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엔 돌을 팔각형으로 다듬어 만든 커다란 우물이 있다. 조그마하고 지표면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한 다른 우물과 비교해 보면, 돌 하나를 통째로 조각한 이 우물은 최고의 공을 들인 건축임을 알 수 있다.
1967년 분황사지 발굴에서는 크고 작은 우물이 20여 개나 있었다고 한다. 현재 돌우물보다 더 큰 지름 1.9미터(m)의 우물도 있어, 그 안에서는 목이 잘린 불상 14구가 나왔다(지금 경주박물관 뒤뜰에 줄지어 전시되고 있다). 현대적 조형미까지 느낄 수 있는 이 우물을 포함한 우물 규모만으로도 과거 분황사의 위상이 충분히 짐작된다.
이 우물은 지름 1.2m, 지표면의 우물담 높이가 72cm, 우물 바깥지름 129cm, 돌두께를 뺀 안지름 88cm, 우물 아랫단지름 170cm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신라 우물 중 가장 크다. 건축적으로는 놀랍게도 화강암 석재 하나를 통째로 써서 안을 둥글게 파고 외부는 돌아가며 8각으로 아랫단이 넓게 벌어지는 꽃잎처럼 각을 잡았다.
신라가 국가 철학으로 받아들인 불교의 8정도를 상징해 외부를 다듬었다고 하며, 원형에 이어 우물 내부의 사각형 틀까지 기하학적 모양새를 갖췄다. 얼마나 심오한 철학적 선택과 인간의 공력이 들어간 것인가. 이 우물을 기획한 사람의 손길이 보이는 듯하다. 우물엔 지금도 물이 고이지만 쓰지는 않는다. 다만, 안전을 위해 사각틀 위에 철망을 쳐놓았다.
분황사에는 원효스님이 주석해 저술했고 자장스님도 계셨지만, 분황사 우물이 역사적 현장에 등장한 것은 신라 후기 원성왕대에 들어서다. 그리고 분황사 우물의 규모와 조형의 위엄에 맞게, 여기서 벌어진 이야기는 국제 간의 외교 군사문제에 국가 안위를 결정짓는 중요 사안이었다. 신라사에서 우물과 뗄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원성왕 재위 11년, 795년에 일어난 그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분황사 우물과 서라벌 동북쪽 동천사에 있는 동지와 청지라는 두 우물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 중국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어느 곳인지 미상)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 세 우물의 용을 물고기로 둔갑시켜 당나라로 가져가려 했다. 다음날 원성왕 꿈에 용의 부인이 나타나 남편용을 다시 우물에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원성왕이 군대를 풀어 이들을 붙잡아 용을 되찾아와 분황사 우물과 동지 청지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다."
그 우물이 지금 남아 전하는 이 돌우물인가? 신라 분황사 20여 개 우물은 어떤 특별한 구조 속에 존재했던가? 1300년 전의 일은 알 수 없고 우물 중에서도 단 하나, 이 화강암 돌우물만 남아 원성왕과의 유대를 생각하게 한다.
동천사라는 절은 신라에 불교를 처음 공인한 진평왕이 지은 것이고, 두 우물은 동해 용이 왕래하면서 설법을 듣던 곳이라고 <삼국유사>는 기록했다. 신라의 우물에는 용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모른다. 황룡사 터에는 용궁도 있었다. 용은 아주 부유한 물 권력자나 장보고와 같은 해상 권력자를 말하는 것일까? 신라 우물을 들여다보면 불교와 무속, 신라토속구조가 저마다 힘껏 역량을 발휘하는 것 같다.
자식이 없던 선덕왕(선덕여왕과 다른 남자왕) 사후, 원성왕은 서열이 가장 높은 왕족 김주원을 제거하고 스스로 왕이 됐다. 이 이야기는 애초에 우물과 관련이 있다.
그는 어느 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꿨다. 해몽이 '왕이 될 징조'라고 해 알천(북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선덕왕이 죽자, 신라 군신들은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기로 논의했다. 그런데 알천 너머에 집이 있는 김주원이 마침 큰비로 물이 불어난 북천을 건너지 못해 대궐에 들어오지 못했다. 원성왕은 이를 기회 삼아 '하늘이 그를 왕으로 세우지 않으려는 것'이라는 논리로 김주원을 제치고 785년 신라 38대 왕위에 올랐다. 이후 그의 후대는 줄곧 왕권을 노리는 김주원 등 계파 간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100여 년을 지새웠다.
원성왕은 왕이 되게 이끌어준 천관사 우물을 잊지 않고, 통치기간 내내 경주의 우물을 특히 신성시하고 위하던 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 만큼 분황사와 동천사 우물의 용을 지켜낸 것이 원성왕인 것은 누구보다 적절한 역할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우물, 용, 연못 등이 크고 작은 일에 관여했다. 천관사는 김유신이 이곳 천관녀를 배신하는 과정에서 말의 목을 베었다는 일화가 있는 절이다. 불교적인 것보다는 그 이전 신라의 토속종교가 더 많이 느껴지는 절의 우물도 어쩌면 분황사 우물만큼 대단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지상에 남아 있는 흔적은 없어 논으로 덮인 사적지를 한창 발굴 중이다. 어떤 사실이 밝혀질지 기대된다.
원성왕은 재위기간에 백제 비류왕이 처음 만든 김제 벽골제를 보수하기도 했다. 한 기록에 의하면 왕의 두 손녀 호칭이 대룡부인, 소룡부인이었다. 자고로 옛날 임금들은 용왕의 딸과 많이 결혼했다.
재위 14년째인 798년에 원성왕이 죽었다. 왕이 묻힌 경주시 외동읍의 괘릉은 못과 관련이 있다. 1669년 간행된 동경잡기(동경은 경주의 옛 이름)에 '연못을 메워 원성왕 무덤을 마련했는데 관을 연못 바닥에 둘 수 없어 공중에 걸어 장사지냈다'고 했다. 최치원이 썼다는 비석은 사라졌다. 그러나 부근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숭복사 터가 있어 원성왕이 그 부근에 묻혔다는 기록을 토대로 이곳을 원성왕릉으로 보고 있다.
괘릉은 밑지름과 높이가 21.9×7.5m의 무덤으로,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사이의 면석에 글자가 새겨진 흔적이 있으나 훼손됐다. 봉분 밖으로는 25개의 돌기둥을 연결하는 돌난간을 둘렀다. 나지막한 언덕 위 봉분 앞에 남향으로 펼쳐진 2만 2800평 능역에는 솔밭과 4방위를 가리키는 돌사자, 문인상과 서역무인상, 돌기둥(화표석) 2개가 남아 양쪽에 갈라서 있다. 능 앞에 탁 트인 정경이 어느 경주 왕릉보다 안정감이 있다. 돌사자와 신라사에 왕성하게 무역 활동을 펼친 서역 소그드 사람들을 능지킴이로 내세운 괘릉은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신라 왕릉이다.
원성왕릉에는 봉분 뒤 언덕에 면해 있다. 반원형으로 물길을 낸 배수로 돌담으로 물이 배어 나오며 능 앞으로도 양쪽에 수백 미터의 긴 배수로가 나 있다. 능 앞에는 괘릉천이 흐른다. 또한 경주 모든 왕릉 중 유일하게 봉분에서 동쪽으로 20여 미터 떨어진 아래쪽에 우물이 있다. 아직도 솟아나는 우물은 오래된 신라시대 유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맑게 고인 물에는 주변의 소나무와 하늘이 그림처럼 비친다. 사방에서 물이 배어 나오는 지형인 것이다.
김창구 문화해설사는 "원성왕릉 주변이 언제나 물로 질퍽거려서 방문객들은 신에 진흙이 묻어 흙을 묻힌 휴지를 흘리고 다니니 관리 차원에서 안 되겠다"고 해서 "10여 년 전 봉분 뒤와 양옆에 배수로를 냈다"고 설명했다.
"비가 많이 오면 능 앞 풀밭은 물이 찹니다. 여기서는 물속에서 자라는 특수한 풀이 잔디와 같이 섞여 자라죠. 능역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거예요. 두 개의 돌개둥(화표석)이 안쪽으로 너무 가깝게 들어서 있는 것이 비례가 맞지 않는 위치니까요. 그러면 능앞에 있는 괘릉천까지 능역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어요."
몇백 년째 경주 괘릉리에서 토박이로 산 주민 김진환 씨는 그의 자서전 <80년을 회고하며>에 괘릉의 지하수와 우물을 언급했다.
"이 동네 이름은 원래 능말이었다. 연못에 돌기둥을 세우고 관을 걸어 왕을 장사지냈대서 괘릉이라고 불렸는데 성덕왕대 년도의 절 감산사가 마을에 있었다. 괘릉 주변 50여 개 산골짜기 안에 들어선 전형적인 농촌마을 한가운데서 남쪽 울산만과 북쪽 포항만으로 물길이 나뉘어 흐른다. 다시 말해 괘릉리는 물이 모이고 고이는 곳이 아니라 비가 내리면 곧장 남북으로 갈라져 흘러나가는 지형의 상습 가뭄지대라서 밭농사 위주로 하다가 덕동호 저수지가 생긴 후에야 논농사를 짓게 됐다."
그럼에도 괘릉이 1년 내내 물기가 배어나는 지대인 것은 이곳이 연못 자리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능역 안에 있는 우물에 대해서도 말했다.
"200년 전 경주에 장티푸스가 돌아 인명이 많이 죽어나갔다. 어느 날 괘릉리 이규목이란 주민의 꿈에 왕릉 쪽에서 말쑥한 차림의 백발노인이 와서 '못되고 흉측한 것들을 쫓아내고 나니 허기가 나서 왔노라' 하고 사라졌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집안의 큰 소가 별안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여겨 이 사실을 동네에 알렸는데 이웃동네마다 병으로 고통이 많았으나 그 동네만은 무사하게 지나갔다.
이때부터 꿈에 나타난 그 노인을 동네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 왕릉제를 지내게 되어 제주들은 가느다란 왼새끼 300발을 꼬아 능 전체에 금줄을 치고 왕릉 옆 우물을 청소했다. 제삿날에는 이 우물물로 밥을 지어 올렸다. 마을주민들이 지내던 왕릉제는 1982년까지 거행되다가 이후에는 경주김씨 종중에서 지내는 제사로 바뀌며 사라졌다."
왕릉 옆 우물은 이로 미루어 200년 전 왕릉제 때 이미 존재했던 것 같다고 한다. 또 상수도가 들어오기 6,7년 전까지도 주민들은 이 우물을 썼다. 물이 시원하고 맛이 좋았다고 한다. 능 바로 옆에 괘릉초등학교가 있는데, 60여 년 전 이 학교에 다닌 한 분은 "어린이 때 이 우물에 와서 물을 떠 가고 청소하는 걸레도 빨았다. 그래도 비바람이 치는 날에는 소나무 숲이 빽빽한 능옆이 우물이 무서워서 접근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경주의 여느 오래된 화강암 우물은 아니고 일정한 크기의 돌을 쌓아 만든 우물(바깥지름 가로세로 1미터가량)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네모에 계속 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최근 모든 지하수가 오염돼 지금은 이 우물도 사용하지 않는다.
괘릉의 이런 지형을 두고 지리학이나 풍수학에서는 어떻게 말할지 궁금하다. 꿈에 나타난 우물을 보고 왕이 되기 위해 우물에 들어갔으며, 재위 때는 우물의 용과 관련된 일화를 남겼다. 죽어서도 연못에 들어가 사후 수백 년째 명부의 잠에 들어 있는 원성왕이다. 그는 사후에도 왕의 운명을 연장하기 위해 물이 고이는 자리에 일부러 능을 쓴 것은 아닐까?
괘릉은 현대에 와서 두 번이나 도굴당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번, 6.25 한국전쟁 혼란기에 또 한 번. 김진환 씨는 15살 당시를 기억했다.
"그때가 10월이었는데 때 아니게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천둥번개가 쳤어요. '능 팠다!' 소리를 듣고 아침도 먹기 전에 동리사람들이랑 능에 가봤더니, 도굴꾼이 사람 두 길쯤을 옆으로 파놓았어요. 타고 남은 초가 있었습니다. 이때는 능 안까지 파고들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원성왕은 어떤 구조의 무덤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언제고 구조를 알 수 있는 때가 올까? 일제 강점기 일본인의 도굴로 사실확인이 어려워지진 않았을까? 원성왕은 자신의 능을 왜 이런 자리에 세웠을까. 경주는 임금의 생(生)과 사(死)부터가 이처럼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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