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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천년 제국, 부활의 날갯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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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천년 제국, 부활의 날갯짓

[유라시아 견문] 이슬람의 집 : 실향과 귀향

이슬람 : 유라시아의 대동맥

카이로에 떨어진 것은 한낮이었다. 북아프리카를 달구는 람세스의 태양이 작열했다. 인프라가 열악하다. 공항 철도는 없고, 공항 버스도 드물다. 10인승 승합차에 20명을 태우고 버스라고 한다. 가뜩이나 이스탄불에서 조기 철수한 처지에 심란함이 더해졌다. 택시를 타기로 했다. 어딘들 외국인은 봉이다. 바가지를 옴팡 씌우기 마련이다. 만반의 전투 태세를 갖추고 흥정에 임했다. 역시나 내가 알고 있던 가격의 서너 배를 부른다. 들은 척도 안하고 지나쳐 버렸다. 나의 단호함에 마침내 한 기사가 정가를 제시한다. 의기양양 그의 택시로 향했다.

내가 졌다. 택시 뒷자리에는 이미 딴 손님이 타고 있었다. 강제 합승을 당한 것이다. 짜증이 솟았지만, 정수리에 내리 꽂히는 햇살이 너무도 뜨거웠다. 원점으로 되돌아가 전투를 재개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불만을 표출하기도 전에 내 여행 가방은 이미 트렁크에 실린 상태였다. 결국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사의 표정이 득의만만했다.

택시는 낡디 낡은 고물이었다. 20년은 더 굴렸지 싶다. 수동 기어를 바꿀 때마다 변속의 진동이 고스란히 몸으로 전해지는 승차감을 보유했다. 에어컨도 틀지 않는다. 창문을 올리고 에어컨 좀 틀어 달라 해도 'one minute'만 10분째 반복한다. 택시 기사는 영어를 말하지 못했고, 내가 익힌 아랍어는 소용이 없었다. 문어(현대 표준 아랍어)와 구어(각 나라의 일상어) 간의 차이가 상당하다. 이집트의 생활 현장에서 사용하는 아랍어는 딴 나라 말이었다.

내가 어설픈 아랍어로 꿍얼거리자 뒷좌석에 앉아있던 이가 참견을 시작했다. 이집트 택시는 원래 에어컨을 켜지 않는단다. 창문을 열고 배기가스와 모래 먼지로 한껏 오염된 공기를 바람으로 맞으며 달리는 것이 통상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영어와 표준 아랍어 모두를 능통하게 구사했다. 그제야 처음으로 백미러를 통해 얼굴을 확인했다. 20대 후반 남짓의 아시아인이다. 덥수룩한 수염이 덜한 것만으로도 친근감이 전해졌다. 비로소 통성명을 나누었다. 인도네시아 사람이라고 했다. 동북아의 한국인과 동남아의 인도네시아 인이 북아프리카의 카이로에서 한 택시를 탄 것이다.

인도네시아라면 나도 작년(2015년)에 갔던 곳이다. 자카르타와 반둥을 둘러보았다. 글로는 옮기지 않았지만 몇몇 유적지도 탐방했다. 견문 2년차, 왕왕 이런 경우가 생긴다. 두바이에서 만난 택시 기사는 방글라데시 사람이었다. 영어와 아랍어를 8:2의 비율로 섞어 다카와 치타공에 대한 추억을 나누었다.

이 친구의 고향은 자카르타라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반둥 회의 60주년 기념행사와 조코위 대통령에 대해서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어째 반응이 시쿤둥하다. 반둥 회의로 말미암아 출범했던 아시아-아프리카 작가 회의 본부가 카이로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그 아-아 작가 회의가 수여하는 로터스 상을 김지하가 받았다는 일화 또한 머릿속으로만 아랍어로 작문해 보았다.

대신 그가 한껏 목소리를 높인 것은 'Lee Min Ho'였다. 매일같이 한국 드라마를 챙겨본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이민호가 최고란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너무 멋있다는 것이다. 한참을 드라마로 얘기꽃을 피웠다. 북아프리카에서도 한류 덕을 본 것이다. 나의 이메일과 그의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카이로 생활이 힘들면 언제든지 연락하란다. 우리는 아시아인이니까 이집트인이 해코지 하면 돕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시아인이니까',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이었다. 100년 전 쑨원이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겼다는 소식에 '아시아인'으로서 아랍인과 함께 벅찬 감동을 나누었던 곳이 바로 이곳 이집트였다. 쑨원이 통과했던 수에즈 운하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아시아인이면서 무슬림이기도 했다. 마지막 인사는 '인샬라'였다. 신의 가호를 빌어준 것이다. '슈크란', 나도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유학생이기도 했다. 카이로의 한 작은 대학에서 이슬람 신학을 전공하며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단다. 그러나 공부에 마음을 두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비즈니스의 방편이었다.

카이로는 20세기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탈이슬람화로 탈주하는 터키의 이스탄불을 대신하여 수많은 무슬림 유학생들이 카이로에 모여들었다. 그 유산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슬람 신학을 전공하는 학생에게는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유학을 지원한다고 한다.

그 친구는 그 저비용의 유학 비자를 얻어서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나와 조우한 날도 두바이에서 잔뜩 물건을 사서 카이로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2주 후에는 자카르타에 다녀온다고도 했다. 북아프리카의 카이로, 중동의 두바이, 동남아시아의 자카르타를 주유하는 항공 무역상쯤 되는 것이다. 16억 아랍어 공론장, 이슬람 세계의 연결망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비단 21세기 세계화의 소산만은 아닐 것이다. 14세기 북아프리카의 서쪽 끝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의 자바까지 이르렀던 이가 이븐 바투타였다. 중동에 있는 쇼핑의 천국 두바이에는 '이븐 바투타 몰'이 있다. 바투타가 여행했던 장소를 배경으로 쇼핑몰을 꾸며두었다. 튀니지관, 이집트관, 안달루시아관, 페르시아관, 인도관, 중국관 등 다양하다.

'중국의 무슬림' 정화가 대원정을 했던 함선도 재현해두었다. 그 쇼핑몰의 콘셉트가 '천 년의 지식을 재발견하다'였다. 그 문구를 보고는 잠시 황망했다. 내가 유라시아 견문에 나선 취지를 이미 쇼핑몰에서 구현하고 있던 것이다. 본디 무슬림들의 시공간 감각이 그토록 장쾌했다고 하겠다. 알라 아래 민족, 국가, 언어에 구애받지 않았다.

더 중요하게는 그 폭넓은 이슬람 연결망이 이슬람권만으로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라시아의 동쪽 끝 중화 세계와, 유라시아의 서쪽 끝 유럽 세계를 이슬람 연결망이 이어주었다. 원격지간, 이문화 세계 간 커뮤니케이션의 허브로서 독특한 시스템과 네트워크를 발달시켜온 것이다.

이슬람 네트워크를 통하여 비로소 유라시아는 동서남북으로 환류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유럽의 남부가, 아프리카의 북부가, 중국의 서쪽이, 인도의 북쪽이, 러시아의 남쪽이 이슬람으로 연결되었다. 유라시아와 인도양을 하나로 아우르는 개방적 세계 질서의 대동맥 역할을 한 것이다.

카이로에서 유학생 비자로 하늘길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는 그 친구야말로 아프리카의 무슬림 이븐 바투타와 아시아의 무슬림 정화의 후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택시에서 내린 곳은 600여 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이 모여 산다는 '리틀 자카르타'였다.

▲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이븐 바투타 몰. ⓒ이병한

'이슬람의 집'

오늘날 자카르타와 카이로는 국가로 나뉜다. 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의 수도이고, 카이로는 이집트의 수도이다. 인도네시아도 이집트도 20세기의 산물이다. 서남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을 하나로 묶어서 인도네시아를 창출했고, 오스만제국을 조각조각 나누어서 이집트가 생겨났다. 국적을 표시하는 여권이 없으면 두 도시를 왕래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슬람학을 전공하는 유학생에게는 비용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슬람 공동체, 움마(أمة)의 흔적은 남아있다. '이슬람의 집'이라는 관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것이다.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지붕 아래 국가도 민족도 인종도 언어도 부차적이었던 시절이 오래 있었다. 무슬림으로서 하나의 가족을 이루었던 시간이 천 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슬람판 '天下一家(천하일가)'였다.

그 이슬람 세계 질서가 체계화된 것이 9세기 초반이다. 아라비아반도의 대정복을 통하여 통일 제국이 등장한다. 동유라시아에서 대당제국이 군림하고 있을 때, 서유라시아에는 아바스제국이 들어섰다. 기왕의 부족 의식을 지양하고 보편적 대일통을 이루었다. 그 아바스제국을 달성할 수 있었던 소프트웨어가 바로 이슬람이었다.

이슬람의 본디 뜻은 '귀의하다'이다. 예언자 무함마드(마호메트)를 따라서 알라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것이다. 대당제국이 위-촉-오가 다투고 한족과 비한족이 남북으로 갈렸던 시기를 지나서 '唐人(당인)'으로 호/한(胡漢) 융합을 이루었던 것처럼, 아바스제국은 무슬림으로서 대융합을 달성하여 '아랍인'을 창출해낸 것이다.

'이슬람의 집(다르 알 이슬람)'이란 만인이 이슬람법에 귀의하는 평천하의 공간이었다. 그 밖으로는 민족과 국가와 언어로 나뉘어 분란을 지속하는 이교도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른바 '전쟁의 집(다르 알 하르브)'이다. 무슬림이라면 그 '전쟁의 집'을 '이슬람의 집'으로 변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이 소위 '지하드'이다. 흔히 성전(聖戰)이라고 번역한다. 꼭 들어맞는 역어는 아니다. 무력에 의한 변화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핵심은 진리의 보급에 있다. 다툼(武)을 그치고 조화(文)에 이르는 것, 부족의 전사들을 이슬람 율법으로 귀의시키는 것, 동사로서의 '文化(문화)'가 곧 지하드였다. 그 지하드를 통하여 '전쟁의 집'이 사라진 이슬람 천하무외(天下無外)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최고 지도자 칼리프의 천명이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슬람 세계의 '국제 관계' 또한 이슬람의 집과 전쟁의 집 사이에서 생겨난다. 이슬람의 집이 보편 제국의 실현이라면, 전쟁의 집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난립한다. 하나의 제국과 여러 국가 간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정치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민족이나 인종이 아니라 종교였다. 종교 공동체와 종교 공동체 사이의 관계가 기본축이다. 즉 자국민과 외국인 사이가 아닌 것이다. 어디까지나 무슬림과 이교도의 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도리어 탄력적이고 포용적일 수 있었다. 코란이냐, 칼이냐는 유라시아 극서 지방에서 살고 있던 주변인(유럽인)들의 왜곡된 이미지일 뿐이다. 이슬람의 국제법으로 '시야르'가 있다. 지하드의 중단을 인정하는 '현실주의 이론'이다. 그 중지 상태를 '수르프'라고 한다. 한문으로 옮기면 '화평'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무슬림 공동체(이슬람의 집)와 이교도 공동체(전쟁의 집) 사이에 계약으로 성사되는 것이 수르프이다. 평천하에 이르는 중간 단계쯤 되겠다.

이 '이슬람 조공 체제'가 작동하면 이슬람의 집과 전쟁의 집 사이에도 왕래가 가능해진다. 화/이 간의 교류를 허가하는 것이다. 이슬람의 집 안에서 사는 이교도에게도 안전을 보장해준다. 그래서 유대교 신자도, 기독교도도 큰 제약 없이 '이슬람의 집'에서 함께 살 수 있었다. 아니 종교적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기독교 세계에서 박해받는 이들이 '이슬람의 집'으로 망명해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대인이 대표적이다. 평화와 번영의 공공재를 제공해주는 '이슬람의 집'에 의탁하는 삶이 훨씬 더 윤택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지나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이들도 점차 많아졌다. 이슬람이 가장 늦게 등장한 유일신 계시 종교였음에도, 가장 넓은 영역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린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유교가 한족만의 사상이 아니라 몽골족과 만주족, 조선인과 월남인을 막론하고 중화 문명의 보편 이론으로 기능했던 것처럼, 이슬람 또한 아랍인의 민족 종교로 그치지 않았다. '이슬람의 집'에 귀의하는 만인만족에게 열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다대한 역할을 한 족군이 바로 투르크(돌궐)이다.

중앙유라시아를 동서로 왕래하던 유목민들이 이슬람에 귀의함으로써 '이슬람의 집'은 비약적인 도약을 이루게 된다. 중국의 서쪽이 '이슬람 중국'이 된 것도, 인도의 북쪽이 '이슬람 인도'가 된 것도 투르크의 공헌이었다. 투르크와 접속함으로써 이슬람은 세계 종교가 된 것이다. 그들이 일군 600년 최장수 제국이 바로 오스만제국이다.

오스만제국 : 지고의 국가

'오스만 투르크'라는 말이 있다. 적절한 표현이 아니지 싶다. 오스만제국을 투르크족의 나라로 둔갑시키는 명명이다. 기원은 유럽의 '터키학'에 있다. 오스만제국의 비투르크계 민족들을 갈라 치는 수법이었다. 역설적인 것은 터키공화국 또한 '오스만 투르크'라는 말을 받아썼다는 점이다. 제국사를 민족사로 미화함으로써 터키공화국의 자부심을 고취시켰다. 도착된 민족주의의 발로였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은 전연 일개 민족의 나라가 아니었다. 지배 계급조차 투르크족이라는 의식이 극히 희박했다.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이 훨씬 더 강했다. 그래서 '다민족 국가'라는 수사도 적당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이슬람 세계 제국'이었다. 스스로 자신들의 나라를 '지고(至高)의 국가'라고 칭송했다.

허언만도 아니었다. '지고의 국가'는 이슬람 세계만 통합했던 것이 아니다. 이스탄불은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었다. 비잔틴은 기독교 제국이었다. 스스로를 '로마인'이라고 간주했다. 비잔틴제국의 문명어는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였다. 키릴 문자권이었다. 오스만제국은 그 키릴 문자권과 아랍어 문자권을 통합시킨 것이다. 동로마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대일통을 달성했다. 그래서 로마제국의 후계자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내부적으로 그리스 정교, 아르메니아 교회, 유대교와 기독교 등이 공존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양대 세계를 통합한 '지고의 국가'에서 민족이란 정체성은 촌스러운 것이었다. 으뜸이 종교요, 다음이 직업이었다. 종교망과 직업망이 남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를 겹겹으로 촘촘하게 망라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상업에서 발군이었다. 동쪽으로는 아나톨리아와 이란에 이르는 육지 교역로에 두루 분포했다. 서쪽으로는 유럽의 여러 도시에 집거촌를 꾸렸다. 이 동서 아르메니아인 연결망이 합류하는 곳이 바로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었다. 서유라시아 물산의 집결지였던 것이다. 이스탄불부터 마드리드까지 이어졌던 지중해 연결망에서는 유태인이 활발했다. 지중해와 인도양을 잇는 해운 연결망에는 그리스 정교도가 발군이었다.

그런데도 역시나 최대 광역대의 연결망은 무슬림 네트워크였다. 북아프리카의 최서단부터 동유라시아의 서남중국까지 이어졌다. 육로로는 이란 고원을 지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중국으로, 해로로는 페르시아 만과 홍해, 아라비아 해와 벵골 만을 지나 남중국과 접속했다. 상인과 물자만이 오고갔던 것이 아니다. 서남중국과 동남아에서도 메카와 메디나로 향하는 순례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말라카와 메카가 접속된 것이다. 학자들과 문인, 관료들을 통한 지식과 문화의 범유라시아적 교류 또한 활발해졌다. 서유라시아 최고의 지식인들이 이스탄불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오스만제국에는 '국어'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행정어로는 투르크어가 기능했고, 학문과 종교의 언어로는 아랍어가 존경받았으며, 문학과 예술의 언어로는 페르시아어가 꽃을 피웠다. 이란의 사파비아 제국과 인도의 무굴제국, 중앙아시아 소국과는 페르시아어로 소통하고, 아라비아반도와 북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국가와는 아랍어로 교류했다. 유럽과의 의사소통은 주로 그리스어를 활용했다.

그리스 정교회의 총주교가 이스탄불에서 살았다. 그래서 오스만제국과 유럽의 의사소통을 담당하는 역관직도 그리스 정교회가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다언어 연결망을 통하여 유럽부터 중국에 이르는 범유라시아의 지식과 정보가 이스탄불에 집약되었던 것이다. 가히 창조 경제, 문화 융성의 본거지였다.

그만큼이나 제국의 상층부터 풀뿌리 생활 현장까지 다민족, 다종교, 다언어 상황이 항상적이었다. 혼재와 혼성과 혼종이 일상적이었다. 공존공생의 지혜를 반천 년이 넘도록 축적해온 것이다. 그러했기에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발칸반도가 노정하는 그 다양한 종교와 종파의 박물관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풍요로운 다문명, 다민족이 비극의 씨앗으로 전화한 것이 바로 20세기이다. '지고의 국가'가 사라지고 '중동(Middle East)'으로 재편되면서 지상 최대의 화약고가 되고 말았다.

바벨탑 : 서구의 충격

유럽과 이웃했던 오스만제국에서는 '서구의 충격'이 청천벽력은 아니었다. 마치 암세포의 전이처럼 점진적으로 잠식되었다. 한때는 유럽의 계몽주의와 세속화를 '오스만화'라고 이해한 시절도 있었다. 더 이상 종교에 연연하지 않는 유럽의 근대화야말로 '오스만화'로 여긴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 고전부터 과학과 수학까지 이스탄불과 바그다드, 카이로에 있던 도서관들에서 유럽으로 전수해준 것이다. 르네상스의 배후가 오스만이었다. 이탈리아의 소도시에 살던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쓸 수 있었던 것 또한 지척의 보편 제국 오스만의 술탄을 참고했음에 분명하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가장 번다하게 방문했던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었다.

다만 30년 종교 전쟁 이후에도 '유럽 내전 체제'는 지속되었다. 1945년까지 장장 300년을 '전쟁의 집'에서 살았다. 말미암아 군사적으로는 비약적으로 성장해갔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유럽과 오스만의 군사력이 역전된다. 싸움박질 만큼은 오스만을 능가한 것이다. 그래서 유럽에 파견된 오스만 관료들을 통하여 유럽의 군사 기술을 수용하는 개혁 정책을 단행한다. 오스만판 '양무(洋務) 운동'이었다.

1856년 크림 전쟁 종결 이후에 열린 파리 회의에는 오스만제국의 대표 또한 참석했으니, '서구 열강'의 일원으로 대접받은 것이다. 동시대 세포이의 항쟁으로 붕괴된 무굴 제국이나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원명원이 불탔던 대청제국에 견주어, '서구의 충격'이 한층 덜했던 것이다. 그래서 1924년까지 가장 오래 버텨낼 수 있었다.

오스만을 붕괴시킨 충격은 군사적인 측면이 아니라 사상적인 면에서 왔다.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 같은 신사조의 문헌이야말로 오스만제국을 침식시키고 내파시켰다. 유럽과의 의사 소통을 담당하던 그리스 정교도들부터 분화가 일어났다. 그들이 가장 먼저 서구에서 유행하는 민족주의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사상에 젖어 들었다. 그리스의 독립을 요구했다. 그 다음은 발칸 반도였다. 구교도 신교도 오스만제국을 이교도의 나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종교가 같은 아랍에서도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분열되어갔다. 이슬람은 본디 아랍인의 종교이거늘, 오스만제국은 투르크족이 지배하는 이민족 왕조라는 '민족적 각성'이 일어난 것이다. 저마다 평등과 주권과 독립을, '민족자결'을 요구했다.

'이슬람의 집'의 관점에서 보자면 19세기 중반 이후 민족주의의 침투는 '재부족화'에 다름 아니었다. 탈부족화를 선구적으로 선취했던 보편 문명을 거두고 종교와 민족이라는 특수주의로 퇴행하는 꼴이었다. 오스만제국은 '오스만주의'로 대처했다. 오스만제국 내부의 모든 이들을 '오스만인'으로 '평등'하게 대접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슬람 제국에서 다민족 국가로 이행하는 근대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패착이었다. '오스만주의'의 출현으로 제국의 해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슬람의 집'에서 구가했던 다양성을 지우는 '국민 만들기'로 접수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측면이 있었다. 곳곳에 근대식 학교를 세워 '오스만어'라는 신종 표준어를 강제해 갔다. 도처에서 오스만제국에 맞선 독립전쟁과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가장 큰 역설은 투르크족 역시도 투르크 민족주의에 감화되어갔다는 점이다. 이른바 '청년 투르크'의 등장이다. 터키판 신청년들이었다. 투르크어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등을 고루 대접하던 오스만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오로지 투르크어만을 전용으로 삼는 출판과 언론 활동에 매진했다. '국어 순화 운동'에 나선 것이다.

국사 또한 새로이 쓰였다. 나와 남의 투쟁으로 접근했다. 심지어 이슬람을 탄생시킨 아랍족도 적대했다. 졸지에 오스만제국은 '동양적 전제 국가'로 전락했으며, 민족 의식을 결여한 칼리프 또한 '전제 군주'라고 성토했다. 술탄의 '독재'에 맞서 청년 투르크가 표방한 것이 공화정이다. 세속적인 근대국가, 터키 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신청년의 기수 케말 파샤였다. 터키의 국부가 된다.

터키의 등장을 동시대 중국에 빗대자면 대청제국을 붕괴시키고 '한족 공화국'을 세운 것이 된다. 오스만 지배자들이 최후까지 고수하고자 했던 '오스만인'이란 쑨원의 '중화민족'에 근접하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동유라시아에서 대청제국이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진화해갔던 바로 그 시점에, 오스만제국은 끝내 '오스만 민족'을 창출하지 못함으로써 30여 개 국가로 분열되어간 것이다. 주권과 평등, 독립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항상적인 전시 체제, 서아시아 대분열 체제로 진입한 것이다.

1000년 이슬람의 집을 100년 화약고로 전락시킨 '바벨탑의 저주'였다. 어느새 무슬림들이야말로 '전쟁의 집'에 살게 된 것이다.

▲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버즈 칼리파. ⓒ이병한

움마 : 글로벌 디아스포라

반둥 회의 60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고 모스크에서 열린 별도의 회합을 구경한 적이 있다. 이슬람 국가들만 따로 모여 가진 행사이다. 주역 또한 국가 수반들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 즉 이슬람학자들인 울라마였다. 당시만 해도 인도네시아어는 물론이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도 까막눈에 귀머거리였다. 간간이 들려오던 '팔레스타인'만 또렷이 기억한다. 그때는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차원에서 발현된 '국제주의'로만 이해했다. 제3세계 신생 국가 간의 연대 의식의 표출이라고 접수했던 것이다.

이슬람 문명사 공부를 계속하노라니 이제는 조금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게 된다. 팔레스타인은 일종의 은유이고 상징이다. 구미적 근대 세계로 말미암아 '이슬람의 집'을 상실한 움마의 실향민 정서를 대변하는 기호이다. 그래서 파키스탄에서도, 이란에서도, 터키에서도, 이집트에서도 거듭 '팔레스타인'이 환기되는 것이다.

즉, 20세기 이래 움마는 글로벌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그들이 살아가던 집이 무너졌다. 고향을 상실했다. 뿌리가 뽑혔다. 안락감과 편안함을 잃어버렸다. 그들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대의하고 대변할 수 있는 정치 또한 사라졌다. 그들을 무슬림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으로 규정짓고 국민으로 동원하는 세속 국가가 들어섰다.

대통령과 총리에게 권력이 주어졌을지언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권위는 주지 못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지배자였지 지도자는 아니었다. 권위가 없는 권력이었기에 물리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동의 숱한 신생 국가에서 정국 혼란과 억압적인 통치가 지속되고 있는 근본적인 까닭이라고 하겠다. 기층과 상층 간에, 토착 민중과 외래화된 엘리트 간에 거대한 균열과 단절이 자리한다. 이슬람권에서도 역력한 고/금 간의 분단 체제이다.

하기에 '아랍의 봄'의 귀결로 칼리프의 재림을 선언하는 정치체(IS)가 들어섰음을 도무지 가벼이 여길 수가 없는 것이다. '지고의 국가'가 사라진지 100여 년 만에 재차 칼리프가 아랍어 공론장에서 회자되고 있다. 동시대의 움마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어지럽고 정의롭지 못한 세계에 다시 착근하기 위한 몸부림과 용틀임이 시작된 것이다. 무슬림이 무슬림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정치 구조와 세계 질서를 (재)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미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또한 두바이의 '버즈 칼리파', '칼리프의 탑'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투쟁 또한 민족 해방 운동에 그치지 않는다고 하겠다. 외부 세력이 이식한 외삽 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도전만이 아니다. 근본적 차원에서, 근원적 지평에서, '이슬람의 집'의 재건해 가는 운동이다. 실향 이후의 귀향 운동이며, '전쟁의 집'에서 탈출하는 문명 해방 운동이다. 제2의 히즈라, 성천(聖遷)을 단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의 집'이 해체되어가며 빚어진 가장 큰 역설로 투르크 민족주의의 등장을 꼽았다. 앙카라를 근거지로 삼은 터키공화국이 이스탄불에 맞서 '독립 전쟁'을 펼침으로써 저물어가는 제국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바로 그 터키에서도 새천년의 개막과 함께 등장한 정치 사조가 '신오스만주의'임이 예사롭지 않다. '이슬람의 집'을 부수고 박차고 나갔던 탕자가 집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출가 이후, 혹은 가출 이후의 귀로에 접어든 것이다.

그 상징적 인물이 바로 현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다. 집권 이래 재이슬람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벌써 10년 넘게 권좌를 지키고 있을 만큼 기층의 지지 또한 탄탄하다. 때문에 올여름 이스탄불에서 목도했던 한편의 정치 활극 또한 '민주 대 독재'라는 얕은 도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슬람 문명사 1400년, 투르크의 이슬람 수용사 1000년, 오스만 제국사 600년, 터키공화국 100년이라는 겹겹의 시간대에서 중층적으로 조망해야 한다. 다음 주에는 탈이슬람화와 재이슬람화의 길항으로 터키의 20세기를 회고해본다. 새삼 이슬람의 뜻이 '귀의하다'임을 곱씹으며 음미하고 있는 '1437년'의 10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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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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