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프레시안 : 이번에는 전두환 집권기 사회, 문화 정책을 짚었으면 한다. 전두환·신군부가 유신 정권을 이어받은 세력이긴 하지만 유신 정권의 사회, 문화 정책을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는 상황 아니었나.
서중석 : 전두환·신군부 정권의 사회, 문화 정책은 유신 헌법과 이들의 헌법이 약간 차이가 있는 것처럼 유신 정권의 그것과 차이가 있었다. 박정희 유신 정권은 금지와 제한, 즉 금제(禁制)와 엄숙주의를 기본으로 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일제 말의 군국주의 파시즘과 연결되는 측면이 많이 있었다.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병영 국가, 군사 문화라는 면에서는 박정희 유신 정권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상당 부분 금지, 제한을 하면서도 그와 함께 풀어주는 면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규제 일색에서 개방이나 당근이라고 볼 수 있는 조치들이 나타난 데에는 시대적인 변화도 영향을 끼쳤다. 교육을 받은 층이 많이 늘어났고 또 노동 계층이 대량으로 증가하면서 대중 사회가 훨씬 더 두터워졌다. 그뿐 아니라 박정희 유신 정권의 억제, 억압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인해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억제, 억압 하의 사회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었다. 거기에다가 전두환·신군부로서는 12·12쿠데타, 5·17쿠데타, 광주 학살, 그리고 언론계를 비롯한 각계에 대한 연이은 숙청 작업 등과 다른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적어도 자신들에게 큰 불만을 갖지 않도록 유도할 필요성이 있었다.
박정희가 막은 컬러TV 방송, 전두환·신군부가 뒤늦게 허용
프레시안 : 많은 사람에게 1980년대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컬러TV 아닐까 싶다. 흑백 화면만 보다가 컬러 화면을 봤을 때 일종의 문화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저만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서중석 : 1980년 12월 1일 KBS에서 컬러TV 방송이 처음으로 이뤄졌다. 시험 방송이었는데 이로써 컬러TV 방송 시대가 개막됐다. 그런데 컬러TV 판매가 자유화된 것은 8월 2일로 그보다 넉 달이나 앞서 있었다. 사람들은 컬러TV에 대단한 환영을 표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제 색의 혁명, 색채 혁명이 일어났다고 반겼다. TV 프로그램 내용은 비슷했지만, 물론 조금 있으면 스포츠가 TV 프로그램에서 대단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게 1970년대와 큰 차이점으로 나타나기는 하는데, 컬러TV 방송은 대중의 감각을 크게 바꿔놓았다.
하여튼 컬러TV 방송을 다른 나라보다 훨씬 늦게 시작했는데, 사실은 진작부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판할 수 있게 컬러TV를 이미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박정희는 10·26이 날 때까지 컬러TV 방송을 금지했다. 엄숙주의, 자신은 뒤에서 다른 짓을 하면서 국민한테 강요한 그 엄숙주의에 의해 '계층 간 위화감을 막기 위해 컬러TV는 안 된다'며 그렇게 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컬러TV 방송을 처음 내보낸 건 AFKN(주한 미군 방송)이었다. AFKN은 1970년대 후반에 컬러TV 방송을 시작했는데, 한국에 온 미군이 흑백TV를 봐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불만을 품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AFKN 컬러 방송은 미군만이 아니라 일부 한국인들도 즐겨 봤다.
한국 정부가 AFKN에 컬러 방송 중단을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1977년 문공부 당국자와 미 8군 측의 회의록을 입수해 보도한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그해 4월 문공부는 "(AFKN 컬러 방송은) 우리 국민이 총화 단결해 경제 건설에 열심히 매진해야 하는 현실에 유익하지 못할 것"이고 "국민도 현재 흑백 TV 방송에 만족한다"며 컬러 방송을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같은 해 8월에는 "AFKN이 컬러 방송을 적극화할 경우 우리 국가 건설과 방위 노력에 지대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라며 다시 한 번 요청했다. 미군 측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국민도 현재 흑백 TV 방송에 만족한다"는 주장과 달리, 동아일보 1980년 11월 11일 자 기사에 따르면 부산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에서는 일본 컬러TV 시청률이 한국 흑백TV 시청률을 압도하기도 했다. '편집자')
그런데 1980년경에 와서는 업계의 사정 때문에도 컬러TV를 내수 시장에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강준만 교수 책을 보면, 한국은 1977년에 컬러TV 수상기 12만 대를 수출했고 1978년에는 50만 대 수출을 목표로 잡았다고 쓰여 있다. 컬러TV는 대부분 미국 시장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90퍼센트 정도가 그쪽에 팔렸는데, 1979년 미국이 수입 물량을 1년에 30만 대로 규제해버렸다. 한국 업체들의 TV 수상기 생산 능력은 1979년 기준으로 110만 대였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든 팔지 않으면 전자 제품 업계가 아주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컬러TV는 1980년 8월 2일 국내 시판이 허용된 순간부터 무섭게 팔려나갔다. 1981년과 1982년 사이에 200만 대, 1982년과 1983년 사이에 300만 대, 1983년과 1984년 사이에 400만 대를 돌파했다. 1985년과 1986년 사이에는 500만 대를 돌파해서 전 가구의 반절 정도에 보급된 상황이었다. 이때는 시청료 때문에 등록하지 않은 수상기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 점을 감안하면 보급률은 이보다 훨씬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서 전자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1981년에 총 생산 규모가 37억 9100만 달러였는데, 이건 1980년에 비해 33퍼센트나 성장한 것이었다. 그 후에는 더욱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웠던 통금 해제와 두발·교복 자유화
서중석 : 통금은 1982년 1월에 해제됐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하루 전인 1945년 9월 7일에 내린 군정 포고 제1호에 의해 실시됐는데, 그게 박정희 정권 때까지 계속해서 있다가 1982년에 와서야 없어진 것이다. 통금은 구시대 억압, 금지와 제한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였다. 도대체 통금을 계속 실시해야 할 이유가 분명치 않았다. 물론 박정희 정권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통금을 없애도 치안에 별 문제가 없다는 건 박정희 집권기에도 확연했다. 그런데도 없애지 않은 건 바로 이 억압, 금제를 강화하는 데 통금이 필수 불가결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사실 1960~1970년대, 우리 젊은 시절에는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기다렸다. 그날이 1년 중 통금이 없는 단 이틀 중 하루였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하고 12월 31일, 즉 새해를 맞이하는 이때는 통금이 풀렸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국경일보다 더 환영을 받았다. 그날은 밤새도록 놀아야 한다는 게 청소년들한테는 일종의 약속 비슷했다. 다들 그렇게 자유스럽게 밤을 지내고 싶어 했는데, 박정희가 계속해서 '통금을 해제하라'는 요청,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프레시안 :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크리스마스를 환영할 수밖에 없었겠다.
서중석 : 그렇다. 예배당 가는 것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이 그랬다. 아무튼 통금을 해제한 데 이어 1982년 3월부터 학생들 두발을 자유롭게 하도록 했고 1983년부터는 교복도 안 입어도 되도록 했다.
두발과 교복에 강한 제한을 뒀던 것도 억압과 금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이자 일제 문화, 특히 일제 말 군국주의 문화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아, 일제 말 사진을 봐라. 다 머리를 빡빡 깎고 군복 비슷한 옷, 국민복이라는 그걸 입지 않았나. 그게 1961년 5·16쿠데타 후 부활됐다. 그러면서 대학생까지 그전에 안 입었던 교복을 입게 한 것 아닌가.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일제의 유산이 너무 오래갔다. 예컨대 국민학교라는 게 왜 생겼는가를, 1940년대에 그게 생긴 이유를 교육계에서 아는데도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1990년대에 와서야 없어지지 않았나. 그래서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 않나. 선배에게 경례를 붙이게 한다거나 선배가 후배에게 무조건적으로 반말을 할 수 있게 한 것들도 일제 때 군사 문화를 제외하면 생각하기가 어렵다. 해방 후 군인 시대가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어떤 면에서는 그런 게 일제 때보다 더 강화되기까지 했다. 선배한테 경례하는 건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리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때 선배한테 경례를 해야 했다. 선배가 후배한테 무조건적으로 반말하고 후배가 선배한테 말 높이는 건 지금도 하지 않나.
전두환·신군부 정권에서 두발, 교복을 자유롭게 한 것도, 그전에 당연히 없어져야 했던 건데 없어지지 않은 것을 풀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 늦게 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대중 조작적 측면으로 전두환·신군부 정권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을 무력화하고 정치에 대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정권에서 장려한 정책으로 많은 사람이 3S라는 걸 꼽고 있다. 이제 그걸 살펴보자.
3S에 담긴 전두환·신군부 정권의 노림수
프레시안 : 3S는 섹스, 스크린, 스포츠를 가리키지 않나.
서중석 : 박정희 정권이 엄숙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 1970년대 후반기에 얼마나 룸살롱이 유행했나. 1960년대에는 요정 정치라고 할 정도로 요정이 번성했다. 사실 성매매가 1960~1970년대에 심했고 박정희도 엄숙주의를 표방하면서 한 짓이 있지 않나.
그런데 1980년대에 오면 대중 사회가 또 그런 쪽으로 크게 번창하는 걸 볼 수 있다. 강준만 교수 책을 보면 1982년 1월 17일 자 한 주간지에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영동의 신흥 숙박업소들이 활황이다. 이들은 컬러TV에 침대는 물론 도색 필름을 구경할 수 있는 VTR 시설까지 완비, 시간제를 구가하고 있다." 시간제라는 건 시간을 정해 손님을 집어넣고 나가게 하는 걸 말한다.
1970년대 투기, 특히 1970년대 후반에 한국 투기의 가장 요지였던 영동, 지금은 이 말을 별로 안 쓰지만 강남 한복판을 가리키는데, 그 영동이 이제는 신흥 숙박업소들이 활개를 치는 장소로 바뀐 것이다. 권력 쪽에서 방조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도 볼 수 있다. 또 러브호텔이 1980년대 초에 들어서면 어디서나 향락 산업으로 번창했다.
그런 속에서 섹스 산업이 융성해서, <우리들의 현대 침묵사>라는 책을 보면 인신매매단까지 있었다고 돼 있다. 이건 사실 우리가 당시 사석에서 얘기하기도 했던 사안이다. 1990년대까지도 이런 게 있지 않았나 싶은데, 하여튼 1980년대에 향락 산업이 번창하면서 공급이 모자라니까 유부녀들을 납치해 향락 업소에 넘긴 것이다. 그래서 대규모 인신매매단까지 나타나는 걸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연구소 조사에 의하면 1983년도 매춘 여성의 수가 87만 명이었는데 1985년에 보사부 통계로 100만 명이 넘었다. 향락 업소의 수도 1983년에 24만 6000개였던 것이 1985년 국세청 조사에 의하면 31만 4000개가 넘었다. '한국은 인허가 국가'라고까지 할 정도로 1950년대부터 1980~1990년대까지 당국이 인허가를 안 해주면 이런 걸 할 수가 없었다. 러브호텔도 마찬가지다.
프레시안 : 영화 쪽은 어떠했나.
서중석 : 스크린 하면 많은 사람에게 우선 생각나는 게 <애마부인>이다. 1982년 정초에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서울에 있는 극장들은 앞다퉈서 심야 영화를 상영했다. 그러면서 1982년 2월 초부터 <애마부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1970~1980년대에 밤 문화가 융성하지 않았나. 남성 중심으로 술과 여자에 탐닉하는 밤 문화가 심했는데, 그러한 밤 문화와 연결되는 것 중 하나로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가 등장한 것이다.
1970년대 중후반에 호스티스 영화라는 게 많이 나오는데, <영자의 전성시대>(1975년)라든가 <별들의 고향>(1974년) 같은 건 호스티스 영화라고 하더라도 사회상을 잘 반영한 수준급 영화였다. 그렇지만 1978년, 1979년에 가면 < O양의 아파트>
예컨대 1982년 개봉 영화 56편 중 62.5퍼센트인 35편이 에로 영화였다. 한때는 국산 영화 대부분이 에로 영화였다는 말이다. 어째서 그런 게 나왔겠나. 사람들이 다 '이건 군사 정권의 의도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고 했다. 그와 달리 1982년 배창호 감독이 만든 <꼬방동네 사람들>, 잘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 영화는 무수하게 가위질을 당했다.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이런 좋은 영화들은 이 시기에 제대로 상영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역시 3S의 총화는 스포츠였다. 스포츠, 이건 방조 정도가 아니라 전두환·신군부 정권이 가장 크게, 아주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프레시안 : 이때 프로 스포츠가 등장하지 않았나.
서중석 : 1982년에 프로 야구가, 1983년에는 프로 축구와 프로 씨름이 출범했다. 지난번 선거에 이만기가 후보로 나왔는데, 이 사람이 1983년 이때 등장한다. 하여튼 그러한 프로 스포츠가 인기를 끌었다. TV에서는 프로 스포츠 중계방송을 긴 시간 동안, 자주 내보내며 대단히 크게 다뤘다.
프로 야구는 전두환·신군부 정권이 1981년부터 얘기를 꺼냈다. 그 후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주요 기업들이 프로 야구 구단을 맡도록 독려했다. 1982년 1월에는 청와대에서 직접 나서서 프로 야구 출범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청와대에서는 지역별로 구단을 선정해 서로 경쟁하되 어느 한 구단이 압도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일이 생기지는 않는 쪽으로 분위기를 만들도록 했다.
그렇지만 기업들을 끌어들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예컨대 호남의 경우 삼양사도, 금호에서도 못하겠다고 하면서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해태 타이거즈가 이쪽에서 나오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 프로야구가 출범하는데, 개막전에서 전두환이 시구하는 모습이 요란하게 TV 화면에 나왔다. 전두환은 프로 야구를 황금 시간대에 중계하도록 직접 지시했다. 당시 정부에서 스포츠를 얼마나 장려했는가는 TV에서 얼마만큼 큰 비중으로 방영했는가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한 자료에 의하면, TV 프로그램 편성에서 스포츠 중계 비율이 1981년에는 19퍼센트였는데 1982년에는 27퍼센트로, 1983년에는 28.2퍼센트로 높아졌다. 그것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잡는다고 뭔가 조치를 취한 것인지 1984년, 1985년에는 25퍼센트를 유지했다. 아울러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를 많이 실은 <선데이 서울>(1968년 창간) 같은 주간지가 유신 쿠데타 이전부터 이미 나왔지만, 1985년쯤 가면 그런 주간지 외에도 프로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를 전문으로 다루는 일간지들도 많이 팔리고 종합 일간지에서도 스포츠 면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일본 극우가 전두환·신군부 정권에 올림픽 개최를 권한 속내
서중석 : 전두환·신군부 정권의 스포츠 장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올림픽 유치다. 올림픽 유치는 원래 박정희 정권 말기에 한번 해보자고 했지만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고, 최규하 정부에 와서는 포기하는 쪽으로 갔다. 전두환이 권력을 잡은 후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일본에서 온 세지마 류조 특사 일행의 역할이 상당히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자민당 정권은 1979년 12월 이후 1980년 5월 12일까지 여섯 차례나 전두환·신군부에 남침 정보를 줬다. 그렇게 하면서 전두환·신군부에 강한 호의를 보이고 지원을 했다. 광주항쟁 시기인 1980년 5월 20일에는 마에다 도시카즈를 특명 전권 대사로 파견했다. 마에다 도시카즈는 그 후 주한 일본 대사를 맡게 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특명 전권 대사로 한국에 왔을 때 최규하 대통령은 만나지도 않고 광주 무력 진압 다음 날인 5월 28일 전두환과 회담했다. 6월 9일에는 기우찌 아끼다네 외무성 아시아국장이 방한해서 전두환 쪽에 호의를 보였고, 6월 하순에는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 세지마 류조가 비공식 특사로 방문했다. 그러고서 8월에 또 방문하게 된다.
세지마 류조 회고록에 의하면 1980년 3월 이병철이 "전두환, 노태우 두 장군을 만나 격려와 조언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이걸 보더라도 일본 자민당 정권이나 한국의 주요 재벌에서는 박정희 유신 정권에 이어 전두환·신군부 정권이 출현하기를 강하게 바랐고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나름대로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지마 류조하고 일본 상공회의소 회장 고토 노보루, 이 두 사람이 1980년 6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왔다. 두 번째 왔을 때 올림픽 얘기를 했다. 많은 책들에 세지마 류조가 얘기한 걸로 돼 있지만, 세지마 류조 회고록에는 고토 노보루가 말했다고 돼 있다. 그렇지만 세지마 류조가 말했다고 한 게 꼭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두 사람이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토 노보루는 일본의 경험, 즉 1964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한 경험 같은 것에 비춰볼 때 올림픽이나 박람회가 민심을 끌어들이는 데 대단히 큰 역할을 한다고 얘기했다. 전두환·신군부 정권으로서는 귀가 아주 솔깃한 말을 해준 것이다. 고토 노보루는 귀국 후에도 당시 올림픽 유치 신청을 한 나고야에 대해 '한국의 유치 노력에 반대하지 말라'고 막후에서 노력했다고 그런다.
자신들의 작은 명예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본 것, 그러니까 한국에 극우 군사 정권이 존속하는 게 일본에 얼마나 유리한 일인가를 생각하고 그걸 우선시한 것 아닌가. 일본의 극우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가를 올림픽 유치 문제와 관련해서도 잘 알 수 있다.
프레시안 : 그 후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어떻게 움직였나.
서중석 : 전두환 정권은 적극적으로 올림픽 유치 작전에 들어가게 된다. 유학성 안기부장, 현대의 정주영, 박정희 집권기에 경호실장을 한 박종규 같은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활약하면서 1981년 9월 30일 드디어 서독 바덴바덴에서 88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대단한 개가로 국내에 엄청 크게 보도됐다. 박종규는 오랫동안 그쪽 활동을 했기 때문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쪽에 인적 관계가 아주 넓었고, 정주영은 물적인 것을 뒷받침해줬을 것이다. 그야말로 총력전, 전력투구를 해서 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고 얘기들을 하는데 따지고 보면 나고야가 서울의 상대가 될 수 있었느냐, 또 일본 측에서는 다른 움직임도 있지 않았느냐 하는 걸 생각해볼 수 있다. 도쿄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의 거의 중간 시점에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린 것을 보더라도,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아시아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린다면 그건 한국에서 열릴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기는 있었다. 어쨌든 한국이 굉장히 힘을 들여서 개최권을 따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 1982년에는 문교부 체육국이 독립해서 체육부가 되고 체육입국이라는 걸 대대적으로 내세우게 된다. 그뿐 아니라 선수를 육성하는 일을 상당 부분 재벌들한테 떠넘기게 된다. 예컨대 대한체육회 산하에 33개 단체가 있었는데 그중 25개 단체의 회장이 재벌 총수였다.
이런 식으로 물력을 기울이는 한편 메달을 획득하는 선수에게 병역 혜택을 주는 등의 특별 혜택을 부여하는 방안도 마련했다. (1981년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병역 의무의 특례 규제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했다.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 대회에서 3위 이내에 입상하면 징집을 면제해 보충역에 편입하는 형태였다. 그 이전에 병역 특혜를 누린 선수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양정모뿐이었으나, 시행령 개정 후 병역 혜택을 누리는 선수가 많이 늘어나게 된다. '편집자') 병역 특혜는 한국에서 굉장한 것 아닌가. 그렇게 물적으로도 상당한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으니까 선수들이 얼마나 열심히 했겠나. 그렇지만 그러한 병역 특혜 같은 것이 스포츠 정신과 좀 거리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런 식으로 국가가 동원해서 체육을 장려했는데, 그 의도는 프로 야구를 비롯한 프로 스포츠를 육성한 것과도 연결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다 전두환·신군부 정권이 이전에 저지른 죄가 있어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속에서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올림픽이 열리는데 여기서 엄청난 성과를 거둔다. 그전에는 금메달 하나 따는 것도 어려웠고 주로 손기정 얘기만 했었는데 1984년에는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로 종합 10위를 했다. 그야말로 비약적으로 향상된 성적이었는데, 그 선수들이 들어올 때 환영 인파 수십만 명이 도열했다고 돼 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전두환이 메달을 획득한 선수들과 한 명 한 명 다 악수를 했는데, 그런 것들을 3시간이나 KBS, MBC가 생중계했다.
1981년으로 다시 돌아가면,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유치 결정을 얻어낸 것에 이어 86아시안게임 유치 작전에 들어가서 결국 아시안게임도 유치하게 된다. 그러면서 86, 88 준비에 굉장한 힘을 기울이는데 그 때문에 판자촌 사람들이 고생을 아주 많이 하지 않았나.
(1983년 목동을 시작으로 상계동, 사당동, 돈암동 등 서울 곳곳의 산동네 판자촌에서 합동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개발 사업이 진행된다. 해당 지역에 집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일정한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기에 그래도 사정이 나았지만, 판자촌 주민의 절반이 넘던 세입자들은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을 돌려받는 것만으로는 다른 곳에서 새 주거 공간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국제 행사를 앞두고 대대적인 도시 정비를 시도한 정부, 그리고 재개발로 떼돈을 벌 수 있었던 건설업체들은 강제 철거를 밀어붙였다. 그 때문에 판자촌 주민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철거 반대 투쟁을 처절하게 벌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도 곳곳에서 나타났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국제 행사 개최 전 거리 미화를 명목으로 노점상도 대대적으로 단속했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허울 좋은 올림픽에 도시 빈민 갈 곳 없다" 등의 항의와 "86, 88이 사람 잡는다"는 뼈 있는 이야기가 세간에 나돌았다. '편집자')
이렇게 스포츠 정신과는 어긋난, 쿠데타와 광주 유혈 사태를 일으킨,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강권 억압 정치를 한 군사 정권이 장려한 스포츠 정책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그것의 총화라고도 볼 수 있는 88올림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건 역사를 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힘들게 하는 문제다.
88올림픽을 어떻게 볼 것인가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왜냐하면 단순하게 볼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88올림픽은 일정하게 한국인에게 자긍심, 자존심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어떤 면에서 한국이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 눈총을 많이 받았는데, 올림픽을 계기로 오랜만에 한국이 전 세계에 긍정적으로 부각된 면이 있었다. 물론 독재 정권이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 등 그렇지 않은 점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긍정적으로 부각된 면도 분명히 있었다. 해방 후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한국전쟁, 1970년대 박동선 사건에 이어 3번째로 이 올림픽이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다음에는 2002년 월드컵 축구가 있지 않나. 그게 네 번째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건 88올림픽과 관련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던 건 확실하지만, 이런 것들을 무시할 수만은 없는 측면이 있다.
한국은 일제로부터 유례없는 억압 지배를 받다가 해방이 됐는데 그 후 바로 분단을 맞고 또 전쟁을 겪지 않았나. 그리고 이승만 정권 12년, 거기에다가 유신 체제니 전두환·신군부 정권이니 해가지고 군사 정권이 30년 정도 갔는데 이런 것들 때문에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인들을 얼마나 따끔한 눈초리로 대했나. '한국의 수준이 이 정도냐. 너희 나라는 어째서 그 모양이냐', 이런 얘기를 안 들을 수 없었다. 그런 것 때문에 어디를 가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이다. '지금 너희 나라에서는 어떤 정치를 하고 있느냐', 이 얘기가 나오면 해외에서 뭐라고 답변할 수 있었겠나.
그리고 한국은 해방 후에도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군국주의 왜색 문화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하고도 또 달랐다. 일본은 패전 후 부분적으로는 바뀐 면도 있었는데, 한국에선 군국주의 문화 같은 게 상당히 심했다. 거기에다가 미군정 이래 미국과 연결돼 있는 사대 매판 문화도 있지 않았나. 그것을 반대하는 운동이 1970년대 학생 운동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물론 일제 때보다는 민족적 자긍심이 훨씬 커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국인들은 정신적으로 아주 어렵게 살았다. 민족적 자긍심 같은 걸 갖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 말한 것처럼 88올림픽을 통해 일정한 자긍심도 갖게 되고 전 세계에 한국이 긍정적으로 부각되는 면도 나타난 것이다. 물론 88올림픽은 판자촌 철거 등 어두운 면을 그때도 감췄고 그 이후에도 계속 숨긴 게 사실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전두환·신군부가 정치적 목적과 연결된 속에서 유치했고, 또 메달이라는 것이 스포츠 정신과는 거리가 있는 각종 혜택과 연결된 면이 없지 않아 있는 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속에서 파시즘적인 국가주의가 88올림픽과 관련해 깊이 침투한 면이 보이기는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88올림픽을 통해 많은 한국인이 느낀 자긍심 같은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또 이 시기를 보면 1987년에는 6월항쟁으로 민주주의, 자유, 인권이 두드러지게 신장되는 계기를 만들지 않았나. 그것이 한국인들에게 가져다준 강한 자신감도 있었다. 아울러 한국 역사상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까지 나온 3저 호황도 이 시기였다. 그만큼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 속에서 86아시안게임도 있었지만 특히 88올림픽과 연결돼서 과거와는 다르게 많은 대중이 자기 민족과 사회에 긍지나 자신감을 갖게 한 점은 있다. 그게 꼭 올바른 것이냐 하는 점은 그것대로 논의를 해야 하는 것이지만, 역사가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면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열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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