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2월 22일 20시 14분
홈
오피니언
정치
경제
사회
세계
문화
Books
전국
스페셜
협동조합
남원성에서 가고시마로 간 조선의 도공들
[김유경의 '문화산책'] <37>조선도공 14대 심수관과의 만남
남원성에서 가고시마로 간 조선 도공들 - 사쓰마 도자기의 전성기 이끈 역할자로 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 14대 심수관(沈壽官) 씨가 2019년 6월 16일 일본에서 작고했다. 1926년 생인 그의 본명은 혜길(惠吉)이고, 일본이름은 오사코 게이기치(大迫惠吉), 93세 향년이다. 조선 도공의 손으로 만들어져 일본의 대표적 도
김유경 언론인
경주 우물가의 봉숭아
[김유경의 '문화산책'] <36> 경주의 우물 ⑦
"물과 관련한 경주의 특색은 우물이라 할 수 있다"고 이순탁 2015 세계물포럼 조직위원장이 말했다. "신라 이래 200여 개 우물이 경주에 남아 전한다. 최근의 '물포럼'에 경주 우물에 대한 문화적 토론이 빠지지 않는 것도 그런 바탕에서 출발했다." 국제회의에서 나정(蘿井) 등 경주 우물 사진을 본 외국학자들은 대뜸 "이 우물들, 가서 볼 수 있나?"라며
월성 숭신전 우물과 8각 돌기둥
[김유경의 '문화산책'] <35> 경주의 우물 ⑥
경주의 대궐터 월성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전하는 우물은 석탈해왕의 사당 숭신전 옛터에 있는 연꽃조각 돌우물이다. 2010년 월성에서 옛 숭신전 앞을 지나쳤으나 그때는 숭신전 원래 자리인 것도 몰랐다. 그러나 눈에 띄는 구조물로 석빙고 하나를 보았을 뿐 땅 위로는 텅 비어 있는 월성에서 8각 돌기둥 두 개가 거리를 두고 문기둥처럼 서 있는 광경은 쉽게 잊을
원성왕의 우물과 괘릉
[김유경의 '문화산책'] <33> 경주의 우물 ⑤
경주 분황사엔 돌을 팔각형으로 다듬어 만든 커다란 우물이 있다. 조그마하고 지표면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한 다른 우물과 비교해 보면, 돌 하나를 통째로 조각한 이 우물은 최고의 공을 들인 건축임을 알 수 있다. 1967년 분황사지 발굴에서는 크고 작은 우물이 20여 개나 있었다고 한다. 현재 돌우물보다 더 큰 지름 1.9미터(m)의 우물도 있어, 그 안에서는
명랑법사의 우물과 원원사
[김유경의 '문화산책'] 경주의 우물 ④
명랑법사는 경주의 우물을 역학적으로 다룬 인물이다. 그는 물과 용을 부리는데 능했다. 흥미로운 일화가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 명랑이 632~635년간 당나라에 갔다가 신라로 돌아올 때 '바다 용의 청에 의해, 바다 속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1000냥을 보시 받아 땅 밑을 잠행하여 경주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고 했다. '이에 자기 집을
석탈해의 토함산 요내정 우물은 어디인가
[김유경의 '문화산책'] <32> 경주의 우물 ③
신라 석 씨 왕계의 시조 탈해왕도 우물이야기를 남겼다. '토함산(동악(東岳)이라고도 부른다)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탈해에게 줄 물을 떠오다가 먼저 마셔버린 사람 백의에게 각배가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다가 탈해가 꾸짖고 백의가 맹세한 뒤에야 떨어졌다. 지금 동악의 산속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사람들이 요내정(遙乃井)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라는 삼국유사의
알영우물
[김유경의 '문화산책']<30> 경주의 우물 ②
혁거세왕의 비 알영 또한 태생서 부터 우물을 지녔다. 그녀의 위상은 그만큼 평범한 여성의 그런 것이 아니었던 듯하다. 경주시 탑동 오릉안 알영정 비각 뒤 지금의 알영우물은 땅 표면에 맞대어 두꺼운 장대석을 3매 연이어 덮어놓았다.
박혁거세의 나정
[김유경의 '문화산책']<29> 경주의 우물①
경주에서 워낙 유명한 불국사나 석굴암, 첨성대, 대릉원 같은 유물을 돌아본 뒤에는 그 뒤에 가려져 있는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물이 그중 하나였다. 경주의 우물에선 왕들이 태어나고 용이 넘쳐나고 용궁으로 통하며, 역사적 인물과 얽힌 이야기가 많다.
요즘 뜨는 서촌, 뒷이야기가 궁금해?
[프레시안 books] 최종현·김창희의 <오래된 서울>
이 책 오래된 서울(최종현·김창희 지음, 동하 펴냄)은 지금의 서울이 고려시대 남경으로 완성되던 순간, 고려 숙종10년(1104년)을 기점으로 서울을 들여다본다. 고려인들은 개성, 평양, 서울을 중경·서경·남경의 핵심 도시로 정해 경영했다. 숙종이 개성에서 남경에 올 때 묵을 행궁을 지은 자리가 조선시대에 와서 경복궁 대궐터로 계승되었다.저자들은 서울의 역
정밀한 건축 첨성대, 현대천문학으로 밝힌 4000년 전 고대사
[김유경의 '문화산책'] 첨성대 ④ 김장훈·박상훈, 박창범의 연구
"사소해 보이는 돌 하나가 그냥 세워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계산과 반복, 그리고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만들어졌다는데 감탄하며,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새롭게 다가 온다"고 사진가 이순희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