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개헌 협상 최대 쟁점은 대통령 임기…5년 단임제에 여야 합의
프레시안 : 1987년 6월항쟁으로 6·29선언이 나온 후 정치권의 관심은 급격히 대선 문제에 쏠렸다. 대선 문제는 다른 수많은 사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그렇게 되면서 개헌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안마저 대선으로 가는 징검다리 정도로 간주되며 사회적으로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못했다. 6월항쟁에 적극 참여한 시민, 학생, 사회 운동 세력의 목소리가 충실히 담기는 대신 제도 정치권의 여야 협상 위주로 논의가 이뤄졌다는 데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적지 않은데, 오늘날 존재하는 헌법이 바로 이때 탄생한 헌법이라는 점에서도 6월항쟁 이후 개헌 과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서중석 : 6월항쟁의 기본 목표는 민주주의 쟁취, 그것도 정치적 민주주의 쟁취였다. 6월항쟁 직후인 1987년 7월 8일 시국 사건 관련 수감자 중 357명이 석방되고 9일에는 김대중 등 2335명이 사면 복권된 데서도 그런 점을 엿볼 수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 쟁취는 헌법으로 구체화돼야 했다. 8월 17일 국회 개헌 특위 첫 회의가 열렸다. 8월 31일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8인 정치 회담에서 직선제 개헌안 협상이 타결됐다. 협상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은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으로 하느냐 단임으로 하느냐, 이것이었는데 민정당의 주장에 따라 단임으로 하기로 했다. 대통령 임기는 5년으로 정했고, 부통령은 두지 않기로 했다.
프레시안 : 민정당은 전두환·신군부 헌법에 규정된 '부통령 없이 대통령 7년 단임제'에서 임기만 1년 줄인 '부통령 없이 대통령 6년 단임제'를 제시했다. 이와 달리 통일민주당은 4년 중임 대통령제 및 부통령제 도입을 주장했다. 대립하던 양측이 합의한 계기는 무엇인가.
서중석 : 대통령 임기 문제는 개헌안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사안이었는데, 대통령 5년 단임제에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도 당선을 자신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각 후보들이 대통령 5년 단임제에 쉽게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정해구 교수는 지적했다.
8월 31일 직선제 개헌안 협상이 타결된 데 이어 9월 18일 여야 합의로 직선제 개헌안이 발의됐고 10월 12일 국회에서 의결됐다. 10월 27일 국민 투표가 실시됐는데 여기서 93.1퍼센트의 찬성으로 확정됐다. 이틀 후인 10월 29일 이 헌법이 공포됐다.
여야 합의로 개헌안을 통과시킨 건 한국 현대사에서 이때가 세 번째다. 1948년 5·10선거를 통해 소집된 제헌 국회에서 제헌 헌법을 만들 때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여야 합의, 그 당시로는 제헌 국회의원들의 합의에 의해 헌법을 만들었는데 그게 첫 번째다. 두 번째는 1960년 4월혁명 이후에 소수당인 민주당이 다수당인 자유당의 덜미를 잡고 여야 합의로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임정 법통 계승'이 처음으로 헌법에 명시된 과정
프레시안 : 새롭게 탄생한 헌법은 이전 헌법과 어떻게 달랐나.
서중석 : 새 헌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통령 5년 단임 직선제이지만, 전문도 과거 헌법과 달랐다. 전문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는 것은 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 저항권을 설정한 것이었다. 어떠한 독재 정권에 대해서도 국민이 저항하는 것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국민이 독재 정권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그것은 독재 협력 세력에 대한 비판의 헌법적 근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승만 독재, 박정희 유신 체제, 전두환·신군부 체제는 이 헌법에 따르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예전 헌법에는 없던 대목이다. 제헌 헌법의 경우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만 돼 있을 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명시돼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는 이 조항으로 수구 냉전 세력이나 뉴라이트가 곤경에 처할 것이라는 점은 이 헌법 전문을 만들 때에는 아무도 몰랐다. 뉴라이트가 수구 냉전 세력의 지원, 지지를 받으며 이른바 건국절을 강변하는 한편 1950년대에 나왔던 이승만 건국론, 이승만 국부론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지 않았나. 그런데 그건 주로 21세기에 들어와서 그렇게 했다. 다시 말해 1987년에 이 헌법이 탄생한 이후 시기다.
이승만 추종자 일부와 뉴라이트는 이승만 건국론과 8·15 건국절 주장 등을 내세워 친일, 분단, 독재 협력 세력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고 있는데 친일, 분단, 독재 협력 세력을 합리화하려는 그러한 노력에 이 헌법은 큰 타격을 줬다. 헌법 전문에 "대한 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명시돼 있는데도, 이승만 추종자 일부와 뉴라이트는 아직도 계속해서 이승만 건국론과 8·15 건국절 주장 등을 내세우고 있다.
프레시안 :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는 어떻게 해서 담기게 됐나.
서중석 : 그게 이 헌법 전문에 들어간 데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종찬 회고록에 의하면, 1980년대에 고려대 총장으로 외부의 압력에 저항했던 김준엽이 새 헌법안 작성 작업이 진행되던 때에 이종찬을 불렀다. 김준엽은 이종찬에게 "이번 기회에 임정의 법통을 잇는다는 내용을 반드시 헌법 전문에 명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종찬 의원은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인 민정당 허청일 의원에게 김준엽이 이야기한 내용을 반영해달라고 주문했지만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이종찬은 헌법개정특별위원회 민정당 측 간사인 현경대 의원을 찾아가 같은 요구를 했고, 이때에는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 통일민주당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이미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정당에서 그러한 변화가 생기면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명시한 헌법 전문이 나오게 됐다.
(김준엽은 일제 말 장준하 등과 함께 광복군으로 활약했다. 이종찬은 독립 운동의 거목인 우당 이회영의 손자다. 이회영은 대한제국이 망하자 일가를 이끌고 만주에 가서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독립군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독립 운동에 헌신했다.
한편 1987년 개헌안 협상 과정에서 통일민주당은 3·1운동, 임시정부, 4·19와 함께 5·18, 즉 광주항쟁을 헌법 전문에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정당은 3·1운동, 임시정부, 4·19까지는 동의했지만 5·18을 명시하는 데에는 반대했다. 그러면서 5공화국 창건을 전문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립 끝에 5·18도, 5공화국 창건도 넣지 않는 것으로 정리됐다. '편집자')
큰 방향은 국회·사법부 권한 강화, 국민 기본권 확대, 군의 정치 개입 금지
서중석 : 이 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그 대신 국회와 사법부에 전보다 큰 권한을 부여해 3권 분립을 구현하려 했다. 사법부 쪽을 살펴보면 법관 임명 절차를 개선하는 한편 헌법재판소를 새로 만들었다. 사법부의 실질적 독립을 도모하고 헌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헌법재판소는 법률의 위헌 여부, 탄핵, 정당 해산, 국가 기관 상호 간의 권한 쟁의, 헌법 소원 등에 대한 심판권을 갖게 됐다.
독재 정권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침해된 국민의 기본권을 확대하는 내용도 있었다. 체포, 구속, 압수,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발부된 영장을 제시하게 하는 등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항이 여럿 담겼다. 또한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 그리고 집회 및 결사에 대한 허가를 금지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단체 행동권 행사에 대한 법률 유보 조항도 삭제했다. 그렇지만 법률이 정하는 주요 방위 산업체에 종사하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단체 행동권을 제한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이 헌법에서는 최저 임금제를 도입했다.
그런데 법률이 정한 일부 사업장을 제외한 여타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단체 행동권을 제한할 수 없다고 돼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10월에 새 헌법이 공포된 것에 이어 11월에 노동 관계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통과됐는데 여기에는 제3자 개입 금지, 노조의 정치 활동 불가, 복수 노조 불가 등의 조항이 있었다. 이런 조항들을 통해 여전히 단체 행동권을 실질적으로 제한했다고 볼 수 있다. 양김도 이것에 합의를 해줬다. 제3자 개입 금지 등은 독소 조항이라는 비판을 강하게 받았다.
프레시안 : 양김이 그처럼 독소 조항이 즐비한 노동 관계법 개정안에 동의한 부분, 어떻게 봐야 할까.
서중석 : 간단히 말하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노동 관계 사안이 그런 식으로 처리돼야 한다는 생각을 양김도 다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통일 문제를 빼면 김대중이 꼭 진보적인 건 아니다', 이런 주장을 내가 하는 것이다.
헌법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면, "국군은 국가의 안전 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고 총강에 명시했다. 군의 정치 개입을 금지한 것이다. 또한 위축됐던 국회의 권한을 강화했다. 국정 감사권 부활에서도 그 점은 잘 드러난다. 국정 감사는 국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 아닌가. 그와 함께 대통령의 비상 조치권을 폐지했다. 그 대신 긴급 재정·경제 처분 및 명령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국정 감사권은 15년 만에 부활했다. 국정 감사가 한창이던 1972년 10월 17일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국회의 국정 감사권을 없앴다. 유신 체제에서 대통령은 국회 해산권을 갖고 있었지만, 국회에는 그에 상응하는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쉰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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