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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탈해의 토함산 요내정 우물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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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탈해의 토함산 요내정 우물은 어디인가

[김유경의 '문화산책'] <32> 경주의 우물 ③

신라 석 씨 왕계의 시조 탈해왕도 우물이야기를 남겼다. '토함산(동악(東岳)이라고도 부른다)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탈해에게 줄 물을 떠오다가 먼저 마셔버린 사람 백의에게 각배가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다가 탈해가 꾸짖고 백의가 맹세한 뒤에야 떨어졌다. 지금 동악의 산속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사람들이 요내정(遙乃井)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신라우물세미나 발표문 '신라왕경의 우물제사'에 "이 우물물은 토함산에 있는 요내정인데 각배(角杯, 짐승의 뿔로 만든 잔)에 떠 담은 물은 일종의 성수(聖水)였을 것이다. 물을 다루는 고대 왕자의 풍모가 잘 드러나는 광경이다"라고 썼다. 각배라고 하는, 근원이 먼 곳일 것 같은 각배가 석탈해의 일화에 나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고 한다.

▲ 토함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경주 시내. 석탈해가 경주에 처음 들어와 '정탐'한 반월성 부근 능선도 이 모습대로였을 것이다. ⓒ이순희

역사기록에 나오는 석탈해는 경주에서 태어난 인물이 아니고, 동해를 통해 신라 땅에 들어와 경주로 진출하고 결국은 왕의 사위가 되어 정치적 기반을 닦아 신라왕계를 이어간 야심가였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서기 43년 가락국에 먼저 들러 수로왕을 내쫓고 왕위를 차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망쳐 계림의 신라 경계로 스며들었다고 한다. 어떤 학설은 석탈해 관련 언어를 분석해 그가 인도 철기문화권에서 온 사람이라고도 한다.

이후,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황옥(황옥이라는 명칭은 유리공예 중 가장 정교한, 금으로 물린 유리구슬을 말한다)이 가야국에 도착한 것 등 경주신라와 가야에는 인도 아라비아 등으로부터의 인물 유입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시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상상력은 무궁무진해진다.

석탈해왕은 경주에서도 유별나게 토함산(해발 745m)과 관련이 깊다.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 이와 관련된 기록 4개가 전한다.

▲ 토함산에 오르는 길. 관광객들이 다니는 큰길에서 벗어나 등산객들이 주로 애용하는 길이다. ⓒ이순희
첫 번째는 그가 동해를 통해 경주에 들어온 직후 토함산에 올라가 돌집을 쌓고서 산 아래 경주를 살펴보다 반월성터를 점찍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집터의 원주인 호공의 집에 철기 다루는 족속임을 말해주는 숯돌을 몰래 묻어놓아 대대로 내려온 대장장이 집안이라고 하면서 그 터를 빼앗아 자리 잡았다. 철기 다루는 족속의 힘을 가진 그는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이어서 4대 신라임금이 된다. 박 씨 아닌 타성으로 바뀌는 역사의 변환점이 보이는 장면이다.

두 번째 기록은 왕이 되기 전인지 후인지 확실치 않으나, 토함산 요내정의 우물로 지배능력을 보였다는 위의 내용이다. 세 번째는 왕이 되어 재위 3년 음력 3월 토함산에 오르니, 검은 구름이 양산처럼 머리 위에서 오래 흩어지지 않았다. 이 두 가지는 그가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모두 토함산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마지막 네 번째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그가 죽어 처음엔 다른 데 장사를 지냈지만, 680년 문무왕의 꿈에 나타나 '나의 뼈로 뭉쳐 만든 상을 토함산에 세워두라'라고 하였다. 문무왕의 이 말을 따라, 산 정상에 탈해사당을 세우고 그를 토함산신, 즉 동악신으로 삼았다.

석탈해가 마신 토함산의 물, 요내정의 위치가 여기서 논란이 된다. 이에 대해는 2004년 장충식(단국대) 논문과 2008년 최민희(화랑중, 서라벌대)의 논문이 주장하는 두 가지 설이 나와 있다.

장충식은 '한국불교미술연구'에 실린 논문 '토함산 석굴의 점정과 배경'에서 1933년도 발행 '경주읍지'에 나온 '석굴암 아래 있는 유물은 이른바 약수요. 그 물맛은 맑고 시원하며 석굴 내 석불 대좌 아래에서 굴 밖으로 용출하는데, 이를 요내정이라 한다'는 구절을 인용해 '지금의 석굴암 감로수 우물이 요내정'이라 단정한다.

그에 의하면, 요내정이란 '예네 우물(濊家井)'을 말한다고 한다. "즉 석탈해 '昔' 자는 그 訓(훈)인 '예(濊, 종족 이름 예)'의 표음자(表音字)로서('昔' 자의 뜻이 '옛'이라는 말), 탈해는 예계(濊系)의 수장이라는 것"이다. 이 논문은 석굴암이 건립된 배경을 주제로 다루고 있으며 감로수 우물은 석굴암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할 수 있는 의지처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 2013년 여름 석굴암 아래 감로수 우물 전경. 장충식은 석탈해왕이 떠 마신 요내정 우물은 지금 이곳이라 한다. 그러나 이 우물은 1910년대 석굴암 보수공사 중 석굴암 내부 12면 관음상 뒷벽의 용출수를 수도관을 묻어 끌어내며 생긴 것이라는데, 그 이전엔 형태에 대한 조사가 없다. ⓒ이순희
그런데 석굴암 굴에서 용출되는 물은 11면 관세음이 서 있는 자리 암벽에서 많은 수량으로 솟아나기 시작한다. 이 지하수 처리는 1913년 일제가 석굴암을 보수할 때도, 1961년 황수영 박사가 석굴암을 중수공사 할 때도 문제가 되었다. 신라시대에는 아무 문제 없었던, 천년 넘게 굴속에서 지속돼온 용출수와 석굴암 내부를 잠식하는 습기 간의 역학관계가 현대에 와서 규명되지 못했다.

1961년의 중수공사 때 결국 용출수가 솟아나는 12면 관세음 뒤편 암벽은 파괴되어 물은 다른 방향으로 돌려내게 되었다. 이를 두고 장충식은 '당시의 기술로서는 최적의 방법이었을지 모르나 8세기 석굴암 건립 당시의 용출수 문제에 대한 신라인의 대처방식이 충분히 검증되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썼다.

(암벽에서 물이 솟아나오는 자리에 석굴암 관세음보살이 서있다는 사실은 뱃사람과 어부들의 수호자이기도 한 관세음의 위상을 떠올리게 한다. 석굴암 11면 관세음이 선 자리는 용출수와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은 고려시대 양유관세음도 연구를 통해 이런 사실을 자세히 밝혔다. 조선시대 김홍도의 관세음도 또한 바다 파도 위에 있는 모습이다.)

장충식은 이어 문무왕이 석탈해의 뼈로 만든 상을 다른데도 아닌 토함산에 안치해 동악의 산신으로 만든 것은 문무왕이 죽어 동해구에 장사를 지내면서 그 자신이 바다의 신, 용이 되어 국토를 수호하는 것과 동일선상의 배려라고 했다. '고대 사회에서 뼈의 주술적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했다. '신라의 신분 제도가 뼈에 근거한 골품제도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한 존 코벨의 지적도 같이 떠오른다.

▲ 왼쪽 사진은 '요내정에 대한 또 하나의 주장', 포수 우물로 가는 길이다. 좁은 길이고 산비탈이 이어진다. 오른쪽 사진은 포수 우물의 2013년 12월 모습이다. 최민희는 이곳이 석탈해가 마신 요내정이었다고 추측한다. 수량은 감로수보다 적으나,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나온다. 지금의 헬리포트에서 200m가량 떨어져 있다. 경주시내로 흐르는 알천의 발원지이다. ⓒ이순희

▲ 1990년대 중반 포수 우물로 불리는 토함산 정상부근의 약수의 형태. ⓒ최민희

그러나 석탈해가 물을 마신 요내정에 대한 2008년 최민희의 '석탈해왕의 토함산 요내정(吐含山 遙乃井)에 대한 고찰'(<비화원> 제8호, 안강문화연구회)은 장충식과 다른 주장을 편다.

그는 토함산 정상 조금 못 미쳐 헬리포트(헬리콥터 발착장)에서 200m가량 떨어진 곳 산비탈의 약수(포수 우물)가 석탈해가 마신 요내정이라고 추정한다. 포수 우물은 근래 들어, 등산객들이 붙인 이름이고 지금도 한줄기 약수가 돌 틈 산비탈에서 흘러나온다.

경주에 살면서 현장에 밝은 그의 경주 관련 논문 10여 편 중 하나인 토함산 요내정에 대한 고찰은 탈해왕의 토함산 관련 흔적들과의 유기적 관계에서 살펴보고 있어 토함산을 구석구석 뒤져가며 보는 듯하다.

높이 745m의 토함산은 산자락에서 정상에 이르기까지 군데군데 약수가 있다. 오동수, 동산령 참물래기 약수, 석굴암 감로수, 그리고 정상 부근의 포수 우물이 대표적이다. 산자락의 오동수 우물이나 동산령 참물래기 약수는 동네 가까이 있는 것이니, 산중 요내정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 최민희의 논문이 석굴암 감로수 또한 요내정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유는 3가지이다.

첫째, 석굴암 감로수 우물은 1913년 일제가 석굴암 안의 용출수 물을 굴 밖으로 끌어내며 생겨난 것이란 점이다.(장충식의 논문은 이 점은 언급하지 않고, 1933년의 기록만 인용했을 뿐이다. 최민희의 논문은 1913년에 생긴 감로수 우물임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 이전 석굴암의 용출수가 어떤 형태로든 석굴암 밖에서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1913년 이전의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관세음의 뒤편 암벽에서 솟아나오는 이 용출수는 대종천과 감은사 앞으로 해서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바다에 이른다.

두 번째는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던 시기에 이미 석굴암이 있었다. 그렇다면 요내정의 위치를 '산중에 한 우물이 있으니'라 하지 않고 '석굴암 앞에 있는 우물'이라고 사관으로서 기록했을 터인데 그렇지 않으니, 이는 요내정이 아니란 것이다.

세 번째는 '토함산에서 돌아오다가'라는 기록으로 보아 요내정은 토함산에서 경주로 바로 들어오는 경로에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포수 우물은 석굴암 감로수우물보다 훨씬 최단거리로 토함산에서 바로 경주로 들어오게 되는 자리이다. 토함산 540m 높이의 석굴암과 745m 토함산 정상 사이에 위치한 포수 우물은 탈해사당에서 헬리포트 지나 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곳에 있다. 감로수보다 수량은 적지만 경주에서 가까운 코스로 다녀올 수 있고, 석굴암은 경주에서 멀다는 점에서 최민희는 이곳이 '토함산에서 돌아오다가'라는 기록과 더 맞는다는 점을 들어 이 포수우물을 요내정으로 보고 있다.

포수 우물의 물길은 경주 알천으로 흘러드는 발원지라고 한다. 석굴암 용출수가 동해로 흘러드는 것과 함께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 이 논문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 토함산 정상 부근 헬리포트 윗부분 억새밭이 석탈해왕을 토함산신(동악신) 삼아 그의 뼈로 만든 상을 안치한 탈해사당이 있던 곳이다. 조선 시대의 봉수대 자리로도 보고 있다. ⓒ이순희

▲ 탈해사당 터 주춧돌 사진 ⓒ최민희
그의 논문은 석탈해의 토함산 유적에 대해서도 상세한 기술을 했다. 탈해가 처음 토함산에 올라 석총을 쌓고 7일간 머물며 경주를 살펴봤다는 자리에서는 경주분지와 반월성, 해안선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엔 지금도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탈해는 여기서 단을 쌓고 뭔가를 했던 것 아닐까한다.

탈해의 뼈로 만든 상을 모신 탈해사당은 헬리포트 위쪽 지금 억새로 뒤덮여 있는 곳이다. 탈해사당의 존재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까지는 나오고 <동경잡기>(1669년)에는 '폐허가 되었다' 한 것으로 미루어, 1530년대에서 1660년대 사이 폐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건물 터 주춧돌이 남아 있고, 안산암 전돌과 수많은 기와 조각들이 발견된다. 얼마 전 글자가 있는 기와 조각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포수 우물은 탈해사당에서 소용되는 물의 공급원이었으리라 추측한다.

최민희는 '석탈해가 동악신이 된 것은 서악인 선도산에 서술성모라는 여신이 모셔져 있는 만큼 기골이 장대했던 석탈해왕의 뼈로 동악인 토함산의 산신을 삼아 조화를 갖추는 것'이라 보았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그가 3자 키에 머리둘레가 1자였다고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탈해왕의 골상이 특이하고 몸의 뼈는 9자 7치, 머리뼈는 3자 2치나 되는 아주 힘센 역사(力士)의 골격이었다고 한다.

▲ 경주시 동천동의 석탈해 왕릉. 석 씨들이 이 무덤을 석탈해 왕릉으로 정하여 제사지낸다. 1974년에 도굴되었다. 경주의 특징적인 굽은 소나무가 감싸고 있다. ⓒ이순희

현재 알려진 석탈해왕의 무덤은 경주시 외곽 동천동 솔숲 안에 있다. 유골을 토함산에 두고 능도 만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20세기 들어 석씨 후손들이 이 무덤을 석털해왕릉으로 정하고 보살핀다. 1974년도에는 도굴까지 당했다.

처음엔 단순해 보이던 석탈해왕과 요내정 이야기가 장충식·최민희 두 사람의 논문을 보고 이야기 듣는 것만으로도 동해와 토함산, 석탈해, 석굴암 용출수, 문무왕 등 이런 역사의 고리를 꿰어 가는 것 같아 흥미진진했다. 우물 하나를 통해 역사의 바다에 흘러간 느낌이 들었다.

막상 경주 토박이들도 토함산 포수 우물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산 높은 곳의 비탈길, 이정표도 별로 확실치 않은 자리의 포수 우물을 찾아가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경주에서도 이렇게 사람 손을 안 타고 감춰진 곳이 있다는 것이 좋기도 했다. 최대 관광지라 해도 한발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관광객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 때문에 경주산책이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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