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2월 24일 22시 00분
홈
오피니언
정치
경제
사회
세계
문화
Books
전국
스페셜
협동조합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8>
임금의 측근된 정도전
정도전은 개국 1등공신이기는 하지만 개국 거사 자체보다는 개국 이후의 활약이 더 두드러지는 인물입니다. 그는 무인인 태조의 브레인으로, 새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에 깊숙이 참여합니다. 강씨 소생인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데 그의 역할이 정말로 결정적이었는
이재황 실록연구가
2002.01.24 10:14:00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7>
왜구 소탕에 정승까지 ‘총동원’
왜적은 1393년 9월과 10월 사이에 서북면에 나타나고는 조금 뜸하다가 이듬해인 1394년 2월에 경상도 지방에 쳐들어왔습니다.왜적이 끊이지 않자 3월에는 좌시중 조준을 교주․강릉․서해․경기좌․경기우도의 5도 도총제사, 삼사 판사 정도전을 경상
2002.01.23 10:12:00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6>
이방원의 중국 行
1394년 6월, 태조가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靖安君) 이방원에게 일렀습니다.“명나라 황제가 묻는 일이 있을 때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정안군이 대답했습니다.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인데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그러자 태조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했습
2002.01.22 10:39:00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5>
마침내 한양 시대 열리다
<이야기 35>임금이 무악 땅을 보고 도읍을 정하려 했습니다. 문하부 낭사는 덥고 장마철이어서 움직이기 불편하고 또 농민들도 여가가 없으니, 8월 보름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청했습니다.8월 8일, 임금이 직접 무악의 도읍 옮길 땅을 보려고 도평의사사와 대간․
2002.01.21 10:21:00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4>
계룡산 천도 “없던 일로”
계룡산 도읍 건설은 경기 좌ㆍ우도 도관찰사(都觀察使) 하윤의 문제 제기로 중단됐습니다. 도읍은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땅이 남쪽에 치우쳐 동․서북면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자신이 아버지를 장사지내면서 풍수 책들을 좀 보았는
2002.01.18 10:26:00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3>
공양왕 3부자 목졸라 죽이다
그러나 사건이 이것으로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4월로 접어들자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글을 올려 왕씨를 제거하도록 청했습니다. 임금은 왕씨들을 모두 한 곳에 모이게 해서 튼튼히 지키도록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다만 귀의군 왕우는 마전군에서 조상 제사를 받들고
2002.01.17 10:13:00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2>
밝혀지는 사건 전말
<이야기 32>이거이 등이 다시 이흥무․왕화․김가행․석능 등을 국문했습니다. 판수인 이흥무와 남평군 왕화, 그의 삼촌인 중 석능의 진술은 대체로 동일했습니다.즉 1392년 9월에 왕화와 석능이 의창(義昌) 귀양지에서 거제로 들어가려 할 때 이흥무를 만
2002.01.16 10:07:00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1>
왕씨의 신수를 점친 사람들
<이야기 31>1394년 1월, 문하부 참찬 박위가 순군부 옥에 갇혔습니다. 앞서 동래현(東萊縣) 영(令)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 등이 밀성(密城, 밀양)의 맹인 이흥무(李興茂)에게 나라의 안위와 왕씨의 신수를 점치게 했는데, 일이 발각되자 이흥무를
2002.01.15 10:18:00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0>
말많았던 花園-都城 공사
태조 2년(1393) 여름 ․ <이야기 30> 1393년 5월, 임금은 도성 안 화원(花園)을 수리하게 했습니다.임금은 화원에 거둥해 시찰하고 내시 김사행에게 팔각정(八角亭)을 수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안경검 등이 화원 공사를 그만두기를 청하니,
2002.01.14 10:00:00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9>
다시 날뛰는 왜구들
<이야기 29>고려 말에 큰 골칫거리였던 왜구 문제는, 그 왜구를 물리쳐 ‘스타’로 떠오른 덕분에 새 왕조까지 창업한 태조가 즉위한 뒤에도 여전했습니다.조선 건국 후 처음 왜구 기사가 등장하는 것은 건국 이듬해인 1393년 3월입니다. 고만량(高灣梁) 만호(지방의 군 관
2002.01.11 10:1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