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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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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7>

왜구 소탕에 정승까지 ‘총동원’

왜적은 1393년 9월과 10월 사이에 서북면에 나타나고는 조금 뜸하다가 이듬해인 1394년 2월에 경상도 지방에 쳐들어왔습니다.

왜적이 끊이지 않자 3월에는 좌시중 조준을 교주, 강릉, 서해, 경기좌, 경기우도의 5도 도총제사, 삼사 판사 정도전을 경상, 전라, 양광도의 3도 도총제사로 삼았습니다. 정승급에게 각기 중부와 남부 지방의 책임을 맡기는 ‘총동원령’을 내린 셈입니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왜적은 바로 그 다음날 연안부(延安府) 경내에 쳐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3~4월 사이에 전라, 경상도 곳곳에 출몰합니다.

4월 16일, 경기 수군 절제사 이희충(李希忠)을 좌도(左道)에 보내고, 최칠석을 우도(右道)에 보냈습니다. 최칠석은 군중에 나간 지 한 달여 만에 병으로 죽어 6월 1일 전 전서(典書) 김영렬(金英烈)을 경기우도 수군 첨절제사로 삼았습니다.

5월과 7월에는 왜구가 서해도 지역에 나타났고, 8월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나타났습니다.

이후 몇 달 동안은 왜구의 움직임이 뜸했습니다. 이듬해 정초에 왜인 표시라(表時羅) 등 4 명이 와서 항복하자 경상도 고을에 두라고 지시했다는 기사가 나올 뿐입니다.

나라에서는 1395년 연초부터 여러 도에 사람을 보내 군용(軍容)을 점검토록 했습니다. 상장군 신효창(申孝昌)과 대장군 김계수(金季壽), 구성량(具成亮), 노상의(盧尙義)를 각각 경상, 전라, 풍해, 강릉도에 보냈습니다.

김계수는 전라도에 도착해 관찰사 조박과 의논하다가 농사철에 까닭 없이 군사를 점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지시를 이행치 않았다가 순군부 옥에 갇혔습니다. 조박도 이 문제에다 변방 보고까지 늦어 공주(公州)에 안치됐습니다.

3월에도 사람을 각 도에 보내 군적(軍籍)을 점고하게 했는데, 간관이 농사철이라며 군사 점고를 늦추자고 글을 올리자 임금이 삼사 판사 정도전을 불러 말했습니다.

“지금 간관이 글을 올려 농사철이니 군사 점고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간관의 말은 귀에 거슬리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인데, 하물며 백성들에 관한 일이겠는가? 나도 자못 옳게 여기나, 지금 좌 우 정승이 모두 병으로 정사를 보지 못하니 경이 그 집에 가서 의논하고 보고하라.”

정도전이 뜻을 받들어 의논한 뒤, 이를 중지하고 고을 관리들로 하여금 군적을 점고해 확정하도록 하자고 보고했습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앞서 가두었던 조박을 풀어주고 사람을 보내 불러왔습니다.

교서관 소감(少監) 정혼(鄭渾)을 경기좌도와 충청도에 보내 병선의 허실(虛實)과 장수, 군사들의 능력을 점고하도록 했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왜구는 4월에 경상도를 노략질했습니다. 임금은 경상도 도관찰사 최유경이 1388년 회군 때 반대편에 섰으나 군사적인 재능이 있다며 우정승 김사형과 의논한 뒤 그를 중추원 지사 겸 중군 동지절제사에 임명하고 그대로 관찰사를 겸임시켜 왜구를 막게 했습니다.

왜구의 침입은 절부(節婦)를 잇달아 탄생시켰습니다. 완산에서는 최극부(崔克孚)라는 사람의 아내인 임(林)씨의 정문(旌門)을 세웠습니다. 임씨는 왜구가 붙잡아다 욕을 보이려 하자 듣지 않았으며, 한쪽 팔을 베어내고 또 한쪽 다리를 잘라내도 듣지 않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경기에서는 교동(喬桐) 사람인 전 별장(別將) 이제(李堤)의 아내 조백정(曹百丁)이 왜구에게 사로잡혀 절개를 지키고 죽었다고 우도 관찰사 김희선이 도평의사사를 통해 보고하자, 그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했습니다.

이에 앞서 전라도 도관찰사 조박이 관내 노인들의 얘기를 듣고 제안한 대로,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우고 죽은 개성부 판사 정지의 집에 정문을 세워주었습니다. 정지는 처음으로 전함(戰艦)을 만들어 왜구를 제압케 했으며, 장포(長浦)와 남원(南原)의 승첩에 그 공이 커서 지금 바닷가 백성들이 옛날과 같이 생업을 회복했다는 것이었습니다.

7월부터는 다시 여기저기서 왜구의 침략 소식이 들려옵니다. 경상도에 나타나는가 하면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잇달아 왜구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임금은 도평의사사에 지시해 수군 절제사 김영렬과 형조 전서 김승주를 불러 왜구를 공격할 계책을 논의하도록 했으나 별 뾰족한 대책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구 침입과 격퇴 일지>

<1394년>

<13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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