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이 등이 다시 이흥무, 왕화, 김가행, 석능 등을 국문했습니다. 판수인 이흥무와 남평군 왕화, 그의 삼촌인 중 석능의 진술은 대체로 동일했습니다.
즉 1392년 9월에 왕화와 석능이 의창(義昌) 귀양지에서 거제로 들어가려 할 때 이흥무를 만나 점을 쳐달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왕화는 섬에 들어간 지 3 년이 지나면 틀림없이 나오게 되고, 마흔일고여덟 살에 이르러 운(運)이 틔고 쉰 살 이후에는 장수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며 임금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석능은 왕사(王師)가 된다고 했습니다.
김가행은 1392년 12월에 동래현에 있을 때 이흥무에게 점을 쳤는데, 이흥무는 “그대의 운명에 금 전각 옥 계단을 밟는다는 말이 있으니, 하례드려야겠습니다” 하고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1393년 봄에 박중질을 동래 객사(客舍)에서 만났는데, 박중질은 공양왕 맏아들의 신수가 좋다며 자기가 그 점괘를 적어 주머니 속에 감추어 두었다는 말을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임금은 이미 사건이 진행중이던 이때 왕씨들에 대한 모종의 조치를 고려한 듯합니다. 강화부에 있는 왕씨 노약자들을 점검해 보고하도록 사헌부에 지시한 것입니다.
대간과 형조에서는 문하부 참찬 박위가 사람을 보내 이흥무에게 점을 치게 했으니 대역(大逆)을 도모한 것이어서 용서할 수 없다고 글을 올렸습니다. 임금은 그 말이 그럴듯하지만 재주가 아까우니 믿기 어려운 말 때문에 불쑥 처벌할 수 없다고 미뤘습니다.
이거이 등이 다시 왕거, 박중질, 이흥무 등을 국문하니, 왕거, 박중질은 왕화, 김가행 등과 대체로 같은 진술을 했습니다.
이흥무는 덧붙여서 1393년 5월에 전 지신사 이첨이 자신의 신수를 점치게 한 뒤 공양왕을 다시 왕으로 세울 수 있는지 등 왕씨들에 대한 여러 가지를 점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공양왕은 운이 쇠진했고, 원자는 늦게 귀해질 운명이니 머리를 깎고 때를 기다리면 좋을 것이며, 남평군은 당장은 운이 쇠진했지만 장차는 크게 출세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대간과 형조에서는 다시 박위를 용서할 수 없다며 처벌을 청했습니다. 임금은 그 말이 옳다면서도 생각이 있다며 가둔 것을 속히 풀어주게 하고 박위를 불러 말했습니다.
“전처럼 업무를 보고 걱정하지 말라. 천만 사람이 말하더라도 나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거이, 박신, 전시 등이 다시 왕화, 김유의(金由義) 등을 국문했습니다. 왕화는 지난 1392년 11월에 정양군 왕우가 익천군 왕즙에게 사람을 보내 “섬에 들어가는 것을 걱정하지 말라. 내가 복위를 꾀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김유의는 지난 1392년 9월에 박위를 봉성(峰城, 파주) 시골 집에서 만났는데, 이흥무에게 점친 결과를 묻기에 박위는 액운(厄運)이며 공양왕 맏아들과 왕우도 모두 운이 쇠진했다는 내용을 전해주었다고 진술했습니다.
박위가 다시 점을 쳐오라고 해서 이해 11월에 밀성으로 돌아가 박위의 뜻을 박중질에게 알리고 다시 이흥무에게 점치게 했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전시가 수원에서 대궐로 와 김가행, 박중질 등의 반역을 모의한 지지 세력이 서울 안에 있어 염려스럽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했습니다.
“박위가 나에게 딴 마음을 품은 것이 오늘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지난 1390년에 공양군이 한양으로 옮겨갔을 때 어쩔 수 없이 정몽주의 말을 듣고는 내게 딴 마음을 품었다. 그렇다면 그가 불측한 마음을 품은 것이 하루아침의 일이 아닌데도 아직 드러낼 수 없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갑자기 어찌하겠는가? 또 적군과 진(陣)을 마주 벌여도 적이 와서 투항하면 받아들여 신하로 삼는데, 하물며 박위는 그 재주가 쓸모 있으니 가벼이 끊을 수가 없음에랴! 혹시 그 일이 사실이라면 은총과 잇속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후하게 대우한다면 어찌 딴 마음을 품겠는가? 알고 미리 대비한다면 박위가 나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은 김가행, 박중질이 박위를 빙자하면 되겠다고 생각해 복잡하게 만든 것뿐이다.”
고려 때 지신사 이첨은 이흥무의 진술에 관련돼 합포(合浦)로 귀양갔습니다. 중승 박신이 수원에서 각 사람들의 진술서를 가지고 와 보고하니, 두 시중(侍中)을 불러 의논하고 왕화, 왕거, 김가행, 박중질, 김유의, 이흥무 등을 목베었습니다. 왕우와 박위는 특별히 용서하고, 중 석능은 거제도에 안치했습니다. 공양왕 3 부자는 삼척으로 옮겨 안치했습니다.
임금이 박위를 용서하자 반발이 일었습니다. 사헌부 감찰 안이녕(安以寧) 등은 박위의 일가붙이인 잡단 박저생(朴抵生)이 사헌부에 출근하는데 마중하지 않았고, 이 문제로 사헌부에서는 안이녕을 탄핵했습니다.
이튿날 간관이 문하부 참찬 박위를 탄핵했습니다. 임금이 간사를 불러 꾸짖고, 박위에게 업무를 보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임금은 결국 박위를 파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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