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 로드맵의 핵심 사안인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과 '복수노조 허용' 문제에 대해 민주노총을 제외한 노사정이 11일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합의'의 내용이라는 것이 이들 문제를 3년 간 유예시킨다는 것이란다. 이들 문제에 대해 이른바 노·사·정이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은 쏙 빠져 있다는 점이 이번 '합의'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달리 생각하면, 이번 합의에 이른 노사정은 그동안 한국식 노사관계를 개혁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동일한 입장을 내비쳐 왔음에도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이 개혁하고자 했던 후진적 노사관계를 3년 동안 더 끌고 가기로 '의기투합'했다는 데 이번 합의의 핵심이 있다고 봐야 할 듯하다.
복수노조 허용 유예,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번 합의를 주도한 사람은 단연 한국노총의 이용득 위원장이다. 평소 과단성 있는 결단을 보여줬던 이 위원장이 난마처럼 뒤엉킨 노사관계 로드맵의 핵심 사안들에 대한 최종 승부수를 사용자 그룹에 던져 동의를 이끌어냈고, 한 차례 기존안을 수정한 끝에 마지막에는 정부마저 무릎 꿇게 했다.
여하튼 이용득 위원장의 리더십과 정치력만큼은 인정해줘야 하는 형국이 됐다. 그러나 이 위원장이 던진 승부수 자체가 후진적 노사관계를 바꿔내고자 한 그간의 열망과 크게 어긋난다는 점은 두고두고 뒷말을 남길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복수노조 허용이 노동자의 기본권 권리에 합당하다고 규정한 국제 노동기준은 휴짓조각이 됐다.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를 비롯한 국제 노동기준이 또 한 차례 한국 땅에서 휴짓조각으로 전락한 것 자체야 어쩌면 작은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동안 건강한 가치관을 갖고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만들어보고자 노동 현장에서 피와 땀을 흘려 온 일선 노동운동가들의 노력과 헌신에 비한다면 말이다.
이번 합의로 3년 유예된 복수노조 허용 조항에 대해서는 사용자 그룹 내에서도 이해득실이 나뉘지만, 노동 현장에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만들어 일할 맛 나는 노동현장을 꿈꿔 왔던 다수 노동운동가들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나아가 무노조 삼성에 노동조합 한 번 만들어 입이 있어도 말 못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가슴 속 깊이 담아둬야만 했던 삼성 노동자들의 한(恨)을 풀어주겠다고 공언해 온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이번 합의로 인해 결과적으로 스스로 한 약속을 스스로 뒤집는 모양새가 됐다.
일 안 하고 노조활동도 제대로 안 하는 전임자를 3년 동안 더 놔두자?
복수노조 허용과 함께 3년 유예된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조항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이 문제는 노동운동가들의 도덕성과도 직결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지금껏 노조 전임자를 줄이려는 정부나 사용자 그룹의 기도에 대해 노동계는 '노조 탄압'이라는 말만 되풀이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 번이라도 '노조 전임자' 답지 않는 일부 전임자들의 문제에 대해 솔직한 반성을 공개적으로 했는지 의문이다. 일도 안 하고 노조 활동도 미온적인 '노조 전임자'들에 대한 자성이 얼굴이 벌개지도록 술을 마신 뒤에만 나온다면 그게 건강한 노동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00년대 들어 재등장한 노동운동 위기론이 여전히 노동계 안팎을 떠돌고 있다. 노동운동의 위기는 노조 전임자가 적어서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노조 전임자가 해야 할 역할에 걸맞은 전임자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보다 사실에 부합할 듯하다.
노동부의 아마추어리즘
한편 이번 노·사·정 3자 간 합의 과정에서 최대 자충수를 둔 측은 노동부인 것 같다. 노동부는 노사정 간 대충돌을 막았다며 자축할지 모르지만, 이번 합의를 통해 사실상 정상적인 노사정 간 사회적 대화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노동부는 이번 협상 동안 두고두고 후회할 실책을 범했다. 지난 8월 말 ILO 아·태 총회 당시 이상수 노동부 장관이 폭발성이 강한 노사정 간 논의 내용을 비공개하기로 한 노사정 간 약속조차 망각하고 그 내용을 기자들에게 흘리면서 이번 협상이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이 장관의 기자브리핑 직후 한국노총이 ILO 아·태 총회장을 철수하면서 노동부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게 됐고, 이와 함께 이번 협상의 주도권은 한국노총으로 넘어갔다. 뒤늦게 이상수 장관이 주변 의견 수렴에 나서는 등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지만 사후약방문에 불과했다는 평가다.
아마추어리즘을 넘어서지 못한 노동부의 이런 어정쩡한 태도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는 이번 9.11 합의가 나오는 토대가 됐다.
노동부가 노사정 간 대충돌 막았다고?
노사정 간의 사회적 대화는 사실상 이번 9.11 합의로 깊은 침잠의 늪에 빠져들었다. 현 정부가 출범 이후 줄곧 강조해 온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은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합의로 민주노총은 앞으로 긴 시간 동안 노사정 간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기 힘들게 됐다. 이미 민주노총은 9.11 합의를 예견하고 지난 8일 노사정대표자회의를 탈퇴했다.
사실 내부 강경파의 거센 반발에도 민주노총의 현 집행부는 사회적 대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 왔다. 그러나 이번 9.11 합의로 인해 민주노총은 또다시 '들러리'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사회적 대화를 강조하던 현 집행부의 입지도 내부에서 크게 줄어들게 됐다.
이같은 상황은 비단 민주노총 내부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대타협을 추구해 온 현 정부의 노동정책도 파국을 맞았음을 의미한다. 또다시 민주노총이 없는 절름발이 노사정 간 사회적 대화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노사정 간 합의는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대타협일지 모르지만 그 속은 곪아 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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