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과 정부가 합의해 11일 내놓은 부동산 대책은 그동안에 당정이 보여준 기싸움과 팽팽한 논리 대결에 비해 실제 그 내용은 매우 부실해 보인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옛말이 꼭 들어맞는 경우다.
높은 관심을 불러 모았던 분양원가 공개에 대해서는 공공·민간을 불문하고 전면적으로 공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은 대신 현행보다는 원가공개의 폭을 넓혔다는 데에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지만, 원가공개의 취지를 무색하게 할 수 있는 방안이 이번 대책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고분양가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돼 온 택지비를 주변 시세를 고려해서 책정되는 감정평가액을 기준으로 하도록 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지금까지 매입원가와 제세공과금, 금융비용을 합해 산정해 온 택지비를 주변 시세가 반영된 감정평가액을 기준으로 산정하도록 한 대목은 원가 산정 기준을 바꾼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건설사들이 택지비를 부풀려 폭리를 취해 오던 구조를 정부가 합법적으로 인정하겠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강력하게 제기된다.
당·정 간의 지난한 갈등과 대립
이날 정부가 발표한 '1.11 부동산 대책'은 지금까지 정부가 전혀 손을 대지 않던 분양가에 대해 손질을 가미했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을 뜯어보면 왜곡된 분양가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여론을 일단은 피하고 보자는 면피용 대책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대책이 수립된 것은 지난해 11월 발표된 '11.15' 대책에서 부동산 대란을 가져온 요인 중 하나인 고분양가 문제에 대한 대책이 빠졌다는 비판이 비등하자, 여당의 일부 의원들을 중심으로 분양가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강하게 제기된 것이 발단이었다.
여당은 지난해 11월 이미경 열린우리당 의원을 대표로 하는 부동산대책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분양가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여당의 부동산대책 특위가 마련한 방안의 핵심 골자는 분양원가 공개와 분양가 상한제를 공공·민간 구분 없이 모두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여당은 분양원가 공개에 대해 "정부의 주택정책에 대한 높은 불신을 해소하고, 건설사들이 책정하는 분양가에 내포된 수많은 의혹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이같은 여당의 움직임에 대해 정부와 건설업계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여당이 마련하고 있는 방안대로 정책이 집행될 경우 주택 공급이 위축돼 오히려 집값이 폭등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펴면서 여당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언론들은 이를 두고 '당-정 갈등'이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당정 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강봉균 여당 정책위원장 등 관료 출신 여당 내 일부 의원들도 정부의 주장을 거들고 나섰다. 분양가 제도 개선을 둘러싸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당-정 간 갈등이 당내 갈등으로까지 확산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같은 혼란 양상에 대해 시민단체에서는 분양원가 공개 등에 반대하는 정부-여당 일부 의원-건설업계의 행보에 대해 "건설족의 대대적인 반격"이라고 지적한 반면, 정부 관료와 보수 신문들은 여당의 부동산대책특위를 향해 "포퓰리즘적 정치 선동"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진전이 있는 듯 했지만…
이런 대립과 갈등 와중에도 분양가 제도가 일부분 개선될 수 있다는 전망은 높았다.
여당의 부동산대책특위 소속 의원뿐 아니라 김근태 당의장까지 나서서 분양가 제도 개선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나서는 마당에 정부도 여당의 의견을 무조건 무시만 하기는 힘들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실제 정부는 기존 입장을 다소 수정해 몇 차례의 당정협의를 거치면서 공공택지에서만 적용되던 분양가 상한제를 민간 부문까지 확대하고, 공공택지에서 기존 7개 항목만 공개되던 원가를 모두 61개 항목으로 세분화해 원가를 공개하자는 여당의 의견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두고 여당 부동산대책특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말 "분양가 제도 개선은 이제 9부 능선을 넘었다. 민간택지 내 민간아파트의 분양원가 전면 공개만 정부가 수용하면 된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당정은 지난해 말까지 결국 민간택지 내 민간아파트의 분양원가 공개에 대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정부가 민간아파트의 분양원가 공개만큼은 수용할 수 없다며 배수의 진을 치고 나선 데 따른 것이다.
정부의 의도대로 1.11 부동산 대책에서 민간아파트의 분양원가 전면공개는 빠졌다. 그 대신 수도권과 투기과열지역에 한정해 민간아파트도 분양원가를 공개하기로 했다. 이처럼 제한적으로 민간아파트의 분양원가를 공개하기로 한 것은 분양원가의 전면공개를 요구했던 여당과 공개 불가를 고집했던 정부 간의 타협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감정평가액을 기준으로 택지비를 산정한다고?
그나마 원가공개의 범위가 공공택지는 물론이고 수도권과 투기과열지구에 지어지는 민간아파트로까지 확대됐다는 데에 위안을 가질 수도 있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분양가의 60~70%에 달하는 택지비를 매입원가가 아니라 감정평가액을 기준으로 분양가에 산정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감정평가액은 감정평가기관이 주변 시세를 감안해 택지비로 정한 가격을 말한다.
현행 주택법은 택지비를 매입원가와 제세공과금, 금융비용을 합산한 금액을 기준으로 분양가에 산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분양가의 적정성을 따질 수 있는 시스템이 제대로 없었기 때문에 건설사들은 주택법에 정한 기준이 아니라 택지비를 통상 감정평가액을 기준으로 분양가에 산정해 온 것이 사실이다.
땅값은 시간이 흐를수록 통상 오르기 마련이고, 특히 개발 정보가 지역에 유입되면 땅값은 폭등해 왔다. 따라서 건설사들은 매입 당시 지불했던 가격과 분양시기에 땅값을 재평가받은 감정평가액 간의 차액만큼 이윤을 가져갈 수 있었다.
이처럼 분양가의 거품은 택지비가 매입원가가 아닌 감정평가액을 기준으로 산정돼 오면서 주로 발생해 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기존 건설사들의 관행을 그대로 받아들여 감정평가액을 택지비의 산정기준으로 하겠다는 것은 분양원가 공개의 취지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 됐다. 원가공개의 근본 취지는 건설사들이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적정 수준 이상으로 이윤을 가져가는 폭리구조를 제거하자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경실련의 김헌동 본부장은 "감정평가액이 택지비의 기준이 된다면, 원가 공개 자체도 빛이 바랠 뿐 아니라 택지비 등을 기준으로 분양가 상한선을 정하도록 하는 분양가 상한제 역시 실제 분양가를 낮추는 데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요컨대 지난 11.15 부동산 대책에서는 공급확대 로드맵을 통해 건설사에게 수많은 사업 물량을 제시해줬다면, 이번 1.11 대책에서는 건설사들이 편법적으로 택지비를 산정하던 것을 합법화 시킴으로서 기존의 관행에 면죄부를 줬다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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