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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우물가의 봉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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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우물가의 봉숭아

[김유경의 '문화산책'] <36> 경주의 우물 ⑦

"물과 관련한 경주의 특색은 우물이라 할 수 있다"고 이순탁 2015 세계물포럼 조직위원장이 말했다.

"신라 이래 200여 개 우물이 경주에 남아 전한다. 최근의 '물포럼'에 경주 우물에 대한 문화적 토론이 빠지지 않는 것도 그런 바탕에서 출발했다."

국제회의에서 나정(蘿井) 등 경주 우물 사진을 본 외국학자들은 대뜸 "이 우물들, 가서 볼 수 있나?"라며 학문적 호기심을 보였다. 경주만큼 많은 우물 기록이 있는 역사도 없다. 민가에도 신라시대 우물이 전해진다. 고령에는 가야시대 우물도 존재한다. 그러나 우물에 대한 우리 학계의 연구는 최근 시작됐다.

학자들 말로 경주의 우물은 211개가 남아 있다는데, 현장 문화해설사가 전하는 말로는 100개 정도가 보존되어 있고 그중 60개 정도에는 물이 올라와 고인다고 한다.

▲ 경주박물관 뒤뜰에 모여 있는 신라시대 우물돌. Ⓒ이순희

경주박물관 뒤뜰에는 경주 곳곳에 흩어져 있던 신라 우물돌 조각을 모아놓은 것이 있다. 통돌을 써서 만든 우물도 있고, 반원형 화강암 돌 2개 혹은 3~4개를 꺽쇠 같은 것으로 고정한 우물도 있다. 이미 자리를 떠나 있던 돌들이라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다.

이한성 교수가 경주박물관 건물 구역에서 발굴한 우물에서는 어린아이 뼈도 나왔다. ㄱ자형 윗돌 4개를 우물 속에 던져 넣은 그 유적에서는 비극적 사건 이후 우물을 파괴해 버린 듯하다. 차마 그 돌을 바라보기 어려웠다. 역사가 언제나 명랑한 것만은 아니지 않나.

대릉원 옆에는 최근 제작된 거대한 거북이 입을 통해 물이 흘러나오는 쪽샘 우물이 있어 관광객들이 쉽게 접하지만, 오래된 우물 같은 기분이 별로 안 난다.

▲ 서출지 부근의 임 씨 마을 입구에 있는 우물. 시멘트로 덮어 옛 우물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 우물가 큰 소나무 아래로 물을 뜨러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이순희

경주 마을 깊숙이 발을 들여놓으며 고색창연한 돌우물을 보았다. 서출지 주변 임 씨 마을 입구에는 소나무 아래 약수터 같기도 한 우물이 있다. 시멘트에 작은 돌을 버무려 우물담을 붙인 것이 오랜 옛날부터 최근까지 여러 번 손질하며 쓰던 우물터 같았다. 야트막한 우물가에 앉아서 물을 손으로 뜰 수도 있다. 공동 우물의 전형과도 같은 이곳으로 누군가 물을 기르려고 나올 것만 같은데, 한낮은 적막했다. 밤에도 어느 집 담 위에 핀 박꽃이 얹혀 있을 뿐 인기척 하나 없었다.

경주의 상수도 보급률이 90%에 이르면서 이젠 우물을 쓰는 사람도 없고, 우물가에 모일 일도 없이 그저 하나의 풍경으로 남는 듯했다.

▲ 경주의 국학이던 향교의 우물. 원래는 요석궁 우물이었다. Ⓒ이순희

▲ 향교(요석궁) 우물의 원형 돌쌓음과 그 위의 네모난 장대석 틀 구조가 보인다. Ⓒ이순희

계림 숲 옆에 있는 향교 우물은 신라시대 '요석궁 우물'이라고 했다. 요석궁 자리에 후일 신라의 국학 향교가 들어섰다. 원효가 남천의 다리에서 물로 떨어져 요석공주와 만나게 되는 느릅나무 다리가 요석궁 가까운 월정교 부근에 있었다. 그 옛날에는 요석공주도, 원효도, 설총도 이 자리로 물을 뜨러 왔을 것이다. 신라 국학이 되면서는 젊은 남자들이 이 주변에 모여들었을 터. 무슨 이야기들을 했을까. 지금은 시끄러운 관광객들로 소란스러운데, 염색으로 눈썹을 진하게 그려놓은 개가 무심한 듯 우물 옆을 지킨다.

두꺼운 반원형 돌 두 개를 맞붙인 이 우물이 없다면, 지금의 향교는 무미건조할 것 같다. 가장 안쪽 지름이 80여 센티미터(cm)로 규모가 상당히 크고, 내부는 원형으로 쌓아올린 뒤 장대석으로 네모난 틀을 지어 얹은 것까지 반듯하게 남았다. 우물은 아주 깊어 보였다. 나무 뚜껑으로 덮어 뒀다가 1년에 한 번씩 청소하는데, 지금은 물이 짜서 먹을 수도 빨래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저 향교 건물을 위한 방화수 정도로 존재한다.

▲ 교동 최 부잣집 최영식 씨 댁의 우물이 있는 안마당. 꽃이 만발한 안마당 장독대 옆에 시멘트관으로 개조한 커다란 우물이 있다. Ⓒ이순희

향교 건물 옆은 경주 최 부잣집이 350여 년 전 조선 후기에 정착한 교동 일대로 '최준 가옥'을 비롯해 10여 가구가 모여 사는 큰 기와집 여러 채가 있다. 1년에 쌀 3000석을 소비했다던 최 부자 가계의 마지막 주자 최준 집에 소속됐던 우물은 둥근 시멘트 관을 우물담으로 세운 구조로 바뀌어서 고풍(古風)의 면모는 없어진데다가 집터가 분할되면서 최준 가옥에 딸렸던 서너 개의 우물 모두 다른 곳에 편입되었다. 영남대학교로 소유권이 넘어간 최준 가옥은 지금 부엌이 있는 안채에 현대식 수도 하나가 있을 뿐이다. 담 밖 길 건너 다른 건물에 편입돼 뒷 구석에 버려진 듯 황량하게 보이는 우물 하나는 이제 최 씨 집안의 유산도 아니어서 최준 가옥의 쓸쓸한 잔영(殘影)처럼 보였다.

최준 가옥은 과거 국내외 중요 인물들을 접대하면서 경주 엘리트의 문화적·외교적 수준을 과시하던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였다. 1926년대 스웨덴 구스타프 왕이 세자이던 시절, 신혼여행 중 조선 경주 서봉총 발굴 소식을 듣고 왔다가 이 집에서 묵었다. 일행은 외부 손님이 들어갈 수 없는 안채를 궁금해했다고 한다. 6·25 한국전쟁 때 의료단으로 참전한 스웨덴군이 자국 왕실의 요청으로 최 부잣집 안채 사진을 샅샅이 찍어갔다. 1950년에는 우물이 어떤 형태로 남아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교동에서 본 인상적인 우물은 최경 씨 댁과 최영식 씨 댁 안채 우물이었다. 최 부잣집 일가는 모든 집이 한꺼번에 우물을 개수(改修)했는지, 남아 있는 우물이 모두 둥근 시멘트관을 세워 놓은 우물로 바뀌었다. 최경 씨네 안채 우물 옆에는 구기자나무가 있었다. 이 집 며느리로 '교동 법주(法酒)'를 만들던 국가지정무형문화재 고(故) 배영신 여사는 생전에 "우물 맛이 좋아 이 집안에서 문화재 술이 나왔지요"라고 말했다. 그 우물은 경주의 지하수가 오염되면서 10여 년 전 폐기되고 구기자나무도 없어졌지만, 마당엔 꽃나무가 많고 시멘트 우물이긴 해도 안채에 가득 놓여있는 큰 독 사이에 그대로 남아 있다.

최영식 씨 댁은 대문에서 중문 안채로 들어가는 풍경이 아주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안마당에 백일홍 꽃이 매년 가득 피는데, 장독대 옆에 역시 시멘트관으로 개조한 우물이 남아 있어 수도관을 이어두고 막 쓰는 물로 사용하고 있다.

▲ 수봉 이규인의 후손이 사는 수봉정 바깥채의 우물. 우물은 지금 쓰지 않지만 많은 손님을 접대하던 수봉정의 옛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 Ⓒ이순희

최 부잣집과 같은 가풍을 지닌 경주 시민이 또 있다. '육영사업'과 '독립운동지원', '구휼사업'을 벌인 수봉 이규인(1859~1936)을 조상으로 둔 집안이다. 관광객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외동읍 조용한 동네에 들어서면, 길가에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집이 '수봉정'이다. 이곳에서 아주 크고 아름다운 우물을 봤다.

"근래까지도 바깥 채에 늘 외부손님이 50여 명씩 찾아들어 그분들이 주로 사용하던 우물입니다. 우물 역사는 우리 집 수봉정 역사와 비슷하게 100~120년 됐음 직 합니다. 2014년부터 이 지역에 상수도가 들어와 우물을 쓰고 있지 않지만, 옛 그대로의 구조를 위해 수리를 거듭하면서도 없애지 않았습니다"고 이태형 수봉교육재단이사장이 말했다.

수많은 방문객을 접대하던 가풍이 활짝 열린 대문과 깊이 있는 우물로 남아 있는 듯했다. 우물은 '경북 기념물'로 지정된 수봉정 서당채며 본채 건물과 탑 등 정원 장식물, 그리고 이 집에 깃든 역사와 어울려 넓은 마당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집안에는 세 개의 우물이 있는데, 안채에서 쓰지 않는 우물돌을 바깥채에 옮겨두었다. 신라시대 석재로 보이는 그 돌 틈에, 봉숭아 한 포기가 올라와 피었다.

탑동 식혜골 김호 장군(? - 1592) 고택은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17세기 전후의 민가다. '식혜(識慧)'라는 도승, 혹은 '식혜사(寺)'라는 절이 있었기에 동네 이름도 '식혜골'이다. 유명한 남간사 절터가 바로 앞에 있으며 당간지주(幢竿支柱)도 그대로 서 있는데, 동네 전체가 신라시대 절터였다고 한다. 1976년의 문화재관리국 조사보고서에는 우물을 비롯해 신라시대 석재가 집 여기저기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보고됐다. 임진왜란 때 3대에 걸쳐 전장에서 활약한 김호 장군의 집이 이곳에 자리 잡았고, 지금은 14대 종손이 거주한다. 오래된 건축기법과 김호 장군 집안의 내력도 함께 간직한 경주 최고의 민가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 '김호 고택'의 우물.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로 신라시대 절터에 자리 잡았다. 우물은 신라시대 유물이다. 두레박줄을 묶는 돌기둥도 옛 그대로다. 삼각추 형태의 우물마개는 우물에 넣어두고 있다. Ⓒ이순희

▲ 우물 마개삼아 쓰는 삼각추 형태의 나무틀. Ⓒ이순희

안채와 바깥채에 각각 우물이 있는데, 안채 우물은 일찌감치 시멘트 관 우물로 바뀌었다. 그래도 바깥 우물은 우물돌도 옛 그대로이고, 두레박줄을 묵는 큼직한 돌도 원래대로 붙박이로 박혀 있다. 수도관을 설비하지 않고 예전처럼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 쓰고 있다.

안주인 이영숙 씨가 하루 종일 움직이며 농사에, 제사에, 민박운영에 온갖 집안일을 하면서 유지하고 있었다. 경주에서 본 우물 중 실생활과 가장 밀착된 우물이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옛날에 3대가 다 함께 너무 오래 살고 있었답니다. 한 스님이 우물가에 있는 앵두나무와 향나무, 그리고 또 다른 나무 중 한 그루를 뽑아내라고 했대요. 말씀대로 한 뒤 집에는 기(氣)가 원활하게 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뽑아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앵두나무와 향나무, 그 외 많은 나무가 우물가에 크고 넓은 그늘을 만든다. 안주인은 막대기 6개로 엮은 삼각추를 물건이 우물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개 삼아 담가두었다. 경주에서 본 우물가 나무는 뽕나무도 있었고 구기자나무와 느티나무, 소나무 등 다양했다.

"처자를 물색해 선을 보러 가면, 그 처자에게 꼭 바깥 우물에 가서 물을 떠 오라고 시킨다고 했어요. 뒤태가 어떤지 물 떠오는 모습을 통해 살펴보려고요."

우물을 앞에 놓고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우물가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사람들이 아직 있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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