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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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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8>

임금의 측근된 정도전

정도전은 개국 1등공신이기는 하지만 개국 거사 자체보다는 개국 이후의 활약이 더 두드러지는 인물입니다. 그는 무인인 태조의 브레인으로, 새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에 깊숙이 참여합니다.

강씨 소생인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데 그의 역할이 정말로 결정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정국의 주도자였던 흔적은 실록 곳곳에 나오고 있습니다.

정도전은 개국 당초 조각(組閣) 인사에서 문하부 시랑찬성사에 임명됐습니다. 신하들 가운데 좌 우 정승의 다음쯤 되는 위치였습니다. 태조는 그를 옆에서 떼어놓기 어려워서인지 1393년 7월 그를 동북면 도안무사로 임명했다가 바로 취소하고 이지란을 대신 보내기도 했습니다.

정도전은 이때 조선의 창업을 칭송하는 악장을 지어 바쳤습니다. 태조가 꿈에 신인(神人)으로부터 금자를 받은 일을 그린 ‘몽금척(夢金尺)’, 지리산 석벽(石壁)에서 책을 얻은 일을 다룬 ‘수보록(受寶록)’, 임금이 된 뒤의 업적을 칭송한 ‘문덕곡(文德曲)’, 태조의 화려한 무공을 그린 ‘무공곡(武功曲)’ 등이었습니다.

태조는 무공방(武工房)을 설치해 무악(武樂)을 익히게 했으며, 관습도감(慣習都監) 판사 정도전, 왕강 등은 전악서(典樂署) 무공방을 거느리고 새 음악을 올렸습니다.

정도전은 또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도 만들어 바쳤습니다.

삼사 판사로 옮긴 정도전은 임금에게 청해 절제사들이 거느린 군사 중에서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뽑아 진도(陣圖)를 가르치게 했습니다. 정도전은 군사를 격구장에 모아 진도를 연습하고 북, 뿔피리와 깃발에 따라 부대를 정돈하고 움직이는 것을 익히게 했습니다.

1394년 3월, 임금이 임진(臨津) 수미포(壽美浦)에 거둥해 정도전에게 5군진도(五軍陣圖)를 연습하도록 지시하고 말했습니다.
“내일 내가 직접 보겠다.”

첨절제사 진충귀와 대장군 이귀령(李貴齡)을 중군사마(中軍司馬)로 삼고, 여러 절제사를 불러 지시했습니다.

“지난번에 이미 각기 진도(陣圖)를 연습하도록 지시했는데, 내일 만약 익히지 않고 영을 어긴 사람이 있으면 내가 벌을 주리라.”

정도전은 태조에게 중요한 조언자였습니다. 1394년 4월, 삼사 판사 정도전은 이렇게 건의했습니다.

“옛날 주나라 때는 인심이 충후(忠厚)했지만, 무왕이 병이 나자 주공(周公)이 ‘점을 일절 치지 말라’고 하며 자신이 무왕을 대신해 죽고자 했습니다. 새로 건국된 나라에 인심이 요동할까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나와 정사(政事)를 듣지 않으시니, 신민들은 병환이 오래 가 위중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른 아침에 반드시 정전(正殿)에 앉아 장수 재상들을 불러 군국(軍國)의 일을 함께 의논하소서.”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습니다.

정도전의 종횡무진한 활약은 역풍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해 11월, 임금은 전중시 경(卿) 변중량을 순군부 옥에 가두고, 대사헌 박경(朴經)과 순군부 만호 이직 등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했습니다.

앞서 변중량이 병조 정랑 이회(李회)에게 말했습니다.

“예로부터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을 한 사람이 함께 맡아서는 안 된다. 병권은 종친에게 있어야 하고 정권은 재상에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이 병권을 장악하고 또 정권을 장악하니, 참으로 옳지 못하다.”

변중량이 다시 이 말을 의안백 이화에게 했고 이화가 임금에게 고하니, 임금이 변중량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변중량은 사실대로 대답하고 덧붙였습니다.

“박포도 전하께서 국정을 잘못해 별의 이상 운행이 자주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임금이 화가 나 말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의 팔다리와 같은 신하들로, 끝까지 한마음을 가질 사람들이다. 이들을 의심한다면 누굴 믿을 것이냐?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틀림없이 까닭이 있을 것이다.”

즉시 변중량, 박포, 이회를 국문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박포, 이회와 변중량은 서로를 비난하면서 자신만 빠져나가려 했습니다. 변중량을 영해(寧海)에, 이회를 순천(順天)에 귀양보내고 모두 삭직했으며, 박포는 죽주(竹州)에 안치했습니다.

1395년 10월 어느 날 밤에 임금이 삼사 판사 정도전 등 여러 훈신(勳臣)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풍악을 베풀었습니다.

술이 거나해지자 임금이 정도전에게 말했습니다.
“과인이 여기에 이른 것은 경들의 힘이오. 서로 공경하고 삼가서 자손 만대에까지 이르기를 기약합시다.”

정도전이 대답했습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포숙(鮑叔)에게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하오?’ 하고 묻자 포숙은 ‘원컨대 공께서는 거(莒) 땅에 계셨을 때를 잊지 마시고, 원컨대 중부(仲父)께서는 함거(檻車)에 있을 때를 잊지 마소서’ 하고 말했습니다. 신이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말에서 떨어지셨을 때를 잊지 마시고 신도 역시 목에 칼을 찼을 때를 잊지 않으면 자손 만대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옳다고 말하며 사람을 시켜 ‘문덕곡’을 노래하게 하고는 정도전에게 눈짓하며 말했습니다.

“이 곡은 경이 지어 바친 것이니 경이 일어나서 춤을 추시오.”

정도전이 즉시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임금은 웃옷을 벗고 춤을 추라고 하고는 갖옷을 내려주었습니다. 밤새도록 한껏 즐기고 끝냈습니다.

12월에 임금이 한산백 이색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삼사 판사 정도전도 참석했습니다. 임금이 ‘문덕곡’‘무공곡’의 두 곡을 듣고서 말했습니다.

“노래로 공덕을 칭송한 것이 참으로 사실보다 지나치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내가 매우 부끄럽다.”

그러자 정도전이 대답했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생각이시니 노래를 지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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