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4년 6월, 태조가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靖安君) 이방원에게 일렀습니다.
“명나라 황제가 묻는 일이 있을 때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
정안군이 대답했습니다.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인데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그러자 태조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했습니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 올 수가 있겠느냐?”
이때 조선은 중국과 약간의 마찰이 있어 황제가 조선에 왕자를 보내라고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바닷가에서 도적질하다 잡힌 해적들이 문초를 받다가 우리 임금의 지시로 정탐을 했다고 자백했다는 것이 분쟁의 원인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조선에서 보내는 사신들도 요동에서 막아 들여보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방원의 중국행에 대해 조정 신하들이 모두 위험하다고 하니, 문하부 참찬 남재(南在)가 말했습니다.
“정안군이 만리의 길을 떠나는데 우리들이 어찌 베개를 베고 여기에서 죽겠습니까?”
그러고는 스스로 따라가기를 청했습니다.
이에 따라 태조는 이방원과 중추원 지사 조반(趙胖)에게 표문을 올리게 하고, 남재로 하여금 전문(箋文)을 올리게 했습니다.
이방원이 떠날 때 찬성사 성석린(成石璘)이 시를 지어 전송했습니다.
자식을 알고 신하를 아니 임금이 현명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며 정성 다하는 것은 나라를 구함이라.
모두 말하기를 만세 조선의 경사는
무더위 장마에 산 넘고 물 건너는 이 행보에 있다 하네.
이방원 일행은 임무를 마치고 11월에 돌아왔습니다.
이방원이 중국에 가자 황제가 두세 번 불러 보았는데, 이방원이 현안들에 대해 소상하게 보고하니 황제가 잘 대접해 돌려보냈습니다.
중국 선비들은 이방원을 보고 모두 조선 세자라면서 대단히 존경했다고 합니다. 이방원이 세자가 된 것은 그로부터 5 년 반이나 지난 뒤의 일인데 말입니다.
이방원이 나중에 황제가 되는 연(燕)왕의 관청을 지날 때 그를 직접 만났는데, 곁에 호위하는 군사가 없고 한 사람만이 모시고 서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했으며,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게 했습니다. 음식이 매우 풍성하고 깨끗했다고 합니다.
이방원이 그곳을 떠나 돌아오는 도중에 급히 도성으로 말을 몰아 가는 연왕을 만났습니다. 이방원이 말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수레의 휘장을 연 뒤 한참을 부드러운 말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습니다.
뒤에 이방원이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온 내시 황엄(黃儼)을 만나 연왕 시절의 황제를 그 관청에서 만날 때에 모시고 섰던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황엄이 대답했습니다.
“경(慶) 대인(大人)입니다. 온순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황제가 제일 신임했지만, 지금은 죽고 없습니다.”
이때의 연왕은 명나라의 세 번째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입니다. 이방원이 나중에 어린 이복동생을 세자 자리에서 몰아내고 결국 임금 자리에 올랐던 것처럼, 영락제는 정식으로 황제 자리에까지 오른 조카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비슷한 과정을 거쳐 등극한 ‘동질감’이 있었던 걸까요? 어쨌든 이방원은 무리한 즉위 과정을 거치고도 명나라로부터 별다른 꼬투리를 잡히지 않은 채 넘어갑니다. 위험을 감수했던 이때의 중국행이 그에게는 큰 자산이 된 셈이지요.
여기서 잠깐. 이런 ‘자산’도 물거품이 될 뻔한 위기일발의 순간이 이방원에게 있었습니다.
1395년 10월에 그는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를 따라 서쪽 교외에 나가서 사냥을 했는데, 성난 표범과 맞닥뜨려 거의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낭장 송거신(宋居信)이 말을 달려 따라가니, 표범이 이방원은 놓아두고 송거신을 따라갔습니다.
표범이 송거신의 앞으로 달려들어 말 위에 올라 안장을 깨물자 송거신은 말 위에 누워 이를 피했고, 표범이 겨우 말과 떨어졌습니다. 낭장 김덕생(金德生)이 뒤를 달려가서 활을 쏘아 한 발에 표범을 죽였습니다.
이방원은 두 사람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주었고, 태조도 송거신에게 말 한 필을 내려주었습니다. 사냥의 초청자인 이화와 이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도 각각 말 한 필씩을 내놓았습니다. 송거신은 이때의 인연으로 나중에 공신에 끼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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