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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후반 '기억투쟁과 철학운동'의 현재적 의미
[이종범의 사림열전] '사림열전'을 마치며
또한 실천적 역사학은 미래를 향한 전망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어떤 시대, 어떤 장소에서 일어났던 간에 세상을 향한 진실과 열정을 가진 인간들의 갈등과 경쟁, 멈춤과 늦춤을 하나의 강으로 한 데 묶어 흐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장소와 시간에
이종범 조선대 교수
2007.11.28 01:16:00
말과 글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金宏弼): 침묵, 미래와의 대화 ⑥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학벌로 나뉘고 지역으로 갈리고 세대로 갈라서 혹심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15세기 후반 엄청난 한파를 견디다 쓰러진 사림들이 무어라 할까? 스승은 사람에 있지 아니한데 하물며 학교에 있을까, 고장의 빛을 찾았을 때 손님이 오는 길이 열리거늘 손바
2007.11.26 00:59:00
자유여행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金宏弼): 침묵, 미래와의 대화 ⑤
김굉필은 존재로서 사람을 감화시켰다. 광양의 청년 최산두(崔山斗)는 김굉필을 깊이 흠모하며 학문에 매진하여 중종 치세 혁신정치의 주역으로 성장하였다.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를 당한 후로는 김인후와 유희춘 등 후진을 계도하였다. 간혹 찾아오는 젊은이를 가르치기도
2007.11.23 07:55:00
침묵의 설계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金宏弼): 침묵, 미래와의 대화 ④
김굉필이 글의 제목을 '한빙'이라고 한 것도 까닭이 있었다. 세 가지 의도를 담았다. 먼저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보다 푸르고(靑出於藍), 물이 얼어 생긴 얼음은 물보다 차갑다(氷寒於水)'고 하여 후배가 선배보다, 제자가 스승보다 진취가 있어야 한
2007.11.21 01:47:00
교사의 길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金宏弼): 침묵, 미래와의 대화 ③
김굉필이 남긴 단 한편의 부(賦), '추호라도 태산과 견줄 수 있다'는 「추호가병태산부(秋毫可竝泰山賦)」가 있다. 추호는 형체와 외관만 보면 보잘것없는 무의미한 존재이며, 태산은 웅장한 외형 때문에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의미의 존재였다. 그래서 흔
2007.11.19 00:27:00
환희와 결별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金宏弼): 침묵, 미래와의 대화 ②
김굉필은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자 문하에 들었다. 처음에 곽승화(郭承華)와 같이 간 모양이다. 훗날 임진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고조이다. 예로부터의 관행에 따라 예물과 글을 바치는 속수집지(束脩執贄)의 예를 올렸을 것인데, 두 사람의 글은 없고 김종직의 「김
2007.11.16 07:58:00
미로(迷路) 찾기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金宏弼): 침묵, 미래와의 대화 ①
김굉필은 젊은 시절 한때를 제외하면 평생을 고요하게 살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침묵에 관한 공자의 '잘 꾸민 말은 덕을 어지럽히며' '나라에 도가 없으면 자신을 거두고 감추며,' 또한 '더불어 말할 수 없는데도 말을 하면 말을 잃는다'
2007.11.14 00:26:00
아는 만큼 힘들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일손(金馹孫): 당신의 죽음은 하늘의 시샘이었다 ⑥
이렇듯 김일손은 열다섯 살부터 이십 대 후반까지 세조의 치세를 은둔으로 저항한 노(老)선비를 차례로 탐방하였다. 그것은 차라리 순례였으며, 우리나라 기억운동, 당대사 바로쓰기 역사운동의 원형을 잉태한 풍경이었다. 따라서 김일손의 역사투쟁은 결코 섣부른 모험주의
2007.11.12 00:39:00
무서운 세상이 오고 있구나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일손(金馹孫): 당신의 죽음은 하늘의 시샘이었다 ⑤
이해 늦가을 김일손은 다시 조정에 복귀하였다. 하루는 뜰에 서 있는데 삭풍이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모든 풀이 엎드리는데 한 치도 못되는 촌초(寸草)가 굳세게 버티고 있었다. 문득 '질풍이 불어야 굳센 풀을 알 수 있구나' 하였다. 「질풍지경초부(疾風知勁草
2007.11.09 10:49:00
기상과 언론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일손(金馹孫): 당신의 죽음은 하늘의 시샘이었다 ④
김일손의 언론은 임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의 숨김이 없었다. 성종 20년(1489) 7월 예문관 검열로 있으면서 '임금이 술을 좋아하고 희첩을 가까이하며, 종친과 기락(妓樂)을 즐기는 폐단'을 아뢰었다. 폐비사건을 겪을 만큼 후궁이 많고, 또한 대왕대비와 왕대비,
2007.11.07 01: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