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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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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5>

마침내 한양 시대 열리다

임금이 무악 땅을 보고 도읍을 정하려 했습니다. 문하부 낭사는 덥고 장마철이어서 움직이기 불편하고 또 농민들도 여가가 없으니, 8월 보름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청했습니다.

8월 8일, 임금이 직접 무악의 도읍 옮길 땅을 보려고 도평의사사와 대간, 형조의 관원 각각 한 사람씩과 친군위(親軍衛)를 데리고 갔습니다.

11일에 무악에 이르러 도읍 정할 땅을 살폈습니다. 서운관 판사 윤신달(尹莘達)과 서운관 부정(副正) 유한우 등이 나와, 지리의 법으로 보면 이 땅은 도읍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임금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함부로 이 땅에 대해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데, 좋지 못한 점이 있다면 문서에 근거해 말해보라.”

윤신달 등이 물러가 의논들을 했습니다. 임금이 유한우를 불러 물었습니다.

“이곳은 정말 안 되겠는가?”
“신이 보기로는 실로 좋지 못합니다.”
“여기가 좋지 않으면 어디가 좋은가?”
“신은 모르겠습니다.”

임금이 화가 나 말했습니다.

“네가 서운관에 있으면서 모른다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이냐? 개성의 지기(地氣)가 일어나고 쇠하는 얘기를 너는 듣지 못했느냐?”
“그것은 도참(圖讖)의 얘깁니다. 신은 지리만 배웠을 뿐, 도참은 모릅니다.”

“옛 사람의 도참 역시 지리를 따라 말한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이 근거 없는 말을 했겠느냐? 그러면 네 생각에 좋은 곳을 말해보아라.”
“전 왕조의 태조가 송산(松山) 명당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 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버리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 듯하니, 다시 궁궐을 지어 그대로 개성에 도읍하소서.”

“나는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가까운 곳에 또 좋은 땅이 없다면 3 국이 도읍했던 곳도 좋은 땅일 것이니 합의해서 보고하라.”

그러고는 좌시중 조준과 우시중 김사형에게 말했습니다.

“서운관이 전 왕조 말기에 개성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며 여러 번 글을 올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했었소. 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하다 해서 사람을 동원하고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고생시켰소.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하다 해서 와보니, 유한우 등이 좋지 않다고 말하며 도리어 개성 명당이 좋다 하오. 이렇게 서로 논쟁을 하며 나라를 속이는 것은 일찍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니, 경들이 서운관 관원으로 하여금 각기 도읍이 될 만한 곳을 말해 보고하게 하시오.”

겸(兼) 서운관 판사 최융(崔融)과 윤신달, 유한우 등이 글을 올려 온 나라 안에서 부소(扶蘇) 명당이 첫째요, 남경(南京, 한양)이 다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임금이 재상들에게 지시해 각기 글을 올려 도읍 옮길 만한 땅을 논의하게 했습니다.

재상들이 모두 각자의 생각을 말하니, 임금은 그 의견들이 대개 도읍을 옮기는 게 옳지 않다고 한 까닭에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도성으로 돌아가 소격전에서 의심을 해결하겠다.”

이튿날 임금이 옛 궁궐 터에서 집자리를 살폈습니다. 산세를 바라보다가 윤신달 등에게 물었습니다.

“여기가 어떠냐?”
“우리 나라 안에서는 개성이 으뜸이고 여기가 다음입니다. 서북쪽이 낮아 물과 샘물이 마른 것이 한입니다.”

임금이 기뻐 말했습니다.

“개성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느냐? 지금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하다. 더구나 조운이 통하고 거리도 고르니 사람에게도 편리한 점이 있겠다.”

임금이 왕사 자초에게 이 땅이 어떠냐고 묻자, 자초가 대답했습니다.
“이 땅은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읍(城邑)이 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정하십시오.”

임금이 재상들에게 의논케 하니, 모두 말했습니다.
“꼭 도읍을 옮긴다면 이곳이 좋습니다.”

하윤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세는 볼 만한 듯하나, 지리의 술법으로 말하면 좋지 않습니다.”

임금이 여러 사람의 말을 따라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습니다.

전 전서 양원식(楊元植)이 나아가 말했습니다.
“신이 가지고 있던 비결은 앞서 이미 명령에 따라 올렸는데, 적성(積城) 광실원(廣實院) 동쪽 계족산(雞足山)의 땅을 살펴보니 비결에 쓰여 있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조운이 통하지 않는데, 어찌 도읍 터가 되겠는가?”
“임진(臨津)에서 장단(長湍)까지는 물이 깊어서 배가 다닐 수 있습니다.”

임금이 돌아오다가 광실원 동쪽에 이르러 양원식이 말한 도읍할 만하다는 곳을 보았습니다. 모두 좋지 않다고 말해 그만두었습니다.

장단 나루에 이르러 다락배를 탔습니다. 재상들과 노인들이 모두 술을 올렸습니다. 술이 거나해지자 남은의 아버지인 검교 시중 남을번(南乙蕃)이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임금이 남은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경은 부모가 모두 계시고 자신은 재상이 되었구려. 내가 비록 오늘날 한 나라의 임금으로 귀하게 되었다 해도, 어찌 경에게 미치겠는가?”
그러고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튿날은 전 왕조의 신경(新京) 터를 보고, 또 그 다음날은 민중리(閔中理)의 말에 따라 도라산(都羅山)을 살펴보았습니다.

임금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더럽고 습한 곳이 어찌 도읍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는 개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왕세자가 도중에 나와서 배알하고 각 부서에서도 천수사(天水寺) 앞에 나와 맞이했습니다.

8월 24일, 도평의사사에서는 한양의 안팎 산수 형세가 훌륭하다고 옛날부터 이름이 났고 사방으로 통하는 길의 거리가 고르고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자고 보고했습니다. 임금이 올린 대로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9월 1일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했습니다. 청성백 심덕부, 좌복야 김주, 전 정당문학 이염, 중추원 학사 이직을 판사로 삼았습니다. 문하부 판사 권중화, 삼사 판사 정도전, 청성백 심덕부, 문하부 참찬 김주, 좌복야 남은, 중추원 학사 이직 등을 한양에 보내 종묘, 사직과 궁궐, 저자, 도로의 터를 정하도록 했습니다.

권중화 등은 전 왕조 숙종(肅宗) 때 지었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며 다시 그 남쪽에 서북쪽 산을 주맥으로 북에서 남으로 향한 평탄하고 넓으며 뭇 용들이 모여들어 절하는 형국의 땅을 살폈습니다.

또 그 동쪽 몇 리 되는 곳에 북쪽의 산을 주맥으로 북에서 남으로 향한 자리에 종묘 터를 잡았습니다. 모두 그림을 그려 바쳤습니다. 정도전 등은 돌아오고 청성백 심덕부와 문하부 참찬 김주는 남아서 건설 사업을 관리했습니다.

도평의사사에 지시해 각 부서 관원을 모아 도읍을 빨리 옮기느냐 늦추느냐를 의논토록 했습니다. 모두 해가 바뀌기 전에 옮기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10월 25일,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각 부서의 관원 2 명씩은 개성에 남게 하고, 문하부 시랑찬성사 최영지와 문하부 상의 우인열 등으로 개성 옛 도읍의 도평의사사 분사(分司)를 구성했습니다. 10월 28일 새 도읍에 이르러 옛 한양부 객사(客舍)를 이궁(離宮)으로 삼았습니다. 한양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일어났던 큰 변화들 가운데 몇손가락 안에 꼽히는 한양 천도. 5백년 개성 시대가 마감되고 다시 5백년, 아니 지금까지 이미 6백년이 됐고 얼마나 더 이어질지 모르는 한양 시대는 이렇게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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