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건이 이것으로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4월로 접어들자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글을 올려 왕씨를 제거하도록 청했습니다.
임금은 왕씨들을 모두 한 곳에 모이게 해서 튼튼히 지키도록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다만 귀의군 왕우는 마전군에서 조상 제사를 받들고 있으니 함께 논하지 말도록 했습니다.
대간과 형조는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공양왕을 없애야 한다는 글을 올린 것입니다.
임금은 3성이 함께 글을 올리지 말라는 지시를 어겼다는 핑계로 이를 보류시켰습니다. 이튿날 대간과 형조에서 나와 전날 청한 일을 윤허하라고 청했고, 임금은 역시 3성에서 함께 글을 올린 것을 문제삼았습니다.
앞서 대간과 형조에서 여러 번 글을 올려 왕씨를 제거하도록 청했지만 임금이 차마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 청을 윤허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궐 문 앞에 엎드려 며칠 동안 힘써 청하니 임금이 도평의사사에 지시했습니다.
“왕씨를 제거하는 일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니, 각급 부서와 한량, 원로를 모아서 각기 가부를 진술하고 봉해 바치게 하라.”
도평의사사에서 모든 부서와 원로들을 수창궁에 모아 놓고 알렸습니다.
“전 왕조의 왕씨는 천명이 가버리고 인심이 떠나버려 스스로 하늘의 주벌(誅伐)을 재촉했는데, 전하께서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으로써 생명을 보전해 주었으니 은덕이 매우 무겁습니다. 그러나 왕씨들은 오히려 의심을 품고 몰래 반역을 꾀했으니 법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왕씨의 처리 문제를 봉서로 보고하시오.”
그러자 문하부, 중추부와 각 부서, 원로들이 다 왕씨를 모두 제거해 뒷날의 근심을 막아야 한다고 했으나, 서운관, 전의감, 요물고(料物庫)의 관원 몇십 명만은 섬으로 귀양보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도평의사사에 다시 의논해 아뢰도록 지시하니, 도평의사사에서는 여러 사람의 주장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라 명령을 전했습니다.
“왕씨를 처리하는 문제는 모두 각 부서의 봉해 올린 글에 따를 것이나, 왕우 3 부자는 조상 제사를 받들어야 하므로 특별히 용서하라.”
중추원 부사 정남진(鄭南晉)과 형조 의랑 함부림을 삼척에, 형조 전서 윤방경과 대장군 오몽을을 강화에, 형조 전서 손흥종과 첨절제사 심효생을 거제도로 보냈습니다.
정남진 등이 삼척에 이르러 공양군에게 명령을 전했습니다.
“신민이 추대해 내가 임금이 되었으니 실로 하늘의 운수다. 그대를 관동(關東)에 가 있게 하고 나머지 일가들도 각기 편리한 곳에 가서 생업을 유지하게 했는데, 지금 동래현 영(令)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 등이 반역을 도모하려고 그대와 친속(親屬)의 운명을 맹인 이흥무에게 점쳤다가 발각돼 복죄(伏罪)됐다. 그대는 비록 몰랐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대간과 법관이 연명으로 글을 올려 청하기를 열두 번이나 하고 여러 날 동안 강력히 주장했으며 각급 신하들이 또 글을 올려 주장하니, 내 어쩔 수 없이 그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대는 이 사실을 잘 알라.”
마침내 그를 목졸라 죽였으며, 그 두 아들도 죽였습니다.
강화와 거제에 간 관원들도 왕씨들을 강화 나루와 거제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고는 중앙과 지방에 지시해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고 이들을 모두 목베었습니다.
또 전 왕조에서 왕씨로 성을 받은 사람은 모두 본래 성을 따르게 하고,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은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모두 어머니 성을 따르게 했습니다.
이와 함께 고려 왕실 부인들에게 물자 대주던 것을 끊고 모두 월봉으로 주도록 했습니다. 공양왕의 왕비와 어머니, 그리고 가까운 족친들을 궁주, 옹주,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해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주기도 하고 일부는 월봉으로 주기도 했으나, 사헌부의 청에 따라 이를 모두 월봉으로 낮춘 것입니다.
이렇게 공양왕 일가를 없앤 임금은 그로부터 석 달 뒤인 7월에 ‘속죄 행사’를 벌입니다. 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금(金)으로 ‘법화경(法華經)’ 4부(部)를 써서 각 절에 나누어 두고 때때로 꺼내 읽도록 한 것입니다.
이 작업에는 전 예의사(禮儀司) 판서(判書) 한이(韓理), 전 우윤(右尹) 정구(鄭矩), 봉상시 경(卿) 조서(曹庶), 전 헌납 권홍, 전 사복시 주부(注簿) 변혼 등 당시 글씨를 잘 쓴다는 사람들이 동원됐습니다.
변혼은 앞서 겸 상서사 녹사로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두 사람을 추천해 벼슬을 주고 녹봉은 제가 받아서 썼다가 발각돼 도피중이었는데, 글씨를 잘 쓴다고 이름이 나 용서받고 이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임금은 금 글자로 쓴 이 ‘법화경’을 자신과 중궁 앞에서 강론케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이 사건의 발단이 됐던 박위는 이때도 처벌에서 제외됩니다. 태조는 공양왕까지 죽고 사건이 마무리된 지 몇 달 지난 9월에 슬그머니 그를 서북면 도순문사로 임명했다가 사헌부가 반대하자 며칠 만에 다시 파직했습니다.
그는 이성계의 두터운 신임으로 나중에 다시 벼슬 자리에 나서지만, 결국 몇 해 뒤 왕자들의 쿠데타 때 협조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합니다.
왕씨 일족의 후일담.
공양왕을 대신해 조상 제사를 받들던 그 아우 귀의군 왕우는 1397년 2월에 죽었습니다. 규정에 따라 장사지내게 하고, 경희(景僖)라 시호를 내려주었습니다.
임금은 내시 김용기(金龍奇)를 보내 제사를 지내주었습니다. 아들은 상장군 노조(盧조)와 대장군 노관(盧琯)이고, 딸은 무안군 이방번에게 시집갔습니다. 왕씨의 아들이 노씨? 왕씨 성을 쓰지 못하게 해서 어머니 성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왕우의 아들들이 노씨가 됐기 때문에 조상 제사는 잠시 경기우도 관찰사에게 대신케 했다가 10월에 노조로 하여금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직급과 마전군(麻田郡) 귀의군(歸義君)을 물려받게 하고 왕씨 성을 회복해 제사를 받들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마전 인근 고을 장정을 징발해 전 왕조 태조의 사당을 짓도록 하고, 고려 태조의 제사를 위한 토지와 공양군의 비(妃) 노(盧)씨의 토지에서는 나라에서 세금을 받지 말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12월에는 왕씨의 서자들인 백안(伯顔), 연금(延金), 금만(金萬) 등 세 사람이 이름을 바꾸고 서울과 지방을 드나들었다며 국문하고 목을 베었으며, 또 다른 서자인 약사노(藥師奴)를 목졸라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1월에는 왕씨 자손 관련 무고(誣告) 사건까지 터졌습니다. 앞서 이복양(李復陽)이 대사성 변중량에게 말했습니다.
“전 왕조 왕씨의 서자 흥도(興道)란 자가 황(黃)씨로 성을 바꾸고 하양(河陽)에서 밀양(密陽)으로 옮겼습니다. 하양 감무 어연(魚淵)과 밀양부 사(使) 박상경(朴尙絅), 판관 권간(權簡) 등이 알고서도 알리지 않았고, 전 지평(持平) 이신과 교수관(敎授官) 최관 등은 그와 왕래했습니다.”
변중량이 보고하자 임금이 대간과 형조에 지시해 국문토록 했습니다. 흥도가 말했습니다.
“제가 처음에 공연히 성을 왕씨로 했다가, 왕씨가 망한 뒤에 황씨로 고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 중추원 부사 정탁의 종 이금(李金)인데, 여러 해 동안 도망다니면서 성과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이에 정탁을 불러 보이니 사실이어서 모두 용서하고, 어연만은 흥도가 왕씨라고 고한 자가 있는데도 끝까지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습니다.
형관(刑官)이 이복양은 무고를 했다며 처벌을 청하자, 임금이 말했습니다.
“이복양의 고한 것이 사실은 아니나, 왕씨를 황씨로 고친 것은 사실이다. 무고로 논죄할 수 없다.”
왕우의 아들, 그러니까 공양왕의 조카들인 왕조, 왕관 형제는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날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이때 표적이 됐던 강씨 소생 왕자 이방번이 바로 그들 형제의 매부였으니, 세자 및 정도전 세력으로 몰려 쿠데타 세력에 의해 피살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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