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위로 알영의 위상에 걸맞는 테두리돌이 둘려 있진 않았을지, 우물의 깊이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 원래는 쪽박으로 물을 떠내는 고대의 옹달샘이었을지 모른다. 2천년전의 이 우물은 나정과 함께한 분명한 우물자리인 것만으로도 벅찬 느낌이다.
▲ 경주시 탑동 오릉 안 알영비각 뒤의 알영우물. 장대석 3매를 연이어 막아놓았다. 그 아래 옹달샘이 있어 물이 약간 보인다. 무엇을 구성하던 것인지 큼직한 석재들이 한구석에 있다. ⓒ이순희 |
그런데 역사와 일치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는 알영을 기리는 비를 보호하는 비각건물만 크게 두드러질 뿐, 실제 우물에는 아무 표시도 없다. 주의해 보지 않는다면 우물인지 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비각앞 건물 숭덕전 안에 알영정이라고 쓴 큼직한 바윗돌이 커다란 연못옆에 설치돼있어 자칫 이 연못을 알영정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오릉은 월성터(5만5000평)보다 더 넓은 5만8000평 면적에 펼쳐져 있다. 알영우물은 그 오릉 숲속 외진 자리에 위치한다. 하지만 경주를 이해하는 단어 '알'자가 들어있는 자기이름을 지닌, 신라사에서 유일하게 탄생의 상징우물을 지닌 여성이자 박혁거세를 왕으로 만들었으며 성인으로 일컬어진 역사기록 등으로 보아 그녀의 존재는 단순하지 않다.
▲ 김홍석작 '타원형의 대화'. 플라스틱으로 둥근 구형을 제작, 누르면 알에서 태어난 동서양 인물들의 이야기를 음향으로 들려준다. 포항제철역사관 소장. ⓒ최경주 |
어느 국가나 권력의 원천은 철의 확보였다. 알영이후 석씨왕조를 연 석탈해와 김씨왕조의 조상 김알지 등은 철이나 금으로 상징되는 역사를 지녔다. 경주근방은 지금도 포항제철로 상징되는 철의 고장이다.
미술가 김홍석이 2000년 파란색 알모양의 조형물을 만들어 베니스 비엔날레를 통해 발표했다.
"플라스틱을 써서 예술언어에서 완전함을 뜻하는 둥근 구형을 만들고 누르면 알에서 태어난 옛 사람들의 역사가 영어번역된 음향이 들려나오게 했다. 작품의도는 알에서의 탄생 그뿐이다."
포항제철이 2003년 이 작품을 사갔다. '알에서 국가 시조가 태어났다. 국가는 철로서 이룩되어간다'는 내용의 작품해설로 역사관에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인들이 강모래에서 걸러얻는 사철의 알갱이를 알이라고 불렀다'는 엄청난 고고학적 전제는 그 근거가 제시되지 않아 많은 연구가 따라야 할 것 같다.
▲ 비각 한가운데 알영부인유허비가 있고 그 뒤 맨땅에 알영우물이 있다. 안내판이 알영정임을 알려준다. ⓒ이순희 |
▲ 알영정이라고 새긴 돌표지석이 알영우물 아닌 숭덕전 안 연못가에 놓여있어 착각하게 만든다. 진짜 알영우물은 문 뒤에 보이는 다른 건물 안 알영비각 뒤에 3매의 장대석으로 덮여있다. 아무 표지없이 놓여진 장대석 틈새로 우물물이 약간 들여다 보인다. ⓒ이순희 |
알영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부모도 아무 집안배경도 없던 박혁거세는 정치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알천, 알평공, 김알지처럼 '알'자 들어간, 당대 권력집안의 인맥과 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가 등장한 나정이 알영정과 가까운 데 있는 우물이며, 신라초기의 궁궐터인 창림사지가 연이어 있고 무덤인 오릉 또한 알영정 구역 안에 있다는 사실은 우연을 넘어 이곳이 알영집안의 세력권이 아니었을까 상상을 하게 만든다.
▲ 박혁거세가 묻힌 오릉. 알영우물과 같은 구역 안에 있어 그가 알영의 보살핌을 죽어서도 받고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이순희 |
박혁거세가 묻힌 오릉(사릉이라고도 한다; 뱀무덤이란 뜻)에서는 '혁거세왕이 다섯부분으로 몸이 분해돼 죽었다'는 것과 '후일 알영부인이 죽어 합장하려하니 뱀(경쟁세력으로 보이는)이 줄곳 방해하려 쫓아다녔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보이는 권력다툼의 잔혹함도 스며나온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초기의 임금 5인이 묻힌 곳이라고 한다.
한국인, 그중에도 건국을 이룬 왕과 같은 중요한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버드나무 있는 우물가에서 일어난다. 지나가던 출중한 젊은이가 목이 말라 우물가의 처녀에게 물을 청한다. 아름다운 아가씨는 바가지에 맑은 물과 함께 버들잎을 띄워주어 그가 급하게 마시다 탈이 나지 않도록 배려하는 지혜와 부덕을 갖춘 장래의 왕비감이란 이야기.
실제로 고려의 건국자 왕건과 장화왕후(고려 2대 혜종의 어머니)의 우물가 버들잎 연애담을 간직한 우물 완사천이 전남 나주에 있다. 알영우물에는 이런 이야기는 전하지 않고 역사기록에서는 계산된 정략적 결합이 느껴질 뿐이다. 알영정의 돌담 주변은 대나무가 무성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세월이 지나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가 되면서 오릉에 있던 절 담엄사의 당간지주는 유교식 홍살문 기둥으로 바뀌고 사당은 조선시대 유교의 구조와 분위기를 지녔다.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래도 '성인'이라고 추켜진 알영의 우물만큼은 옛이야기 그대로 남았다. 지금은 장대석으로 입구를 콱 막아 그저 우물에 빠지는 사고만은 막아두고서 '우물인지 뭔지 몰라도 그만'이라고 하는 것 같이 보인다.
오히려 다행일지 모르는 왜곡된 꾸밈은 없다고 해도 이런 철저한 무시 또한 남성위주 유교사회의 지배적 이념 탓인가 생각이 들었다. 알영에 대한 학술적인 접근도 아직 없어 보인다.
알자가 들어간 이름으로 신라사를 좌지우지한 또 하나의 성, 금의 상징 김씨 왕계를 탄생시킨 김알지가 등장한 계림 숲에는 1803년의 유허비가 비각 안에 있어 김알지의 장소임을 알려주고 있다.
계림에 가볼 때마다 비각의 문이 굳게 닫혀있더니 언젠가 문짝이 떨어져나가 안이 다 보였다. 들어가보니 비각 뒤에 가로세로 1.8m 가량의 돌로 마감하다 만 우물테두리가 있었다. 어디서도 김알지의 탄생에 우물이 동반한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기에 그 광경은 놀라웠다.
▲ 계림 숲 김알지비각 뒤의 우물흔적은 진짜 우물이 아니라고 한다. 왜 이런 가짜구조물이 들어서 있는지 아무 설명도 없다.. ⓒ이순희 |
우물은 모두 흙으로 메워지고 테두리돌과 뚜껑처럼 덮으려던 장대석도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그냥 땅위에 우물시늉만 해놓은 것처럼 보였다. '알'자가 들어간 시조 김알지도 혁거세왕이나 알영처럼 우물을 지녔다고 해보는 것일까?
학계에서는 김알지우물에 대한 기록이 없는 만큼 이곳을 우물로 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물테두리가 있다는 것은 어느 시점에서 김알지의 탄생과 우물을 한데 엮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 분명하다. 김씨가 왕권을 오래 잡으면서 조상을 신격화시키고 싶었는지?
우물같이 보이게 한 테두리돌이 최근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유물을 마음대로 변조한 그 과정이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김알지 비각과 그 숲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라사의 초기 분위기에 접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왕과 왕비가 등극할 때 무교의식으로 연희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박혁거세와 알영의 탄생과정을 나정이나 알영정에서 소리개와 계룡(鷄龍)의 형상을 등장시켜 연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 윤경수의 논문 '도해 한국신화와 고전문학의 원형상징성'을 인용해 경주대학 김규호교수가 신라우물세미나에서 밝혔다.
자세한 내용은 소개되지 않았지만 소리개는 박혁거세의 모계와 관련된 사항인 듯하고 계룡은 물론 알영의 태어남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단군 등 국조의 주인공들은 신으로 숭앙되었고 이들 신화가 제의와 관련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송효섭이 '설화의 기호학'에서 언급했다는 것도 인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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