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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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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1>

왕씨의 신수를 점친 사람들

1394년 1월, 문하부 참찬 박위가 순군부 옥에 갇혔습니다.

앞서 동래현(東萊縣) 영(令)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 등이 밀성(密城, 밀양)의 맹인 이흥무(李興茂)에게 나라의 안위와 왕씨의 신수를 점치게 했는데, 일이 발각되자 이흥무를 잡아다 순군부 옥에 가두고 대간과 형조로 하여금 순군만호부와 함께 조사토록 했습니다.

이흥무는 김가행, 박중질 등이 박위의 말을 듣고 가서 점을 쳤다고 자백했습니다. 공양왕과 임금의 신수를 비교해 누가 낫겠는가, 또 왕씨 가운데서 누가 신수가 좋은 사람인가를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흥무의 점괘로는 공양왕의 사촌인 남평군(南平君) 왕화(王和)의 신수가 좋고 그 아우 영평군(鈴平君) 왕거(王거)가 그 다음이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박위를 가두고 순군으로 하여금 김가행과 박중질을 경상도에서 잡아 오도록 했습니다. 또 왕씨를 거제도로 옮기게 하고, 대장군 심효생을 보내 왕화, 왕거를 안동(安東) 감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임금은 사람을 보내 박위에게 술을 내려주고 수갑을 풀어주게 한 뒤 타일렀습니다.

“경이 어찌 이런 짓을 했겠는가? 박중질, 김가행 등이 와서 밝혀지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사직에 관계되는 것이라 내가 개인적인 은혜를 베풀 수가 없어 경을 옥에 넣도록 지시한 것이다. 내가 딴 사람들이 큰 죄를 지었어도 모두 용서했는데, 하물며 경이겠는가? 경은 마음을 굳게 가지라.”

김가행과 박중질 등을 잡아다가 국문했는데, 대간과 형조는 국문을 해도 쉽사리 판결할 수가 없다며 진술에 관련된 사람들을 한자리에서 심문해 그 죄를 밝히자고 청했습니다. 임금은 윤허하지 않고 박위를 용서해 복직시킨 뒤 말했습니다.

“박위가 비록 본래 다른 마음이 있었더라도 지금 내가 높은 작위를 주어 후히 대우했는데 어찌 감히 변란을 도모했겠는가? 박위 같은 인재는 쉽게 얻을 수 없다.”

박중질, 김가행, 이흥무 등은 곤장을 쳐 변방 고을에 귀양보냈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는 글을 올려 왕씨를 제거하도록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다시 함께 글을 올려 왕강, 왕승보, 왕승귀, 박위의 처벌을 주장하며 서울에 살게 할 수 없다고 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글을 올려 왕강, 왕승보, 왕승귀, 왕격을 섬으로 옮기자고 청했습니다. 임금이 대표와 간사를 불러 다시 말하지 말라고 하니,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이 무리들은 전하께서 매우 후하게 대우하셔도 은혜를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왕강은 지모가 남보다 뛰어나고 왕승보, 왕승귀는 용맹과 힘을 당할 자가 없으니, 서울에 있으면 틀림없이 불측한 변란을 선동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들의 아뢰는 말을 윤허하셔서 훗날의 근심을 막으소서.”

임금은 우선 가둔 것을 속히 풀어주라고 지시하고 왕강 등을 불러 지시했습니다.

“경들은 모두 쓸 만한 인재여서 불러와 서울에 두고 가까이하면서 믿고 의심함이 없었다. 이번에 간관이 섬에 옮기기를 청했으나 내가 이미 용서했으니, 경들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전과 같이 출입하라.”

대간과 형조에서 다시 함께 글을 올려 왕강 등을 귀양보내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또 왕화 등을 국문하라고 글을 올려 청하니, 대간과 법관에게 지시해 박중질과 왕화 등을 잡아 수원부(水原府)에 모아 놓고 국문토록 했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는 올린 글을 윤허하지 않는다며 모두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불러다 놓고, 윤허하지 않은 것은 깊이 생각하기 위함일 뿐이니 우선 업무를 보라고 타일렀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글을 올려 왕화, 왕거, 석능(釋能), 이흥무, 김가행, 박중질 등을 한자리에서 대질 심문하자고 청하니, 대간 형조 순군부 각 1 명씩이 양광도 관찰사와 함께 수원부에 모여 대질 심문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한편 사헌부 시사 권문의, 윤창(尹彰), 기거주 정귀진(鄭龜晉), 좌습유 최사강(崔士剛), 감찰 이복례(李復禮) 등 대간 일부가 대간과 형조의 탄핵을 받았습니다.

3성이 모여 공양왕 3 부자와 왕우 3 부자 및 왕강, 왕승보, 왕승귀 등을 제거하려고 의논했는데, 권문의 등은 왕씨를 제거하려면 싹 없애야지 왜 왕강 등 일부만 제거하려 하느냐고 반론을 제기해 탄핵한 것이었습니다.

산기상시 이거이, 사헌부 중승 박신, 형조 정랑 전시(田時), 순군부 지사 성부(成溥) 등을 수원부에 보내 왕화, 왕거와 중 석능, 김가행, 박중질, 이흥무 등을 데려다 국문토록 했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는 왕씨 일족을 섬으로 옮기라고 청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또 함께 글을 올려 공양왕과 왕씨 일족을 섬에 안치해야 한다고 아뢰니, 임금이 3성 간사를 불러 타일렀습니다.

“지난번에 이미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함께 글을 올리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왜 따르지 않는가? 이 일은 이미 잘 생각하겠다고 말했는데, 어찌 이리도 급히 서두르는가?”

“이미 명령은 받았지만 다시 함께 글을 올린 것은 일이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하시겠다는 말씀을 듣고도 다시 아뢰는 것은 뜻밖의 변고가 있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글을 올려 왕씨와 박위의 처벌을 청했으나 임금이 보류하고 내려보내지 않았습니다. 대궐 문에 엎드려 힘써 간(諫)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글을 올려 박위의 조사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글을 지어 공양왕을 죽이도록 청했습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않으니, 대간과 형조에서 모두 업무를 보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왕강 등을 불러 말했습니다.

“경들은 나라에 공이 있어 다른 사람들처럼 귀양보내지 않았다. 지금 대간이 글을 올려 처벌을 청했으나 내가 따르지 않았는데, 대간이 모두 업무를 보지 않아 내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경들은 각기 귀양지로 가라. 나 또한 경들의 공을 잊지 않겠다.”

그러면서 술을 내려주었습니다. 왕강은 공주(公州)로, 왕격은 안변(安邊)으로, 왕승보는 영흥으로, 왕승귀는 합포(合浦, 마산)로 귀양보냈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그제야 업무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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