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에 큰 골칫거리였던 왜구 문제는, 그 왜구를 물리쳐 ‘스타’로 떠오른 덕분에 새 왕조까지 창업한 태조가 즉위한 뒤에도 여전했습니다.
조선 건국 후 처음 왜구 기사가 등장하는 것은 건국 이듬해인 1393년 3월입니다.
고만량(高灣梁) 만호(지방의 군 관리) 신용무(申用茂)가 왜구를 방어하지 못하고 병선 3 척을 빼앗겼다며 도평의사사에서 법에 따라 목을 베자고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 이튿날에는 경상도 안렴사 심효생이 왜구가 쳐들어오려 한다며 절제사를 각 도에 보내 막게 하라고 청했고, 나라에서는 바로 3 도에 절제사를 보냅니다.
<표 1>
임금은 이들을 보내면서 승리 소식을 전하지 못한다면 자신을 볼 생각을 말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상당히 심각했다는 말이겠지요.
임금은 좌도 수군 도절제사 박자안(朴子安)과 우도 수군 도절제사 김을귀에게 병선을 거느리고 바다에 나가 왜적을 잡도록 지시했습니다. 박자안은 문하부 참찬 정희계를 통해, 죄를 지은 신용무를 용서해주면 함께 힘을 합쳐 왜적을 잡겠다고 청한 뒤 허락을 얻고 데려갔습니다.
이때 보낸 절제사들은 왜구가 스스로 물러갔다며 4월 14일 모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양광도 안렴사 조박이 왜구의 배 30여 척이 연해 지방에 상륙하려 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바로 나세를 연해 등지 병선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삼고 친군위(親軍衛)의 용사를 데리고 가도록 했으며, 중추원 사(使) 이무에게는 서강의 병선을 점검해 왜구를 방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또 박영충(朴永忠), 이승원(李承)을 강화(江華)와 교동(喬桐) 절제사로 삼아 내보냈습니다.
5월 7일에 왜적의 배 13 척이 고만량에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만호 최용유(崔用濡)가 힘을 다해 싸우다가 두 아들과 함께 전사했고, 왜적은 배 다섯 척을 빼앗아 갔습니다.
임금은 최용유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나라에서 근심하는 바가 왜적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고는 연해의 방비를 더욱 철저히 하게 했지만 왜적은 바로 이튿날 전라도 아용포(阿容浦)에 쳐들어와 군선 한 척을 빼앗아 갔습니다. 나라에서는 중추원 사 이무에게 지시해 강화의 병선을 점검하고 연해의 요충지에 정박해 왜적을 잡도록 했습니다. 그달 중순에는 왜적이 교동을 노략질했으며, 의안백 이화와 절제사들을 보내 공격하자 도망쳤습니다.
이 무렵 각 도에서 올린 군적(軍籍)을 보면 경기 좌 우도와 양광(충청도와 경기도 남부), 경상, 전라, 서해(황해도), 교주(강원도 영서), 강릉도(강원도 영동) 등 8 도에 마병(馬兵), 보병과 기선군(騎船軍)이 모두 20만 명이고, 자제와 향리(鄕吏), 역리(驛吏) 등 각종 역(役)을 지고 있는 사람이 10만 명이었습니다.
앞서 남은 등 8 명의 절제사가 왜구를 막으러 갔다가 왜구가 물러가자 남은, 박위, 진을서로 하여금 각기 경상, 양광, 전라도에서 군사를 점검해 명부를 만들게 하고 나머지 도에서는 안렴사로 하여금 점검토록 했는데, 이때에 군적이 완성돼 올린 것이었습니다. 서북면 도순문사 조온에게는 의주도(義州道)의 군적(軍籍)을 고쳐 마련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왜적은 6월 들어 문화현(文化縣), 영녕현(永寧縣) 두 고을에 쳐들어왔습니다. 영안군(永安君) 이방과와 중추원 동지사 장사길, 중추원 상의 곽충보를 보내 이를 치게 했습니다.
7월 13일, 서해도 안렴사는 지군사(知軍事) 김균(金鈞), 김권(金勸)이 왜구와 싸워 패전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임금이 말했습니다.
“지금 패전한 이유를 들으니 이는 오로지 지군사가 마음을 다해 힘껏 싸우지 않은 때문이다. 마땅히 군율로 다스려야 하나,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잠시 용서할 것이다. 지군사 두 사람은 각기 곤장 1백 대를 치고, 패두(牌頭)는 각기 곤장 80 대를 쳐 뒷날에 공을 세울 것을 기약하라. 영선천호(領船千戶)로서 싸움에 나가지 않은 사람만 목을 베어라.”
이해 9~10월에도 왜적은 서북면 일대를 노략질했습니다.
<왜구 침입과 격퇴 일지>
<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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