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시아 : Look West
이병한 : 인도가 유라시아 지정학에서 중요한 것은 서아시아와도 긴밀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서는 Look East가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더 활발한 것은 Look West 정책 같더군요. 여기서의 'West' 또한 구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요. 서아시아, 아랍 세계, 이슬람 세계를 일컫습니다.
타루르 : 서아시아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도 포함합니다.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이 아프리카와 서인도를 긴밀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습니다. 첫째, 경제적으로 밀접합니다. 인도의 중동 무역은 수출의 20%, 수입의 30%를 차지합니다. 권역별로 보면 인도 최대의 무역 상대가 중동 국가들입니다.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의 수입 비중이 높죠. 인도는 이미 중국, 미국, 러시아를 잇는 세계 4위의 에너지 소비 국가입니다.
둘째, 송금 경제의 비중이 막대합니다. 현재 중동에 거주하고 있는 인도인들이 600만 명을 넘습니다. 이들이 인도로 송금하는 액수가 2015년에만 800억 달러였어요. 이 수치는 인도가 자랑하는 IT 소프트웨어 수출액 700억 달러보다도 많은 것입니다. 외화 획득에서 중동은 인도의 가장 중요한 장소입니다.
이병한 : 식민지 경험의 역설이라고 해야겠지요. 인도인의 중동 진출은 아무래도 대영제국 시기의 산물일 텐데요. 이제는 인도의 전략적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중국과 화교의 네트워크에 못지않은 인도와 인교의 연결망을 구축해가고 있습니다.
타루르 : 글쎄요. 저는 그게 꼭 대영제국의 유산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도래 이전에는 이슬람의 도래가 있었죠. 북인도에 술탄 국가가 세워진 것이 대략 1000년 전입니다. 그런데 아라비아 해를 통한 중동과 인도의 교류는 이슬람 이전으로 더더욱 거슬러 오릅니다. 인도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간의 문화적 연결망은 역사 시대 이래 줄곧 기록으로 남아 있어요. 저는 무굴제국의 인도 진출도, 대영제국의 인도 점령도 그 역사적 유산을 활용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병한 : 재밌는 말씀입니다. 저는 중국의 서역을 '이슬람적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도의 북부 또한 '이슬람적 인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중화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교차로가 서역이었고, 힌두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만나는 곳이 북인도였습니다.
타루르 : 인도는 오래전부터 이슬람 세계에서 '풍요로운 땅'을 상징했습니다. 아라비아 반도의 삭막한 사막에 견주면 히말라야와 인도양 사이에 자리한 인도 아대륙이 그렇게 보였을 가능성이 크지요. 그래서 지금도 아랍 세계의 명문가 집안의 성으로 "Al-Hindi"가 많은 것입니다. HInd는 아름다움, 선망 등을 뜻하는 아랍어지요. 아랍 여성들 중에도 이름이 Hind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0'을 포함한 십진법 등 인도의 수학이 가장 먼저 전파된 곳도 아랍이었습니다. 지금은 흔히 '아라비아 숫자'라고 하지만, 사실 그 기원은 인도였어요. 유럽에서 뒤늦게 그 표기법을 받아들이면서 '아라비아 숫자'라고 오기한 것입니다.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즉 이슬람 문명이 약진하던 바로 그 시기는 역설적으로 인도의 수학과 과학, 의학, 천문학 등이 아랍으로 널리 확산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바그다드에서 인도 서적을 집중적으로 번역하는 사업을 펼치기도 했지요. 바그다드의 유명한 '지혜의 집' 또한 인도의 고전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천일야화> 같은 작품도 탄생하고, 그 아랍 문학이 유럽까지 전파되면서 <이솝우화>도 만들어진 것이지요.
이병한 : 몹시 흥미롭습니다. 인도가 아랍의 '계몽주의'를 촉발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9세기 바그다드에서 전개된 인도 고전 번역 사업은 마치 동시기 대당제국의 시안에서 펼쳐졌던 불경번역을 연상시키는군요. 송나라의 신유학 또한 '인도의 충격'을 소화한 이후의 중국판 '계몽주의'였습니다. 한쪽에서는 산스크리트어가 한문으로, 다른 쪽에서는 산스크리트어가 아랍어로 번역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번역을 통하여 인도 문명이 동쪽으로는 중국을 거쳐 일본까지, 서쪽으로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고요. 그렇다면 8~10세기 유라시아의 중심은 인도였다는 생각마저 드는군요. 인도가 세계의 한 가운데 자리한 '中國'이었다고 할까요. 저로서는 이 1000년이 넘는 문명의 유산이 20세기에는 어떻게 (재)가동되었는지가 궁금합니다.
타루르 : 간디를 예로 들어 볼까요. 그는 인도의 독립만을 추구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랍과 이슬람 세계도 항상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간디가 주도한 킬라파트(Khilafat) 운동이 대표적입니다. 오스만제국의 칼리프 제도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영국 정부에 주장했습니다. 이슬람 세계의 고유한 정치 제도의 복원과 재건을 요청한 것이지요.
간디와 협력하여 인도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하고 훗날 국민회의 의장까지 지낸 인물로는 아불 칼람 아자드가 있지요. 사우디의 메카에서 태어나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유학했던 무슬림이 인도의 독립에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독립 운동은 아랍과 터키와 이집트에서도 줄곧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고요. 인도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지지하고, 알제리의 민족 해방 전쟁을 응원했으며,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도 성원했습니다.
이병한 : 그렇다면 인도의 비동맹 운동, 제3세계 노선 등도 갑자기 돌출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인도양을 사이로 한 오래된 유대 관계가 기저에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타루르 : 그 유대 관계는 상호간의 경제 합작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걸프 만 국가들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기에 노동력을 제공한 것이 바로 인도입니다. 카타르의 도하도,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도 인도의 노동자들이 건설한 것입니다. 1980년대 바레인 같은 작은 나라에서는 한때 가장 많은 사람이 바레인 인이 아니라 인도인이었던 적도 있어요. 아랍에미리트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의 70%가 인도인이었던 적도 있습니다.
당시의 건설부터 현재의 금융까지 아라비아 반도와 서인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로는 영국과 미국으로 쏠렸던 중동의 자본이 인도로 점차 선회하고 있음도 주목해야 할 대목입니다. 사회간접시설 등 투자처가 풍부하기 때문이지요. 대중문화 차원에서도 할리우드가 아니라 발리우드가 더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고요.
이병한 : 제가 '유라시아 견문'을 하면서 생긴 습관 중의 하나가 공항의 연결망 지도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역시 인도의 주요 공항들은 여타 세계보다는 걸프 만 공항들과 가장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더군요. 여기서 제가 궁금해지는 것은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와 아랍 세계의 관계입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 문명이라는 공속감을 통하여 아랍 국가들과 돈독합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적대적 경쟁 체제가 인도와 아랍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나요?
타루르 : 그 약한 고리를 가장 기민하게 활용했던 인물이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였죠. 동파키스탄, 즉 방글라데시를 상실한 이후에 파키스탄의 외교 노선의 축을 이슬람 세계로 전환시킵니다. 그래서 인도가 인도네시아, 파키스탄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무슬림을 보유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슬람협력기구(OIC)에 가입하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카슈미르 분쟁에도 거듭 OIC 국가들의 지지를 활용한 것도 부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는 역발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도와 아랍의 관계를 한층 강화함으로써 힌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공존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파키스탄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가 기획에 참여했던 또 다른 국제 행사로 인도-아랍 협력 포럼이 있습니다. 2008년에 출범하여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지요.
처음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오만으로 출발했다가, 지금은 이란과 이라크까지 추가되었습니다. 뉴델리는 시 차원에서 매년 인도-아랍 문화 축제도 개최하고 있지요. 여기에 호응하여 아랍에미리트 정부는 아랍어로 번역할 20세기 인도의 대표서적 목록을 선정하기도 했어요.
인도에서 아랍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직장인들의 숫자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도 아랍학이 갈수록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역사를 전공했던 사람으로서, 인도-이슬람의 과거로부터 인도-아랍, 인도-파키스탄 관계의 미래에 대한 영감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병한 : 인도에서의 아랍 열풍은 저도 그 혜택을 톡톡히 누렸습니다. 콜카타에서도, 뭄바이에서도, 뉴델리에서도 아랍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거든요. 인도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저 자신의 인도에 대한 편향을 교정해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영국과 미국에서 나온 인도 서적과 일본의 인도학 연구를 많이 참조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불교 교류사 연구도 살펴보았지요.
그런데 이러한 접근법 자체가 영미 중심이자, 동아시아 중심의 인도 이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와 아랍, 남아시아와 서아시아, 나아가 아프리카까지 이르는 인도양/이슬람 연결망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인도 견문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다시 동아시아와 관련된 얘기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인도와 중국의 관계입니다. '친디아'라는 조어도 이미 생겨났고요. 저는 종종 중국과 인도를 일컬어 '미래의 G2'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친디아 : 신형대국관계?
타루르 : 인도와 중국의 부상은 이제 진부한 상투어가 되었습니다. '부상(Rise)'이라는 말도 딱 들어맞는 단어도 아니지요. 본래의 역사적 위상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1820년대 중국은 세계 경제의 27%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인도는 23%였지요. 두 나라가 꼭 세계의 절반을 이루고 있던 것입니다. 2020년에는 그렇게 되기 힘들겠죠. 그러나 2050년에는 그에 근접한 비중이 될 것입니다.
관건은 양국의 관계가 어찌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영국과 러시아처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일 것인가, 냉전기 미국과 소련처럼 적대할 것인가, 탈냉전기 미국과 중국처럼 경쟁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 공존하는 협력 관계를 만들어낼 것인가, 장차 세계 질서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이병한 : <비동맹 2.0> 문건에서도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더군요. 빅 데이터로 문서를 돌렸더니 중국이 총 113건 언급되어 87차례의 파키스탄보다 많았습니다. 세 번째가 미국이었는데, 34차례로 중국, 파키스탄에 비해 차이가 좀 나고요. 그만큼 인도에서도 중국을 크게 의식하고 있다고 할 것인데요. 단도직입, 중국 위협론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타루르 : 중국의 재부상을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비동맹 2.0>에서도 위협(threat) 대신에 도전(challenge)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다만 중국과 인도는 매우 다른 나라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발전 단계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1978년과 1991년 사이, 13년의 격차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인도와 공산주의 중국이라는 체제와 모델의 차이도 매우 큽니다. 중국은 국가 중심의 하드웨어에서 앞서나가고, 인도는 IT 등 민간 영역의 소프트웨어가 발달해 있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중국이 위협이냐, 기회냐 하는 인식의 수준을 다루기에 앞서서, 인도에서는 중국에 대한 관심과 연구 자체가 미진하자는 '무지'부터 문제로 삼아야 합니다.
아랍학의 발전에 견주어서 중국학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거든요. 학자, 언론인, 학생 교환 등이 아랍이나, 유럽, 미국에 견주어도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닙니다. 인도에서 중국학을 더욱 키우고, 중국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이병한 : 인도의 항공 연결망을 보고 가장 놀라웠던 사실이 뉴델리와 베이징 사이에 직항로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타루르 : 그랬었죠. 저도 베이징에 갈 때면 시안이나 상하이를 경유하여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올해 중국항공에서 직항로를 개설했습니다. 인도 항공사에서도 곧 직항로가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0년도에 인도를 방문한 중국인이 10만 명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바로 그해에 말레이시아를 방문했더니 중국인 관광객 100만 명 돌파 기념행사를 열고 있더군요. 반면 중국을 여행하는 인도인들의 숫자도 많지 않습니다. 작년(2015)에 50만 명 정도였어요. 이는 몽골을 여행한 관광객 숫자보다 적은 것입니다. 민간 교류가 여전히 미진하다는 것이 통계적으로도 확인됩니다.
이병한 : 역시 바다로 연결되는 것과 히말라야를 사이로 한 연결망은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중국과 인도의 관계 개선은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14년 시진핑 주석은 모디의 고향인 구자라트를 방문했었고, 2015년 모디 총리는 시진핑의 고향인 시안을 답방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저는 내몽골을 여행 중이라서 당시 중국의 분위기가 생생한데요. 일종의 '인도열(印度熱)'이 일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시안이라는 장소의 상징성과 일대일로라는 국책 추진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겠죠. 그런데 중인 관계가 '신형대국관계'의 전범이 될 것이냐, 아니면 또 다른 경쟁 관계로 갈 것이냐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게 남아시아 소국들의 상황 같습니다. 중국의 인도양 진출이 파상적이지 않습니까?
타루르 : 그렇습니다. 남아시아 국제 관계의 비대칭성을 파고들고 있다고 할까요. 파키스탄에서는 과다르 항, 스리랑카에서는 함바토타 항, 방글라데시에서는 치타 공항, 미얀마에서는 시트웨트 항 등을 중국이 주도하여 건설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스리랑카의 최대 원조국으로 중국이 등극했어요. 1947년 이후 항상 으뜸이었던 인도를 제친 것입니다.
스리랑카 최초의 통신위성도 중국의 도움으로 쏘아 올렸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도 인도를 제치고 중국이 최대 교역국이자 최대 투자국으로 등장했고요. 몰디브 또한 남아시아 국가 이외에 처음으로 수도 말레에 대사관을 설치한 나라가 중국입니다. 남아시아의 주변국들이 압도적인 대국인 인도를 견제하는 방편으로 중국을 활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병한 : 남아시아 소국들의 '재균형' 전략이 중국의 양해(兩海) 전략, 즉 태평양과 인도양을 모두 아우르는 국가가 되겠다는 발상과 통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 맞불을 놓고 있는 것이 미국의 '인도-태평양'이라는 개념이고요. 미국-일본-호주에 인도를 끌어들여 태평양 연합을 형성하겠다는 것이죠. 인도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타루르 :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편입되어 중국을 봉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인도로서는 현명한 전략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도에서는 환인도양연합(IORA, Indian Ocean Rim Association)을 내세우고 있어요. 인도네시아와 이란, 남아프리카공화국, 호주까지 폭넓게 아우르고 있습니다. 중국의 양해 전략이나 미국의 인도-태평양과는 다른 인도양 공동체 구상을 제출한 것이지요.
이 기구에서 인도가 어떠한 리더십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인도양이 패권국들이 경합하는 격동의 바다가 될 것인가, '신형대국관계'의 모델을 보여주는 잔잔한 바다가 될 것인가 판가름이 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저는 기존의 '남아시아(South Asia)'가 아니라 '남부 아시아(Southern Asia)'라는 지역 개념도 발신하고 있습니다.
아라비아 반도부터 남아시아,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넓은 발상입니다. '환인도양'과 '남부 아시아' 모두 미국의 패권 지속도 아니고, 중국의 세력권 확대도 아닌, 인도발(發) 제3의 지역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병한 :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라는 발상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타루르 : 그렇지 않아도 가장 최근에 모디 정부에서 제출된 정책 이름이 'Look North'입니다. 소련에 속해 있다가 탈냉전기에 독립한 중앙 유라시아 국가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은 소련의 옛 속국이었던 곳이고, 점차 중국의 입김이 커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중앙 유라시아와 남아시아의 연결망을 재건하여 러시아와 중국의 세력 경쟁에서 생산적인 균형자 역할을 인도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복병은 역시 파키스탄입니다. 인도와 중앙 유라시아 사이에 파키스탄이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이병한 : 다시금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 극복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군요. 유라시아의 대통합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인도-파키스탄의 대화해와 대화합은 절실합니다. 중앙 유라시아와 남아시아, 나아가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까지 두루 아울러서 '남유라시아'(Southern Eurasia)라고 하는 것은 어떨까요?
타루르 : '유라시아'라는 단어를 너무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웃음) 당장은 현실성 있는 개념인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중국의 일대일로, 러시아의 대유라시아 구상, 인도의 '남부 아시아' 건설 등이 생산적으로 합류한다면 어떻게 될는지 두고 봐야죠.
이병한 : 저도 미래에 기투하는 개념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인도 독립 100주년이 되는 2047년, 중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을 전망하는 것이지요.
다동맹 : 인도의 마음
이병한 : 얼마 전에 싱가포르에서 마틴 자크와 대담하고 오셨죠?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입니다. 팍스 시니카를 설파하는 분이기도 하고요. 그 책은 이미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었는데요. 선생님의 <팍스 인디카>도 한국에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팍스 인디카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타루르 : 소프트 파워입니다. 인디안 마인드, 인도의 마음이라고 할까요. 정복욕, 승부욕과는 좀처럼 거리가 멉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가 올림픽의 구호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 구호가 유로피안 마인드, '근대인'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인도는 정반대입니다. 올해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인도의 성적을 보면 당장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웃음)
느긋한 삶(slow life), 깊은 삶(deep life)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 질수록 인도문명의 가치가 더욱 돋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유베다와 요가, 채식 위주의 인도 음식이 점차 주목받는 것도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는 것 같고요. 미국의 코카콜라와 맥도날드가 상징하는 '패스트 문화'와는 전혀 다르죠.
이병한 : 인도에서 지내면서 저도 식습관이 자연스레 변했습니다. 일단 술이 크게 줄었어요. 일반 마트에서는 캔 맥주조차 살 수가 없으니까요. 운동하며 땀을 흠뻑 흘린 후에 마시는 맥주 한 병이 하루를 마감하는 낙이었는데. 그것조차 즐길 수가 없더군요. 덕분에 더 맑은 정신으로 새벽을 맞이할 수다는 또 다른 즐거움을 얻었지만요. 그리고 채식 또한 일상화되었죠. 메뉴마다 채식과 육식이 따로 있으니, 구태여 고기를 시켜 먹게 되지 않더라고요.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고기를 부러 찾아 먹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타루르 : 그럼요.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은 인도의 마음에서 가장 동떨어진 상태입니다.
이병한 : 그 인도의 마음, 인도 문명의 요체는 힌두 문명입니까?
타루르 : 아닙니다. 고대 힌두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죠. 하지만 인도 문명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슬람 문명의 영향이 1000년 가까이 있었습니다. 당장 인도의 상징이 타지마할 아닙니까. 이슬람 건축의 절정이 인도에 있습니다. 더불어 영국의 식민 통치가 200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인도 안에 유럽이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3억의 인구가 민주주의 제도 아래 지속된다는 것은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이 누천년의 역사가 축적된 복합 문명이 오늘의 인도 문명입니다. 힌두 국가(Hindi Nation)가 아니라 하이브리드 국가(Hybrid Nation)가 더 어울리는 접근법이에요. 골목골목마다 힌두 사원이 자리하지만, 그 힌두인이 저녁마다 열광하며 TV를 시청하는 것은 영국이 전해준 크리켓 경기입니다. 그리고 가족이나 마을에서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갖추어 입는 '민족 의상'은 무굴제국기의 이슬람 복장에 기원을 두고 있지요.
이병한 : 그 복합 문명이 가능한 바탕에 힌두교가 있는 것 아닐까요? 싯다르타도, 마호메트도, 예수도 여러 신 가운데 하나로 포용해 버립니다.
타루르 : 인도 문명의 기저에 이슬람이나 기독교가 깔려 있었다면 현재의 인도가 보여주는 그 놀라운 다양성과 복수성을 담지 하기는 어려웠겠죠. 힌두교는 교황도 없고, 메카도 없는 종교입니다. 힌두식 일요일도 없고요. 위계적이지도 않고, 교조적이지도 않습니다.
이병한 : 선생님의 '다동맹' 또한 다신교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는 인상이었습니다.
타루르 : 제가 유엔을 그만두고 인도로 복귀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인도의 동쪽 벵골은 인도공산당이 통치하고 있었어요. 반면 인도의 서쪽 구자라트는 신자유주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요. 공산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나라가 인도입니다. 뉴델리는 그 차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고요.
'팍스 인디카'가 지향하는 바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동맹은 소극적인 발상입니다.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도는 이제 그 규모에 맞는 역할을 국제적으로,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어느 편도 들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양 편을 아울러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20세기형 체제 경쟁이 아니라 21세기형 공존 체제를 인도가 제안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19세기의 팍스 브리태니카, 20세기의 팍스 아메리카나와 21세기의 팍스 인디카는 전혀 다른 발상입니다.
이병한 : 영국의 '문명화', 미국의 '근대화' 혹은 '민주화' 같은 보편적 프로젝트를 추구하지도 않는 것일까요? 문명화도 민주화도 일종의 '체제 전환'을 도모하는 기획이었습니다. 기독교 특유의 선교와 개종의 전통이 근대화된 것이죠. 인도가 영국과 미국을 대신하여 세계에서 가장 경제 규모가 큰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을 때는 일방적인 '체제 전환' 시도가 일어나지 않을 런지요?
타루르 : 인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이라크 전쟁도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인도 문명은 역사적으로도 선교나 개종, 체제 전환을 통하여 확산된 적도 없습니다. 평화 공존은 인도 문명의 내재적인 성격입니다. 외래 문화를 수용하는 데는 능하되, 외국 문화를 식민화하는 것에는 재주가 없습니다. 왕년의 불교처럼, 오늘의 요가처럼 감화와 공감을 통하여 인디안 마인드가 세계로 널리 퍼져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인도는 더 강한 군대를 보유하기보다는, 더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더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이병한 : 그 말씀을 들으니 더 더욱 유엔 사무총장을 하셨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만시지탄입니다. 다시 도전해 보실 뜻은 없으신가요?
타루르 : 다음 아시아 출신 사무총장이 배출될 때까지 제가 살아있을까요? (웃음)
이병한 : 미래는 알 수 없으니까요. 다음에는 한국에서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
브렉시트 사태로 세계가 들썩였던 지난 7월, 타루르의 옥스퍼드 대학교 연설이 영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새삼 20세기의 브렉시트, 영국이 인도를 떠난 1947년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 전과 후를 비교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영국이 인도에 오기 전, 무굴제국은 세계 경제의 27%를 점하고 있었다. 대영제국이 떠난 직후 인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4%에 불과했다. 딱 그만큼 대영제국이 착취해간 것이다.
그래서 영국에 식민지 배상을 공개적으로 요청하여 논쟁을 촉발시킨 것이다. 여기에 적극 호응하고 나선 이가 모디 총리이다. 올해 하반기에는 모디 총리의 영국 방문이 예정되어 있다. 모디는 인도인민당 소속이고, 타루르는 국민회의의 의원이다. 여야를 넘어서 '역사 바로 세우기'에 모디와 타루르가 의기투합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과 인도, 유럽과 아시아의 형세가 대반전하고 있는 유라시아의 상징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타루르의 저서들도 한국에 널리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인도와 남아시아, 인도양와 유라시아를 아울러 '다른 백년'을 전망하는데 요긴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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