키려고 했던 것이죠. 실로 파격적인 민주화 운동 아닙니까?
동학도들이 말했던 '후천개벽'이라는 것도 '선천'과 전혀 다른 신세계, 모던한 세계가 아니었어요. 선천의 지극한 완성이야말로 후천개벽이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새 것에 탐닉했던 개화파에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었겠죠. 옛 것과 새 것 사이의 절묘한 균형 감각이 있었습니다. 혁명적이었으되, 중용을 지켰어요.
농민 혁명 같은 식의 계급사관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서구의 부르주아 혁명이나 동구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는 일선을 긋는 '동방형 민주화'의 결실로서 동학 운동을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동학 운동을 기본으로 삼아 통일 헌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3.1 운동만 해도 남과 북이 쉬이 합의가 안 되는 점이 있거든요.
북에서는 부르주아 애국 운동 정도로 깎아 내리죠. 아니 이번에 와서 보니 남북은커녕 지금 남쪽에서도 건국절이니 뭐니 해서 3.1 운동과 임시정부에 대한 기존의 합의가 흔들리고 있잖아요. 그러나 동학 운동은 북조선과 남한을 막론하고,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장구한 '1000년의 근대화', '동방의 민주화'의 관점으로 재조망한다면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게 내장되어 있다고 봅니다.
윤여준 : 제가 아는 선에서 요즘의 동학 연구는 크게 세 가지 경향이 있는 것 같더군요. 하나는 근대의 결핍입니다. 일본과 청국 간 갈등이 만들어낸 단순한 배외주의에 불과했고, 학정에 대한 농민의 반란이지 봉건 체제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운동이었다는 시각입니다.
그 다음은 근대 지향의 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평등주의, 혁명주의, 민족주의를 지향했기 때문에 근대성을 취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소상품 생산자로서의 경제적 성장이나 소농인 경제의 자립성 쟁취, 전국 단위의 지배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던 농민 전쟁으로서 혁명적인 근대 지향성이 있었다는 것이죠.
나아가 근대 극복의 시각에서 동학을 연구하는 동향도 있습니다. 봉건주의 반대, 식민지화 반대, 종속적 자본주의화 반대 등의 속성을 가졌고 부르주아 혁명과 구분되는 자율적인 농민 혁명으로서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사회 건설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면서 근대 극복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평가입니다. 물론 다들 서구적 근대를 기준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이병한 :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이 핵심인 것 같습니다. 결핍, 지향, 극복 등 판단의 기준이 서구에 있습니다. 근대의 잣대를 서구의 경험에서 찾고 있죠. 저쪽 기준을 두고 이게 부족하니까 결핍이라고 하는 거고, 비슷하면 근대 지향인 것이고, 더 다른 면을 부각시키면 근대 극복이라고 평가하는 것이죠.
저는 재차 1000년의 근대화, 동방형 민주화의 관점에서 동학을 재고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실 의회제나 선거 등등은 '민주'의 핵심 요소가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수단이고 방편이며 제도일 뿐이죠. 수단과 방편은 역사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필요하면 저쪽의 제도도 빌려와서 쓸 수 있는 것이고, 낡아버렸다면 고쳐서 써야 하는 것이고, 시효가 만료되었다면 처분해도 그만인 것입니다.
저는 모두가 한 표씩 행사하는 '민주주의'보다 만인이 성인이 되는 길을 열고자 했던 동방형 민주화가 훨씬 더 수준이 높고 깊이가 있는 '민주'를 탐구했다고 봅니다. 북조선도 남한도 건국 헌법이란 것이 실상 다 빌려 쓴 것이고 베껴 쓴 것이거든요. 북과 남이 재회하는 통일 국가의 헌장이라면 수준이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윤여준 : 미조구치 유조가 쓴 <중국의 충격>이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중국 혁명을 설명하려면 중국의 역사 속으로 선입견 없이 들어가야 한다고요. 유럽의 근대를 기준으로 중국의 근대를 설명하려는 방식 자체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죠. 이 박사의 견해와도 통하는 발상 같군요. 동학에 대해서도 선입견 없이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는 것이겠죠?
이병한 : 네. 동학은 만개해 본적이 없는 사상 운동이고 정치 운동이고 문화 운동이고 경제 운동입니다. 잠시 싹을 틔웠으나, 모진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시들어 버렸죠. 동학에 바탕을 둔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만들어보는 실험도 거의 하지 못했어요.
저는 그 시든 나무에 물을 붓고 거름을 주어서 다시 키워내고 싶어요. 죽은 불씨를 되살리는 '점화'를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지난 100년 전속력으로 질주해왔으나 돌아보니 결국 '헛개화'였다는 점에 우리가 크게 합의할 수 있다면, 지금 와서 되새겨보고 되살려야 할 최고의 유산 역시 동학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진개화에 이르는 첩경이라고 봅니다.
다만 120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죠. 제가 지난 100년간 열심히 배웠던 서학을 송두리째 버리자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굳이 수사를 붙이자면 '新東學(신동학)'이라고 할까요? 송학이라는 것이 신유학이잖아요? 서역의 이슬람과 남방의 불교를 수용해서 소화한 뒤 자신들의 유교와 혼종시키고 융합시켜 빚어내었던 '르네상스 운동'이었죠.
새로운 1000년의 신동학 또한 유럽과 아메리카가 전수해주었던 서학과 지난 1000년의 신유학을 재차 혼융시켜 재창조해내는 네오 르네상스 운동이 아닐까 합니다. 그 운동을 우리만 홀로 할 것이 아니라, 유라시아의 여러 이웃들과 다함께 일으켜보자는 뜻에서 그곳 나라들을 견문하고 있는 것이고요.
이슬람 세계로 이 대화를 나눈 것은 9월 28일이다. 프레시안 사무실이 자리한 홍익대학교 근처였다. 훌쩍 보름이 흘렀다. 나는 그 사이 공간 이동을 해서 이집트의 카이로에 있다.
한국에 들어가기 전 거처로 삼았던 이스탄불의 사정이 여전히 녹록치 않아서이다. 외국인의 이스탄불 대학교 출입을 지금도 금하고 있다. 오스만제국의 문헌이 빼곡하게 소장되어 있던 근사한 도서관을 활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곳에 거점을 두고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서유럽까지 살피려 했던 애초의 계획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스탄불의 영광을 20세기에 계승한 곳이 바로 카이로였다. '근대' 아랍 문화의 발신지로서 학문과 예술, 사상의 메카 노릇을 했다. 이곳에 새로운 거점을 차릴 수 있을지 대학과 도서관, 머물 집 등을 탐색하며 지내는 와중이다. 그런데 교통과 주택 등 인프라가 열악하다. 그 소산으로 공기 또한 탁하다.
쾌적한 생활 환경은 이스탄불이 훨씬 좋건만, 정치 환경이 발목을 잡는다. 이스탄불로 복귀할 것인지, 카이로로 변경할 것인지, 아니면 아주 이슬람 세계의 서쪽 끝, 이븐 바투타의 여행이 시작되었던 모로코처럼 안전한 곳으로 옮아가버릴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심란한 상태이다.
하더라도 한국행으로 두 달이나 밀려버린 연재를 더 이상 방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틈틈이 짬짬이 원고를 정리해갔다. 나일 강의 석양이 내다보이는 강변 카페에 앉아서 마침내 마지막 퇴고를 보고 있다. 이처럼 마땅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채 전전하고 있는 꼴부터가 시대적 환경의 소산일 것이다.
명색이 '유라시아 견문'인데도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도 이라크의 바그다드도 가볼 수 없는 사정과 무연치 않다. 중동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이슬람 세계가 격변하고 있다. 두어 달 살았던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구에는 그 사이 더욱 많은 시리아 난민들이 몰려와 아침저녁으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이곳의 혼란함이 나의 심란함으로 전이되어 공명해가고 있다.
이 모든 난맥상의 상징으로 2014년 이슬람국가(IS)의 등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견문 또한 IS로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지난 100년의 종언, 다른 100년의 출발을 알리는 세기적인 사건이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