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3일 05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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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문학의 현장] 여진
여진 비가 내리면 창문은 쉽게 울고 있다 아무도 기웃거리지 않는 복도를 지나는 동안 젖은 발자국이 우리를 뒤쫓고 있었다 방금 아이들이 사라진 것 같은 교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음악을 끄고 빗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불안은 혼자 느끼는 것이다 함께 느낀다면 그것은 징조였고 징조의 결과는 침묵이었다 너의 손목이 평소보다 더
양안다 시인
2017.07.20 10:07:09
산정 만가山頂輓歌 25
[문학의 현장] '나'의 절대적 뉘우침이 되어야 하는 까닭
산정 만가山頂輓歌 25 너의 무덤 앞에 옮겨 심은 작은 나무에 물을 주고남기고 간 너의 편지들을 고이 접어 파묻었다편지지 위에 떨어져 얼룩지던 그해 봄날의 눈물도달빛에 함께 씻겨 묻으며 엷은 미소를 묶어 주었다바람이 불어와 작은 나무를 흔들어 한마디 하고 가고계곡의 물소리도 한마디 수런거리며 흘러가는데너와 네가 흘려보내지 않기로 한 순결은 얼음 속처럼맑아지
이규배 시인
2017.07.13 10:35:44
길을 걷는다는 것
[문학의 현장] 나를 더 낮추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길을 걷는다는 것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은 없다길 잃은 노루 한 마리긴 다리 껑충이며 뛰어갔거나어미 따라 토끼새끼 몇 마리집으로 돌아갔거나저보다 큰 양식들 등에 이고개미들 기어갔거나하물며 쇠똥구리 한 마리똥 한 덩이 굴리며 가던 길이었으리 흔들리는 들꽃에도 손길 내주고머문 산새에게도고개 들어 눈길 보내는 일낯선 바람 속으로 온전히 들어서는 일걷는다는 것은앞선
권미강 시인
2017.07.06 10:34:34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문학의 현장]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늘 눈물 나게 한다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세상에 하나뿐인 단골집 식당이 사라졌다그 식당에 드나들던 사람들은사소한 즐거움 하나를 잃어버렸다약속을 잡지 않아도 그곳에 가면낯익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과 맛깔 나는된장찌개 내주던 할머니 백반집도 사라지고알싸한 고향 바다 냄새를 토하며한여름 허기를 달래주던 깡다리 집도 사라졌다기막힌 국물로 국수를 말아주
김완 시인
2017.06.29 08:30:23
직업학교 인근 사진관
[문학의 현장] 허리를 쭉 펴고, 미소를 띠고
직업학교 인근 사진관 허리를 쭉 펴시고 고개는 조금 왼쪽아니 다시 오른쪽, 턱은 내리고미소를 살짝 머금으세요 네, 하나 둘 취업상담사는 고개를 저었다삶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죽을 때 행복하게 죽고 싶다는 답변다른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사회 구성원으로 잘 살아가려면자격증이 필요하지요, 유용한 자격증그런 것이라면 나에게는2종 보통 운전면허증 밖에 없다 누구
이진희 시인
2017.06.22 09:35:26
해와 바람의 나라에서
[문학의 현장] 태양과 바람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해와 바람의 나라에서 태고 적부터 하늘님 나라에는 해도 비치고 바람도 불었다그 나라에 하늘님은 자신을 닮은 호모사피엔스를 내려 보냈다다른 자식들도 데리고 잘 보살피며 살라고 타이르시며호모사피엔스는 해와 바람을 경배하며 다소곳하고 겸손하게 살았지늘 하늘을 우러르고 대지의 품에 꼬옥 안겨서시간이 지나면서 호모사피엔스는 궁금해졌다어머니 세상이 어떤 것인지이것저것
김광철 시인
2017.06.14 16:06:24
우리 옆집 티벳 아저씨
[문학의 현장] 느긋했던 그의 보폭이 더 느려졌다
우리 옆집 티베트 아저씨 우리 옆집 티베트 아저씨가 또 실직했다. 그래서일까 세상에서 가장 느긋했던 그의 보폭이 더 느려졌다. 뙤약볕 아래에서 그는 걷는 것이 아니라 걷는 폼으로 멈추어 있는 것 같다. 그는 왜 세계의 지붕인 자기의 조국에서 내려왔을까. 왜 여기 이 바닥까지 왔을까. 히말라야의 시리도록 푸른 공기가 그의 폐부를
오민석 시인
2017.06.08 10:09:26
나문재
[문학의 현장] 고단한 밤을 지나가리라
파도 발굽에 채이며 맨몸으로피는 풀짠 기운 온몸 붉게 물들여도버티는 풀들이 있다삶의 개펄에서 밀리고 내동댕이쳐지는풀들흙탕물 밀어내며 고개 다시 드는 붉은 풀들심장 고동소리는 파도소리에 자꾸 묻힌다 짠물에 간까지 졸아들다가다시 햇살에 잠시 풀리다가 비정규적으로 간헐적으로달빛에 쉬다가다시 목숨을 위협하는 허기에 휩싸인다 뒷북을 치는 손짓들뒷전으로 밀리는
권순자 시인
2017.06.01 08:07:46
잠들지 못하는 소녀
[문학의 현장] 나비가 하늘을 날아갈 수 있는 그날까지
잠들지 못하는 소녀 수요일은 소녀이거나 할머니다 광둥에서 왔다든가 말레시에서 왔다든가작년에도 열여섯, 올해도 열여섯잠을 잃어버린 소녀가 있다 청동 손가락으로 일기를 쓰고시간을 달리지만 일어서지 못하는결이 없는 소녀 시퍼런 강철 머리칼 속땅을 딛지 못한 맨발의 기억을 거닐며 눈빛이 내일로 기울어지듯숨결이 급한 발자국 소리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찡한 모자이크
봉윤숙 시인
2017.05.25 09:49:34
진실 인양을 위한 사투(死鬪)의 시간
[문학의 현장] 서툰 사람들
서툰 사람들 날이 풀렸다는 예보에도 겹겹으로 외출하는 습관겨울이 끝났으나 다음 계절이 없었다봄은 장롱 안에서 소진돼 가라고 그냥 두었다보고 싶다는 말아름답다는 말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면눈물이 나,나는 기도했지당신이 잃었으면 (눈을)당신이 알았으면 (피를)당신이 앓았으면 (비로소 사월을) 한때는 세상의 모든 병원을 무너뜨릴 꽃이,꽃이 피고 있다고 믿었지지금 이
김은경 시인
2017.05.16 10: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