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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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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0>

말많았던 花園-都城 공사

1393년 5월, 임금은 도성 안 화원(花園)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임금은 화원에 거둥해 시찰하고 내시 김사행에게 팔각정(八角亭)을 수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안경검 등이 화원 공사를 그만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했습니다.

“간관이 나라 임금을 궁문 밖에 발도 내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가? 이 화원은 전 왕조에서 만든 것인데, 그대로 깨끗이 청소해 유람토록 하는 것이 그리도 옳지 못한 일인가?”

그러고는 좌습유(左拾遺) 왕비(王裨)를 불러, 앞으로는 종묘 사직의 안위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아뢰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사는 비리의 온상이었던 모양입니다. 팔각전을 수리하면서 단청 비용을 엄청나게 계상(計上)해 삼사 관원에게 직접 그 비용을 검사하게 했을 정도입니다. 미장을 관리하고 화초를 심고 나무와 돌을 다듬는 일은 모두 내시 김사행이 관장하고 있었습니다.

8월부터는 도성 공사를 벌였습니다. 경기 좌 우도와 양광도, 서해도, 교주도, 강릉도 등 6 도 백성을 동원해 도성을 쌓게 했습니다. 옛터가 넓어 수리하기 어렵다 해서 반으로 줄이게 했습니다. 간관 안경검 등이 글을 올려 경성을 옛터에 따라 쌓도록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임금이 미행(微行)으로 남산에 올라 성터를 보고 화원에 들어갔습니다. 예조 전서 이민도가 임금에게 아뢰었습니다.

“신은 성 쌓는 일이 쉽게 끝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무슨 까닭인가?”
“관원들은 감독에 게으르고 일꾼들은 일에 게으르니, 쓸데없이 노동력만 허비할 뿐이고 일에는 효과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얼음이 꽝꽝 얼 때까지도 일을 마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임금이 곧은 말이라고 생각해 이민도에게 옷 한 벌과 쌀 콩 30 섬을 내려주었습니다.

임금은 좌부승지 최이(崔迤)를 보내 성 쌓는 관원들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조사하게 했습니다. 이후 날마다 사헌부 감찰로 하여금 돌며 점검토록 했습니다. 성 쌓는 관리 가운데 공사 감독에 태만한 14 명을 순군부 옥에 내려 가두었다가 곧 풀어주었으며, 장군 하나는 강화 수군에 편입시켰습니다.

첨절제사 진충귀(陳忠貴)를 양광도에 보내 각 고을에서 기일 내에 일꾼을 보내지 못한 사람을 조사했습니다. 수령 9 명에게 매를 때리고, 안렴사 조박을 한양부에 가두었습니다.

또 일꾼을 시기에 맞춰 보내지 못한 마전(麻田) 감무 문집(文緝)과 토산(兎山) 감무 오사민(吳思敏)에게 곤장을 쳐서 변방 고을로 귀양보냈습니다.

임금은 성(城)을 시찰하고는 화원으로 거둥했으며, 도평의사사에서는 경성수축도감(京城修築都監) 판사 홍영통, 안종원 등에게 왕륜사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도평의사사에 지시해 성 쌓는 일꾼들에게 식량을 주게 하고 경상도 전라도 안렴사에게 공문을 보내 일꾼을 징발해서 새 도읍에 보내도록 했습니다.

서운관에서 말씀올렸습니다.

“도선(道詵)이 ‘송도 5백 년’을 말했고, 또 ‘4백80 년 터’라는 말도 있습니다. 더구나 왕씨의 제사가 끊어진 땅인데 지금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있으니, 청컨대 새 도읍을 조성하는 동안 좋은 방위로 옮기소서.”

도평의사사에 내려 의논하게 했습니다.

임금은 잇달아 성을 시찰하고 수창궁으로 거둥해 공사를 살폈습니다. 성을 쌓다가 도망한 일꾼 6 명을 목베었습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양광, 교주, 서해도에서 온 성 쌓는 일꾼들을 놓아보냈습니다. 임금은 경성수축도감 판사에게 무늬비단과 명주 각 1 필씩을 내려주었고, 사람을 성 쌓는 곳에 보내 일꾼들의 질병을 일일이 묻게 했습니다.

이듬해 1월이 되자 수창궁의 서쪽 침실을 헐고 2층 궁전을 짓도록 지시했습니다. 공사 감독은 역시 김사행에게 맡겼습니다.

경기 좌 우도 수령들이 성 쌓는 일꾼들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각 도 장정을 징발해 경성 쌓는 일을 돕도록 했습니다. 문 무 관원들에게 품계에 따라 차등 있게 일꾼을 내어 경성을 쌓는 데 조력하게 했습니다. 전직 관리들에게도 품계에 따라 일꾼을 내어 경성을 쌓는 데 조력하게 했습니다.

도성 서소문(西小門)의 옹성(瓮城)이 기울어지려 하자 감독관을 옹진(瓮津)의 수자리로 귀양보냈습니다. 서소문을 고쳐 짓도록 지시하고, 돌을 다듬었던 중의 머리를 베어 그 위에 매달아 사람들을 경계했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글을 올려 조반과 곽선(郭璇) 등이 성문 공사 감독을 제대로 못한 죄를 주장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2월 말에 성 쌓는 일꾼들을 놓아 보내고, 교지(敎旨)를 내렸습니다.

“전 왕조 말기에 요역(徭役)이 너무 많아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편안하게 모여 쉬게 하려고 생각했으나, 성(城)은 나라의 울타리로서 난폭한 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지난해 가을에 경기, 양광, 서해, 교주강릉도 백성들을 징발해 도성을 수축케 했는데, 부역(賦役)에 나온 뒤 나무와 돌에 깔리거나 질병으로 목숨이 끊어진 사람이 있었으니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도평의사사에서 현지 관청에 지시해 3 년 동안 그 집의 부역을 면제해주고 이름을 갖추어 보고하라.”

이 성 쌓는 공사는 부역 기피가 심했던 모양입니다. 힘 있는 집에서는 여러 가지 꾀를 부려 부역을 면하고, 가난한 집에서는 아이나 여자를 내보내는 형편이었습니다.

도평의사사에서는 이해 7월에 글을 올려, 앞으로는 누구든지 집 있는 자는 다 장정을 내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대호(大戶)는 2 명, 중호(中戶)는 1 명, 소호(小戶)는 세 집 합쳐 1 명씩 나오게 하되, 부역을 빠지거나 아이와 여자를 내보내는 자는 호주를 논죄하라고 청했습니다. 임금은 그대로 따랐습니다.

사헌부에서 글을 올려, 도성의 성을 쌓는 지방 사람들을 2 교대로 나누어 백성들의 힘을 수월하게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말했습니다.

“나누어서 오래 하는 것과 합쳐서 빨리 끝내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은가? 식량을 잇지 못하는 자는 헤아려 필요한 만큼 주도록 하라.”

도평의사사에 지시해 경상, 전라, 충청, 강원, 풍해도와 경기 좌 우도의 백성을 징발해 옛 서울의 성 쌓는 공사를 마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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