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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숭신전 우물과 8각 돌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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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숭신전 우물과 8각 돌기둥

[김유경의 '문화산책'] <35> 경주의 우물 ⑥

경주의 대궐터 월성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전하는 우물은 석탈해왕의 사당 숭신전 옛터에 있는 연꽃조각 돌우물이다.

2010년 월성에서 옛 숭신전 앞을 지나쳤으나 그때는 숭신전 원래 자리인 것도 몰랐다. 그러나 눈에 띄는 구조물로 석빙고 하나를 보았을 뿐 땅 위로는 텅 비어 있는 월성에서 8각 돌기둥 두 개가 거리를 두고 문기둥처럼 서 있는 광경은 쉽게 잊을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8각으로 된 유적이 세속적 가치 이상의 경건한 의미를 주어서 뿐만은 아니었다. 몇백 년은 됐을 큰 소나무가 180센티미터(cm)쯤 돼 보이는 8각 기둥 가까이 있었다.

그 광경은 뭔가 권력의 비밀증표가 될 부러진 칼 같은 것을 품고 있는 고대사적 분위기를 냈다. 고려사람 이규보의 저작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고구려 유리왕이 아버지 동명왕의 아들임을 증명해줄 칼이 감춰져 있던 곳으로 소나무와 모난 바위가 같이 있는 상황이 전해지지 않는가. 다른 곳도 아닌 신라 월성의 깊숙한 곳에서 2000년 전 한국인의 감성을 담은 광경을 보게 되니 놀랍고 반갑기만 했다.

▲ 2010년 9월 월성안 석탈해왕의 사당 숭신전 옛터. 8각 기둥 앞뒤로 어두운 대숲과 풀로 뒤덮여 그 속에 뭐가 있는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이순희

▲ 2016년 5월의 숭신전 터. 소나무와 8각 돌기둥 너머로 우물과 비석받침이 있고, 그 뒤로 숭신전 터가 드러나 보인다. ⓒ이순희
처음 봤을 때 그곳은 폐허 같았다. 원래 있던 숭신전이 1980년 동천동 석탈해왕릉 옆으로 강제 이건된 후, 마구 자란 나무풀숲에 가려진 채 설명 한 자 없이 버려진 듯 보이던 8각 기둥은 아주 오래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으니 그저 경주에서 흔하게 보는 돌덩이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것인가 싶었다. 돌기둥 앞뒤로는 어두운 대숲에 물웅덩이 그런 것들이 들어서 있는데,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었다. 하물며 아름다운 우물이 감춰져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때 이후 6년 만에 숭신전 터를 확인하면서 왕이 관련된 역사적 장소라는 사실이 아귀가 맞아 들어갔다.

2013년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주최한 경주우물세미나 자료집에서 '월성내 우물' 다섯 글자로 소개된 것이 전부인 사진을 처음 보았다. 학계에서도 이 우물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고 문외한은 8각 기둥 있는 터와 우물을 연계해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프레시안>에 쓰는 경주우물을 취재하면서 비로소 몇 년 전에 본 사진 속의 월성우물을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

2016년 5월 가봤을 때 월성은 2014년 말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곳곳이 파헤쳐지는 중이었다. 석빙고 안쪽 평지 풀숲에 솟아있는 8각 기둥 안쪽에 그 우물이 있었다. 경주의 중요하천인 남천을 마주 보는 방향이고 위치도 남천과 멀지 않았다. 그러면서 비로소 이곳이 원래의 숭신전 터라는 것을 확인했다. 간단한 설명이 적힌 안내판이 2012년 생겨나 이곳이 숭신전 터이며 신라시대 우물이라고 설명한다. 화려한 연꽃잎이 새겨진 것이 부처님 발밑의 대좌처럼도 보이고 석등의 받침돌처럼도 보이는 이 우물돌이 8각 기둥과 한 구역에 있다는 것이 우연한 배치는 아니었던 것이다.

▲ 월성 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숭신전 터 우물. 앞쪽에 8각 돌기둥이 보인다. ⓒ이순희

▲ 월성 숭신전 터 우물에는 아직 물이 고인다. 깊이 10m(사진 왼쪽). 우물 옆에 있는 석조물. 비석 받침돌이었던 듯하다(사진 오른쪽). ⓒ이순희

▲ 동천동 숭신전 모우각에 있는 1921년 제작 신라석탈해왕비명. 받침돌이 거의 생략된 것은 비석 키가 비각천장에 닿을 듯해서 그런 것 같다. ⓒ이순희
지표면의 우물 윗돌은 가로세로 모두 150cm가량 되는 네모난 형태로 각 변에 6개씩의 쌍엽 연꽃잎을 새긴 돌 두 개를 맞붙이고 그 위에 삼단에 걸쳐 기하학적 직선 구획이 되어 있는 정교한 것이었다. 지표면에서 약 35cm가량 높이로 돌출되어 있고 물이 닿는 구연부 둥근 부분 안지름은 65cm 내외로 보였다. 맨 윗부분 두레박줄 닿은 부분의 돌은 많이 훼손되어 떨어져 나가고 연꽃조각도 풍상을 머금고 닳아 내린 것이 오랜 기간 사용해온 우물 같았다. 우물 돌 두 개가 맞물린 부분은 근대에 와서 시멘트로 이음 부분이 벌어지지 않게 고정시키고 연꽃조각이 떨어져 나간 부분은 메꾸었다. 경주에 남아 있는 모든 우물 중 대궐구역에서 보는 우물답게 화려한 조각이 있는 유일한 우물이었다.

지표 아래로 둥근 냇돌을 써서 원형으로 정교하게 쌓아올린 우물은 10미터(m) 깊이라고 한다. 내려다보니 까마득하게 고인 우물물이 보였다.

비석이 얹혀 있던 듯한 받침돌이 우물과 나란히 위치해 있고 조금 떨어져 숭신전 본전 터가 있었다. 그동안 경주를 수십 번 가봤으면서 월성 안에 이런 아름다운 유적이 있다는 것을 왜 모르고 있었던가 싶었다. 불과 36년 전인 1979년까지도 대규모 건물과 함께했던 유적인데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대한제국 고종 때인 1898년 후손 석필복의 주관으로 월성 옛터에 소나무 숲을 만들고 숭신전이 건축됐다. 석탈해왕의 후손 석(昔) 씨 대종회 석진환 회장 설명에 따르면 숭신전의 역사는 우여곡절이 많다.

"8각 기둥을 지나 안쪽 본전으로 들어가는 경엄문에 이르는 바깥마당에 이 우물이 있어 숭신전에서 사용했다. 조선 태조 임금 이성계가 월성터를 석씨 문중에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해 종중이 계속 받들던 것이 일제 강점기 토지조사 때 모두 일제에 몰수됐다. 1979년 월성 전체가 경주국립공원에 포함되면서 정부가 숭신전을 월성에서 없애기로 결정, 종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숭신전 전체를 현재의 동천동 터로 이건하였다. 이때 8각 문기둥은 이전하지 않고 그 자리에 두고 왔다. 동천동에는 대신 홍살문과 영녕문이 들어서고 비석은 비각 안에 모셨다.

숭신전 터의 우물은 경주 석씨 숭신전지에 의하면 1938년 820원의 비용으로 관리실 5칸을 짓고 우물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한 줄 있는데 설치가 어떤 규모의 공사를 말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숭신전이 처음 세워질 때 우물이 먼저 있었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석진환 씨는 1955년부터 계림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이곳에 자주 들어와서 수업교재도 만들고 숭신전도 돌보고 했는데 우물물이 어떻게 찬지 여름에 바로 등물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숭신전 관리자가 살면서 이 우물을 향사며 제반 일상에 사용했다.

▲ 월성에 있는 석탈해왕 사당 숭신전 본전건물터. 주춧돌은 이건 당시 가져간 듯하다는데, 기단을 형성한 돌도 없이 돌계단 석 줄만 남아 터를 받치고 있다. ⓒ이순희

▲ 1980년 동천동 석탈해왕릉 옆으로 이건된 숭신전 본전. 건물 앞 8각 외기둥 위에 얹힌 상석 같은 돌은 제향 때 밤에 돌 위에 불을 피워 밝히는 용도로 사용했다. ⓒ이순희

우물에서 몇십 발자국 떨어진 안쪽으로 숭신전 본전자리가 지표면에서 계단 4개 높이로 솟은 터에 남아 있다. 주춧돌은 1980년 숭신전을 이건할 때 함께 가져갔으리라 한다. 빈터에는 돌계단만이 초여름 길게 자란 풀에 덮인 채 보일 듯 말 듯 남아 있다. 기단을 형성한 돌이 없었는지 아니면 후일 없어졌는지 전각에 오르던 석 줄의 반듯한 돌계단이 흙으로만 된 기단을 그나마 지탱해 주는 것 같았다.

우물 옆에 이곳에 세워졌던 듯한 비석의 받침돌이 있는데 비석은 없다. 현재 동천동 숭신전 경내 비각인 모우각에 석탈해왕의 행장을 기록한 비석 '신라석탈해왕비명'이 있다. 비석의 글은 1921년 김윤식이 짓고 윤용구가 행서글씨를, 최현필이 머리글 전서(篆書)를 썼다. 비각안의 비석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월성안 우물 옆에 있는 석조물 받침대와는 다른 평범한 것이, 특별히 조형을 염두에 둔 것 같지 않다. 1980년 준공되면서 새로 생긴 비각은 비좁아 보여 비석 윗부분이 천장에 닿을 듯하니 받침돌을 생략했는지 모른다.

경주시 문화재과의 학예연구사 이채경 팀장은 '우물을 밑바닥까지 발굴해보지는 않았으나 쌓아올린 구조와 깊이, 외형으로 볼 때 신라시대의 우물로 추정한다'고 했다. 1967년 초등생 시절 소풍왔다가 본 숭신전 우물을 기억하는 유갑준 전 국세청 공무원은 '우물에 대략 1m가량 높이의 우물 담을 쳐서 빠지지 않게 해놓고 쓰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숭신전이 이건된 뒤에는 폐허나 다름없어서 2000년경에는 우물 위의 돌출부도 없어진 채 흙에 파묻혀 우물이 지표면에 얕게 돌출되어 있었지요. 누군가 우물인지 모르고 걷다가 빠지지 않게 우물 위를 나무기둥 같은 것으로 얼기설기 가려놨었습니다. 그걸 헤치고 보지 않는 한 이곳이 우물이라는 것을 알 수도 없고 사람들도 관심을 안 뒀습니다."

우물 돌에 연화문조각이 되어 있는지는 흙에 가려져 한참 동안 몰랐었다고 한다. 이제 그 우물이 제 모습을 환히 드러내며 다시 주목되기 시작했다. 현재 우물에는 길고 묵직한 장대석 두 개를 걸쳐놓았다. 삼국유사를 연구하는 동호인모임의 한 회원은 "월성대궐 터에서 유일한 우물입니다. 경덕왕 년간 가뭄이 심했던 753년에 용장사 대덕스님이 대궐에 와서 금광경을 읽으며 기우제를 올린 뒤 물길이 일곱길 이나 솟아났다던 그 우물은 혹시 아닐까 추정해봅니다"고 했다. 삼국유사에는 '그 일이 있은 후 우물이름을 금광정으로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6년 소나무와 8각 기둥 안에서 본 것은 고구려 왕자의 증표인 '부러진 칼'이 아니라 수정처럼 맑고 차가운 물이 고이는 화려한 우물이었다. 천수 백 년 지나 조선시대에 와서 우물을 큰 소나무가 있는 8각 돌기둥 안에서 보게 만든 조상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쁘다. 다시금 백수십 년 지나 한국인으로 그 광경에 마음을 뺏기는 것 또한 같은 민족의 자손이라는 감수성의 맥이 통하고 있어 그런 건 아닌지.

새로 지은 동천동 숭신전 건물에서도 8각 기둥을 보았다. 숭신전 본전 앞 왼쪽 마당에 8각 외기둥을 세우고 위에 육중한 돌을 상석처럼 얹은 석조물이 그것이다. '밤에 거행되는 제향 때 여기다 불을 밝혔다'고 석진환 회장이 말했다.

지금은 전기 외등이 서 있고 우물대신 상수도가 들어와 있지만, 세상에 흔하지 않은 역사적 장소에서 고대사적 제례가 행해진다면 볼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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