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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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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문학의 현장] 여진

여진

비가 내리면 창문은 쉽게 울고 있다 아무도 기웃거리지 않는 복도를 지나는 동안 젖은 발자국이 우리를 뒤쫓고 있었다

방금 아이들이 사라진 것 같은 교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음악을 끄고 빗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불안은 혼자 느끼는 것이다 함께 느낀다면 그것은 징조였고 징조의 결과는 침묵이었다 너의 손목이 평소보다 더 야위어 보이는 어두운 교실

너는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고 나는 그게 빗소리라고 말하며 창문을 가리켰다 창 위로 비가 쏟아지는데 저 입김은 누가 남기고 간 것일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었던 걸까 항상 문제는 외부에서 스며들어 내부를 물들이고 흔들었는데

너의 손목 위에선 초침이 거꾸로 돌고 있었다 그것은 어젯밤 꿈이거나 현재의 환상이었다 시계는 거꾸로 찬다고 거꾸로 돌지 않으니까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척했다 괜찮을 거라고, 빗소리에 목소리를 섞으며 말했다 너는 어깨를 살짝 떨고 있었다 나는 이미 세계가 사라진 것처럼 울고 싶었지만

너의 어깨를 잡자 너의 흔들림이 내 눈앞을 흔들었다 교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비의 꼬리를 따라 창문에 금이 가고 있었다

ⓒ사진공동취재단


시작노트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내가 가장 혐오한 것은 조롱이었다. 세월호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식도 믿기지 않았지만,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만큼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 않았던 건 세월호에 대한 조롱이었다. 처음에는 혐오감을 느끼기보단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너무 많았다. 한둘도 아니고 너무 많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 그 사람들이 내 주위에, 같은 칸의 지하철에, 인파로 가득한 거리에, 자주 가는 식당에, 어디든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까, 이 문장에서 '사람의 입'이란 신체의 기관만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저 문장에서 강조되는 건 입이 아니라 사람이 아닐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와 같은 뜻으로 읽어도 괜찮은 걸까.

한번은 광장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의 일이었다. 당시에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내 가방을 자꾸 만지작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자주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지하철은 사람으로 가득했고, 그래서 그 '만지작거리는 느낌'을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는 거라고 여겼다. 광장에서 돌아올 때 알게 된 것은 가방에 달린 세월호 리본이 떼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어느 날 아침, 나는 평상시처럼 일어나자마자 노트북을 켰고, 실시간 검색어에서 세월호라는 단어를 볼 수 있었고, 이게 무슨 일인지 싶다가, 전원 구조됐구나 다행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라면을 끓여 먹고 강의실로 향했다. 그날 어느 교수님이 말했다. 가능하면 오늘만큼은 술을 마시지 말라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나는 그날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내 가방에 달린 세월호 리본을 떼어낸 걸까. 나는 그저 사람들과 부대끼다가 떨어진 것으로 믿고 싶고, 믿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떼어낸 거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믿기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들이 여전히 너무 많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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