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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법사의 우물과 원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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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법사의 우물과 원원사

[김유경의 '문화산책'] 경주의 우물 ④

명랑법사는 경주의 우물을 역학적으로 다룬 인물이다. 그는 물과 용을 부리는데 능했다. 흥미로운 일화가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 명랑이 632~635년간 당나라에 갔다가 신라로 돌아올 때 '바다 용의 청에 의해, 바다 속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1000냥을 보시 받아 땅 밑을 잠행하여 경주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고 했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

▲ 명랑법사의 우물이 있던 금광사지로 추측되는 금광평의 요즘 풍경. 새 연못 ‘태진지’가 하나 생겼다. 나정과 삼릉가는 길 중간에 있는 논밭지대로 평안하고 조용하다. ⓒ이순희

신라의 우물은 그에게 와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하는 상징이 되었다. 명랑의 아버지는 신라 진골 출신이고, 어머니 남간 부인의 남동생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받아와 양산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였다. 두 형 또한 대덕칭호를 받은 이들이고 보면, 그의 집안은 당대의 신진 주류세력인 불교 지식인층 같다.

명랑은 문무왕 가까이서 움직였던 듯하다. 금광사, 사천왕사, 원원사 등 그가 창건에 관련한 절은 그가 일으킨 이적을 기린 '신인종(神印宗)'이라는 종파를 창건해 당나라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략으로 활용했다.

경주시 탑동 박혁거세의 나정(蘿井) 앞에 펼쳐진 논밭지대를 금광평이라고 한다. 이곳에 오래된 남간마을이 있다. 학계는 이 동네가 남간부인과 연관돼 ‘남간’이란 마을 이름을 지닌 것으로 보고, 명랑법사의 출생지이자 몇 가지 석조유물이 나온 금광평의 한 연못 부근이 금광사였으리라 추정한다.

명랑법사의 능력은 문무왕대에 나당전쟁을 치를 때 극명하게 발휘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삼국이 통일된 뒤 문무왕 년간에 설방이 이끄는 당나라 50만 대군이 신라를 노리고 쳐들어왔다. 왕이 그 대책을 명랑법사에게 물었다. 명랑은 우물 속 용궁에 들어가 용왕에게서 배워온 비법이 있었다.'

명랑법사는 우선 경주 낭산 신유림 아래에 비단으로 사천왕사를 가설하고 12명의 스님들과 '문두루 비법'을 썼다. 풍랑이 일어 당나라군은 신라 국경에 닿기도 전에 모두 침몰했다. 그 뒤 또 한 번 조헌의 5만 군사가 신라를 치겠다고 나섰다. 이번에도 명랑의 문두루 비법이 적을 풍랑으로 물리쳤다. 경주는 안전해졌다. 명랑법사는 신인종(神印宗) 불교종파의 개조가 되었다.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방위 개념이 중요한 것으로 다뤄지며 사천왕의 용맹과 십이지신의 존재가 부각된다. 명랑은 천문기상 등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인물임이 짐작된다.

명랑법사가 문두루 비법으로 활동한 이 기간은 신라가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670~676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에는 실제로 있었던 나당 간 중요 전투 두 개가 기록돼 있다. '675년(문무왕 15년) 9월 (한탄강 부근 경기도 연천 일대의)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은 당나라 이근행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패주 시켜 말 3만여 필과 병기를 노획했다' 하고, 676년(문무왕 16년) 11월에는 지금의 금강 하구인 기벌포에서 22번의 전투 끝에 당나라 설인귀의 수군함대를 대패시켜 결정적인 대당전쟁의 승리를 가져왔다고 한다. 기벌포는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치기 위해 만났던 장소이기도 하다.

대당전쟁은 한두 명의 장수나 한 가지 전략만으로 단순하게 된 것은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수많은 군사, 장수, 무기, 전략, 물자의 동원과 함께 후방에서 민심을 통제할 구심점도 있었을 것이다. 명랑이 실제 있었던 매소성과 기벌포 두 전투와 직접 연관이 있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지만, 기상천문에 능한 그의 능력으로 당나라 적을 제압하기 위한 행동을 사천왕사에서 베풀었음이 분명하다. 두 전투의 배경은 임진강, 한탄강, 금강이었다. 기상변화와 풍랑이 중요변수가 되는 전장이기도 하다. 결과는 승리로 나타났다. 휘하를 이끌고 기상을 예측한 명랑법사도 전쟁의 중요한 리더였음이 분명하다.
명랑법사의 동네와 우물 흔적이라도 보고 싶어 경주로 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대당전쟁이 마무리된 뒤 문무왕 19년(679)에 완공된 사천왕사도, 또 사천왕사를 감추기 위해 그 옆에 지어진 망덕사도 오늘날에는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발굴에서 드러난 심초석 돌은 우람하며, 비석을 등에 지고 있던 거북 돌 조각은 살아 있는 무인 같은 기상이 넘친다. 양지스님의 가장 훌륭한 사천왕 조각도 이 절터에서 출토됐다.

▲ 남간사지 석정의 본래 모습. ⓒ이순희

▲ 문화재보호 조치가 취해진 2013년의 남간사지 석정. 고대 우물의 오래된 면모가 가려져 버린 듯 아무 느낌도 나지 않는다. ⓒ이순희

남간마을엔 '남간사지 우물'이 하나 있다. 명랑스님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의 동네에 오래전부터 있는 우물임은 틀림없다. 골목을 한참 왔다갔다하다가 동네 공터에서 오래된 우물 테두리 돌을 보았다. 두 개의 돌을 상석처럼 이어 붙이고 지표에서 한 10센티미터쯤 위로 솟은 돌 우물인데 자그마했다. 문화재보호를 위해 옛 우물 위에 큼직한 돌을 덮고, 그 위에 또 스테인리스 구조물을 얹어 옛우물의 면모는 가려져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아직도 우물 물이 고인다고 말했다.

그 당시 우물에 들어갔다가 나오곤 하던 신공을 가진 사람으로 명랑스님 외에 혜공스님도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대 인물이었다. 이 시대 신라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듯한 이들의 일화 중 하나는 혜공이 그가 살던 절인 부개사 우물 안에 들어가 몇 달씩이나 나오지 않다가 어린 동자가 먼저 솟아나와 기다리면 뒤이어 우물에서 솟구쳐 나왔다고 한다. 이상한 것은 물속에서 나왔는데도 옷이 젖지 않고 말짱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문무왕 때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한 날 혜공이 오지 않았었는데, 다른 사람 아닌 명랑이 기도를 하니 혜공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왔다고 한다.

명랑법사는 우물에서 황금 1000냥을 얻었다. 기록엔 용왕이 보시한 것이라고 한다. 우물 연구자인 김현희 김해박물관 학예사는 이를 명쾌하게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우물은 고대에서 근대까지 귀중품의 비밀 저장소이기도 했다. 비상시에 귀중한 물건을 던져넣었다가 후일 꺼내 갈 수 있다. 명랑법사가 얻은 황금 1000냥은 제사 등으로 우물 속에 그만한 황금을 넣어뒀다가 꺼낸 것일 수 있다. 우물은 도교적으로 용왕이 살고 있는 바다와 통하며,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를 상징해왔다. 우물에서 얻은 황금은 따라서 용왕이 준 황금이라고 해석하기에 무리가 없다. 용왕이 물 속에 살아도 옷이 물에 안 젖는 것처럼, 명랑법사와 혜공스님도 우물을 통한 다른 세계에 다녀온 것일 수 있다."

근래까지도 우물에 귀중품을 던져넣었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1300년 만에 발굴된 백제의 용봉금동대향로 또한, 백제 패망시 적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우물에 던져넣었던 것이라고 들었다.

김현희 학예사는 "명랑법사는 풍수와 천문기상에 능한 전략가였을 수 있다"며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이 그러했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용왕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명랑이 속한 불교종파는 도교적 영향이 많다"고 봤다. 학계는 그의 신인종이 이적을 중시하는 밀교의 강력한 종파였다고 말한다.

명랑법사의 영향이 미친 또 하나의 절을 보았다. 울산 방향 외동읍 모화리에 있는 원원사(遠願寺)는 금광사와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문두루 비법의 중심도량이었던 사찰이라고 한다. 명랑의 후계자인 안혜·낭융 스님과 김유신·김의원·김술종(죽지랑의 아버지) 등 국사를 논하던 중요 인물들이 뜻을 모아 세웠다. 명랑의 시대이기도 했다.

지정학적으로 원원사는 대단한 호국사찰의 지세에 세워졌다. 머리를 깎고 들어온다는 뜻의 모화란 지명은 불교국이 된 서라벌로 들어오는 관문을 말한다.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울산에서 경주까지 15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 중간에 경주의 최남문 관문성이 세워졌다. 주로 왜구를 경계한 것인데, 바다에서 들어와 왕도인 경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을 일차 검열하는 것이다. 관문산성이 있는 모화에서 보면 이 산속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원원사는 이곳에 매복의 군사기능을 가진 사찰로 존재했다.

원원사 터에는 계곡을 끼고 리어카 하나 다닐만한 길이 1킬로미터 가량 이어지는 옛길이 있다. '김유신이 말 타고 다니던 길'이라고 부르는데, 계곡이 끝나는 능선에서 석굴암이 보이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지금은 등산로로 이용된다. 석굴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바로 바다에 면해있는 장항사도 호국사찰의 지세이다. 산 넘어가 바로 감포이고 여기엔 동해 호국용이 되리란 문무왕의 수중릉이 있다. 기림사도 그러하다. 여기는 온통 호국의 이름으로 자리 잡은 절들이 있어 서라벌을 위호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는 배신자가 있어 원원사의 존재를 왜군에게 알려주는 바람에 왜군이 가장 먼저 이곳을 쳤다고 한다. 원원사가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원원사의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삼층석탑 2기. 한가운데는 연꽃 모양의 석대가 있다. 원원사의 옛 흔적 중 하나이다. 1930년대에 부서진 것을 맞춰 세워놨다. ⓒ이순희
원원사 옛터에는 대웅전 터 앞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삼층탑이 동서로 나란히 2기가 남아 있다. 1930년대에 일본 교토대 고고학교실 조수 노세 우시조(能勢丑三)가 석탑을 지금의 모양으로 복원했다(보물 1429호). 다른 유물에 대해서는 알려져있지 않다.

이 과정을 재일 한국인 연구자인 가종수(賈鍾壽) 일본 슈지쓰대 대학원 교수가 최근 공개했다. 12지신상이 새겨진 탑이 사천왕사, 그리고 김유신묘와 상통하는 무사적 느낌을 준다. 문두루 비법에는 적어도 12지신의 방위개념이 같이 등장하는 듯하다. 절 뒤 계곡에 범어가 새겨진 것 등 4기의 부도가 있는데 고려 때 것으로 추정한다.

이 탑에서 좀 떨어져 대웅전 터 왼쪽에 용왕각이 있다. 큰 네모 돌확에 고이는 우물이 있고 그 위로 지붕을 겸한 보호각처럼 전각이 세워졌다. 1980년에 경주인근 신도들이 시주해 건축한 것. 수도가 나오기 전 여기서 나오는 물은 과거 전각 앞 돌로 된 수로를 거쳐 흐르게 해 또다른 커다란 돌확에 받아서 썼다. 수로에는 길게 홈이 패어져 물이 흐르는 길 역할을 하게 했으며 중간 두군데에 웅덩이가 파여 있다. 산에서 솟아나는 물은 이 과정에서 잔돌 같은 부유물이 걸러져 어느 만큼 자정된다. 3미터 가량의 수로는 원원사지 폐허에 그대로 남아 있던 것이라 한다. 수로 끝에서 물을 저장하던 큰 돌확은 씀씀이가 없어져 10미터 떨어진 대숲 안으로 치워놓았다.

옛 원원사 대웅전터 앞에 1970년대에 영호스님이 새로 천태종소속의 절을 건립해 원원사로 부르는데, 2대 주지 현오스님은 이 우물을 두고 "신라 때부터 용왕님이 다니시는 우물입니다. 특별한 곳입니다"라고 했다. "이절 창건에 관여한 명랑법사께서 스승으로 섬기던 용왕이 다닐 물길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생각합니다"라는 것이다.

어느 절이나 용왕각은 있지만 두 군데 웅덩이를 거치며 흐르는 수로를 낸 우물은 처음 보았다. 1500여 년 전의 자정과정을 보여주는 우물로 보였다. 지금은 호스를 땅 밑으로 연결해 전각 안에 고이는 물을 끌어다 아래쪽에 건축한 절의 생활 용수로 쓴다.

▲ 원원사 옛 절터 대웅전 왼쪽의 용왕각. ⓒ이순희

▲ 1980년 신축한 용왕각 전각 안에 돌확 우물이 보이고 바깥쪽에 오래된 돌 수로가 보인다. 두 개의 웅덩이가 패여 있고 수로 끝에는 큰 돌확이 있어 물을 저장했는데 근래 치워졌다. 경주의 우물 중 이런 수로를 갖춘 우물은 여기서만 보았다. ⓒ이순희

▲ 용왕각 우물과 수로를 설명하는 현오스님. 우물 물은 이제 이 돌수로를 통해 흐르지 않고 땅밑으로 호스와 연결돼 아래채 건물의 생활 용수로 쓰인다. ⓒ이순희
이 우물을 울산-포항 간 전철 노반공사를 하던 대림산업 터널건축담당 전광규, 터널설계자 박재원 씨와 함께 보았다. 전각 안 돌확은 깊이가 1.2미터나 됐다. 우물의 칫수를 재던 전광규 씨가 주변 상황을 말했다.

"이곳은 땅에서 솟아나오는 1급수 물이 있는 상수도 보호지역입니다. 수로나 돌확의 돌은 주변의 원원사 오래된 주춧돌과 같은 재질로 보입니다. 물은 200미터만 흘러가면 스스로 자정되지요. 지금 같은 정화시설이 없던 옛날 이곳에선 샘에 수로를 잇대어 놓음으로써 물이 웅덩이를 거쳐 가는 동안 정화된 물이 큰 돌확에 고이게 해 썼을 겁니다."

우물 안 전각 벽면 세 곳에는 용왕님 두 분과 무신 하나가 그려져 있다. 명랑법사의 우물이야기는 경주 전역에서 거의 잊힌 듯하고 원원사에서도 주지스님만이 그의 존재를 원원사의 근원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전각 한쪽은 용왕에게 빌어 태어난 사람들의 복을 비는 인등이 가득하다. "정월대보름날이면 용왕님께 공양을 드리는 의례를 가진다"고 스님은 말했다.

우물은 원래 대웅전 좌우에 두군데 있었다. 오른쪽 우물은 버려진 터만 남았다. 옛날 난리때 금불을 여기 우물에 집어넣었다가 꺼냈다고도 한다.

▲ 산에서 솟아난 물이 고이는 원원사 우물. 전각 안에 용왕님(오른쪽)과 장군신상이 그려져 있다. 1980년 건축되었다. ⓒ이순희

하지만 지세와 우물과 십이지신 삼층쌍탑 만으로도 이곳은 특별해 보였다. 아직 본격적인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0년대에 새로 지은 천불보전 앞은 원래 밭이었는데 불국사의 석단과 구조가 같은 석축 55m를 새로 쌓았다. '1978년 1월 28일 이동우가 쌓음'이라는 팻말이 있다. "여기 돌축대는 불국사 석축을 본떠서 내가 쌓았어요"라던 그는 불국사 복원공사 때 석축공사에 참여했던 인물로 그때의 경험을 살린 것이다. '불국사 석단의 원형이 이곳 원원사 석축'이라는 한 전문가의 주장은 연대의 전후가 바뀐 것으로, 이동우란 인물을 간과한 데서 온 주장이다.

▲ 신라시대 절 원원사 옛터 아래 요즘의 절 원원사. 불국사 복원공사에 참여했던 모화사람 이동우 씨가 1978년 불국사 석단을 본떠 소박한 돌축대와 층계, 연못을 신축했다. ⓒ이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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