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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의 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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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의 나정

[김유경의 '문화산책']<29> 경주의 우물①

경주에서 워낙 유명한 불국사나 석굴암, 첨성대, 대릉원 같은 유물을 돌아본 뒤에는 그 뒤에 가려져 있는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물이 그중 하나였다.

경주의 우물에선 왕들이 태어나고 용이 넘쳐나고 용궁으로 통하며, 역사적 인물과 얽힌 이야기가 많다. 지난 5월 열린 신라우물 세미나에서 김현희 김해박물관 학예사는 '지금까지 발굴된 삼국시대 우물은 260개이고 그중 경주에만 210개 우물이 있다'고 발표했다.

지금도 경주에는 탑동 식혜골의 400년 된 김호 장군(임진왜란 때 활약한 무장) 옛집과 향교에 오래된 우물이 있고 쪽샘 동네에도 최근의 관광용 거북조각이 얹혀 있긴 해도 우물이 있어 옛날처럼 물을 마실 수 있다. 월성, 황룡사, 분황사, 인용사, 포석정에도 신라의 옛 우물이 있다. 경주박물관에는 현재 쓰이지 않는 경주 일대 우물의 테두리 돌들을 거둬다 펼쳐놓은 것이 10여 개 있다. 이런 것들이 경주의 오랜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경주에 끌리는 것은 이런 것들이 밀집되어 있는 정경 때문이기도 하다.

▲ 경주박물관에 뒤뜰에 놓인 경주의 오래된 우물 테두리 돌. 통돌을 원형으로 속을 파낸 것부터 두세 개를 이어붙이고 둥근 선을 새긴 것 등 조각품들이다. 경주 곳곳에서 안 쓰게 된 우물돌을 가져다 둔 것들이다. ⓒ이순희

경주에 처음 등장하는 역사적 우물은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의 나정과 그의 비 알영부인의 알영정이다. 혁거세왕 이후 석탈해왕, 원성왕 등의 행적에도 우물이 따라붙는다.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신라사회에서 우물이 지닌 함의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건국신화에서 왕의 등장, 즉위와 관련해서이다'라고 말했다.

박혁거세의 탄생지인 '양산 아래 나정'은 서남 산자락 논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양산은 '버들메'라는 뜻으로 물이 많은 지역임을 암시한다. 나정의 나(蘿)자는 넝쿨이란 뜻이다. 넝쿨우물?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름이다. 신라의 역대 임금들이 즉위하면 박혁거세의 사당을 세워둔 이곳에 바로 찾아와 제사를 올렸다. 사당을 신궁이라고 불렀다. 발굴로 드러난 팔각건물터는 이 신궁자리라고 한다. 그만큼 신격화시킨 '왕의 장소'라 그 터전이 지금까지 건물 같은 것에 깔려버리지 않고 남아있나 보다.

▲ 2004년 발굴이 끝난 나정 전경. 소나무로 둘러싸인 2220평(7328평방미터) 가량의 터 안에 신궁터 8각 건물지, 우물, 배수로 등이 확인됐다. 주변은 현재 논이 많은 한적한 동네로 초기의 왕궁터인 창림사지와 면해 있다. ⓒ중앙문화재연구원

서기전 69년(단기 2264년) 봄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난 잘 생긴 아기가 무슨 사연인지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요람 같은 큰 바가지에 담겨 물의 지배권을 상징하는 이곳 서남산 아래 우물가에 놓였다. 소년은 세력자들의 비호 아래 크며 예쁜 아가씨를 맞아들이고 국가를 이루어 왕이 되고 뒤를 이을 왕자를 낳고 오래 살다 여러 성씨 세력들의 권력쟁탈을 앞두고 사망한 이야기. 그렇게 신라 경주의 첫 시작이 이해되었다.

경주의 왕가와 알과의 밀접한 연관은 천마총 발굴에서 큰 철제 솥 안 토기 속에 달걀 20여개가 물에 잠긴 채 파괴되지 않고 들어 있다가 고스란히 나온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그 토기와 달걀의 존재는 경이로웠다. 경주의 시작은 그렇게 강력한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달걀. 큰 쇠솥 안에 담긴 토기 속에서 물에 잠긴 채 20여 개 들어 있었다고 한다. 경주 신라에 유독 많은 알 혹은 박에 담겨 있던 인물들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이순희

2004년 발굴을 끝낸 나정 현장에서는 기단 한 변이 8m인 팔각형의 건물터 외에도 본래의 우물 자리 몇 군데, 배수로, 679년의 기왓등이 확인되었다. 기와에는 주칠이 되어 있었다. 91평(300제곱미터) 넓이의 팔각형 건물터 부분은 주변의 터보다 약간 높게 돋아있다. 게시판의 설명은 발굴 결과를 말해주고 있지만 나정은 지금 무성한 풀에 파묻혀 팔각형 터도 우물자리도 구별되지 않는 텅 빈 공간이다. 1803년 조선 순조 때 우물 옆에 세운 유허비는 한구석에 갓머리도 내동댕이쳐진 채 돌덩이들과 섞여 있다. 우물터, 흰말, 왕이 될 어린아이를 떠올릴 어떤 자취도 없다.

그런 현장이지만 박혁거세가 태어난 우물이 있는 곳, 백마와 함께 등장한 곳이란 사실은 역사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물을 다스리는 지배자의 능력과 말을 대동한 왕자의 혈통을 동시에 시사한다.

중앙문화재연구원은 발굴보고서를 통해 "유허비문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이곳은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관리되어 사당의 재축조와 더불어 우물이 복토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추정은 발굴조사에서 확인된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장에서 일반인의 눈으로 1803년의 유허비가 기록해 놓은 나정의 역사와 모습을 쉽게 알고 싶다.

'역사의 땅 경주' 저서를 남긴 고(故) 최용주 신라문화동인회장의 글은 경주에서 오래 살아온 지식인의 눈으로 경주 곳곳의 신라역사를 기록해놨다. 그것은 역사 넘어 경주 땅의 호흡을 전해주는 것이다. 경주사람이 본 오래 전의 나정과 그 주변지형이 어땠는지도 나와 있다.

"알천에서 남쪽(정확히는 남남서)으로 약 6km 지점에 있는 나정에 가보면, 보호각 비석 뒤에 길고 넓적한 장대석으로 우물이 덮여 있다. 눈이 많이 온 겨울에 가 보았더니 장대석 위에 둥글게 눈이 녹아 돌만 드러나 보였다. 이것은 겨울에 우물물의 더운 기운이 위로 치솟아 올라온 증거임에 틀림없었다. 나정이 있는 곳은 둘레의 땅 높이보다 조금 높다. 그런데도 수량이 많은 우물이 있는 것에 주목해 볼 일이다. 예전에 장대석을 들어보니 물이 쪽박으로 풀만치 높이 찼더란다."

서기 전 69년 음력 3월1일 경주의 육촌장이 모여 나정에서의 박혁거세 등장을 목격한 장소는 경주의 상징 알천(북천)의 언덕이다. 신라의 건국을 처음 의논한 장소가 하고 많은 곳 가운데 왜 알천이었을까? '대수롭게 봐 넘길 일이 아닌 것이다'라고 그는 썼다.

물길이 흐르는 냇물 언덕에서 음력 3월의 봄에 마을 지도자들이 모여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논에 물 대는 일을 의논하는 것"이라고 한평생 농사만 지어온 할아버지들이 보편적으로 말한다. '가래나 삽을 들고 개울바닥에 퍼질고 앉아 봇도감을 뽑고는 봇갓(보에 필요한 나무를 베기 위해 공동 관리하는 산)을 쳐서 보를 수리하는 일, 봇도랑을 깊이 파는 일 등을 진지하게 의논하던 모습'은 농사일을 해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광경이라고 최용주는 짚어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땅과 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의논이었다."

혁거세왕의 비 알영 또한 우물의 계룡에게서 태어나 알천에서 목욕하니 허물이 벗겨져 예쁜 여아의 모습을 갖췄다. 알천은 그 후에도 남해왕 때(서기 14년) 낙랑군이 쳐들어왔다가 물러나며 진을 친 자리이고, 5대 파사왕(94년), 7대 일성왕(138년), 10대 내해왕 때(200년)는 이곳에서 군대열병을 크게 실시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8대 아달라왕 때는(160년) 홍수가 져서 집이 떠내려가고 대궐 북문이 허물어졌다.

신라 후대에도 알천은 홍수로 인해 대궐로 제때 들어오지 못한 경쟁자를 제치고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게 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알천은 자주 범람했기에 둑을 고쳐 다시 쌓기도 했다.

최용주는 '그렇게 알천은 옛날부터 중요하면서도 다스리기 어려운 물줄기였다'고 경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지금에 와서는 북천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부르지만, 알천이라는 옛 이름도 잊히지 않고 있다.

이 알천 지역을 지배한 양산촌장 알평공의 박에서 싹이 나와 넝쿨이 바위를 덮었다고 한다. 넝쿨우물(나정)이란 이름은 그런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 나정과 박혁거세는 경주 알천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갓머리도 떨어진 박혁거세 유허비와 중요한 돌덩이 등이 나정터 한구석에 모여 있다. 나정터에 가서도 풀이 무성해 어디가 우물터인지 팔각신궁건물터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이순희

텅 빈 나정의 터 한가운데 우물자리에서 알천의 존재와 박 덩쿨의 희미한 이야기라도 되새겨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7월 경주의 한 거리에서 '넝쿨 매운탕' 간판을 보았는데 그것이 나정을 의식한 이름일는지 궁금했다. 아니라 해도 안 본 것보다는 반가웠다.

박혁거세왕 재위 60년인 서기 3년(단기 2336년) 음력 9월 '용 두 마리가 금성의 우물 가운데 나타났는데, 우레가 울고 폭우가 쏟아지며 궁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고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 그의 사후 왕권이 석 씨, 박 씨, 김 씨 간에 각축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혹자는 용의 등장을 '권력투쟁이 암시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왕은 그 다음해인 서기 4년 3월에 사망했다.

혁거세왕 초기의 왕궁터인 창림사지도 나정 바로 옆 들판에 있어 발굴이 진행되었다. 이곳은 완만한 구릉이 있는 경주 서남산 아래 벌판이다. 왕의 능 또한 이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 알영정이 있는 오릉에 있다.

▲ 박혁거세 당시의 왕궁터로 알려진 경주 서남산 가는 길, 나정 옆의 창림사지. ⓒ이순희

아들인 제2대 남해왕 3년에 시조 혁거세의 사당을 세워 사계절로 제사하고, 여동생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케 했다. 제22대 지증왕에 이르러서는 시조 탄강의 땅인 나을(나정을 말함)에 신궁을 중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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