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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金宏弼): 침묵, 미래와의 대화 ⑥

일그러진 분노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좋은 세상에 대한 바람이 간절히 일어났다. 그러나 반정공신은 좀처럼 지난 세월의 짓궂은 칙칙함을 씻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연산군의 치하의 악정에서 자유스럽지 못한 때문이었다. 민첩하고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가 공신이 된 시절이었다. 거짓 공신도 많았다. 오히려 박원종(朴元宗)은 '왕의 여자'까지 차지하고, 구악(舊惡)의 장본인 유자광의 거들먹거림은 계속되었다. 한때 강건한 이름을 얻었던 성희안(成希顔)은 뇌물세례를 당하였다. '임금이 바뀌었으니 세상은 맑아지겠지' 하던 소망들은 숨죽이며 분노하였다.

반정이 있고 반 년, 박경(朴耕)과 김공저(金公著)가 무한권력을 휘두르는 박원종과 유자광이 반역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주고받았다. 중종 2년(1507) 윤(閏) 정월이었다. 김공저는 의술이 높아 고위 관료를 예우하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오른 당대의 국의(國醫)였으며, 박경은 서자 출신이기 때문에 승문원이나 교서관 등에 소속되어 국가 문서나 간행 도서를 필사하는 사서관(寫書官)으로 살았던 명필이었다.

특히 박경은 김일손과 기맥이 통하여 홍인문 밖에서 '영응대군(永膺大君) 부인 송씨가 중 학조(學祖)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방문(榜文)을 보고 알렸다가, 김일손이 사초에 적는 바람에 호된 고문을 당하고 겨우 살아난 적이 있었다. 김일손의 인물평이 있다. "박경의 사람됨은 잠부(潛夫)에 가깝다. 집이 가난하여 글씨로 먹고 살아갈 뿐이지 그 뜻은 글씨에 있지 않다." 세상을 향한 높고 강개한 뜻을 드러낼 수 없어 숨기고 산다는 것이다. 「박눌 글씨에 적은 강혼의 발문에 적다」에 있다.

글씨와 의술이 뛰어나서 종친·문인관료 등 각계 인사와 접촉이 많았던 두 사람은 병조판서 김감(金勘), 대사헌 이계맹(李繼孟), 공조참의 유숭조(柳崇祖) 등을 만났다. 김감과 이계맹은 김종직의 문인이었고, 유숭조는 성균관의 사유로 경학에 밝아 『칠서언해(七書諺解)』 등으로 훗날 경전의 언해 작업의 선구가 되었다. 박경 등의 발언을 종합하여 옮긴다.

선비들은 이욕에 빠져 있는 박원종이나 문사를 많이 죽인 유자광으로 인해 화가 다시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원망하고 있으니, 두 사람이 없어져야 좋은 정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주상에게 알려야 한다. 『중종실록』 2년 윤(閏)정월 25일~28일

새 임금이 새 정사를 펼치려면 박원종과 유자광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폐주가 병이 들어 금상(今上)에게 양위한 것으로 꾸린 주문'을 중국에 보낸 사실도 거론하였다. 반정의 명분을 스스로 훼손하였으니 공신이야말로 금상의 역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정미수(鄭眉壽)나 윤탕로(尹湯老)가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중종의 외숙인 윤탕로는 믿을 수 없어 포기하고 정미수에게 기대를 걸고 의향을 떠보았으나 빈말로 들었다. 문종의 외손인 정미수는 오랫동안 버림을 받았고 성종 치세에 조정에 나와서도 반정 이후에 원로공신의 반열에 있지만 권력이 없었으므로 자신들의 의견을 따라 줄 것으로 지레짐작한 것이다.

구체적 행동이 있었다. 옛적부터 '반역은 공신과 왕실의 인척에서 나왔다'는 역사를 들추며 박원종과 유자광이 모반할지 모른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여론을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무력시위를 감당할 만한 무인도 물색하였다. "토끼를 잡으려면 좋은 사냥개가 있어야 한다." 진사 출신으로 무과로 발신한 특이한 경력의 이장길(李長吉)을 포섭대상으로 꼽았다. 임사홍의 당여로 활약한 때문에 폐고를 당하였는데, 박원종과는 기생을 두고 원수지간이었다. 무재를 갖춘 변화무쌍한 변신, 박원종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과 의중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이들이 접촉한 인사들은 임금을 갈아치울 수밖에 없었던 비상한 시국이 제자리를 찾기 전, 없을 수 없는 불만 정도로 치부한 것이다. 박원종 등의 막강 권세,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유자광의 간계가 두렵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발적 언동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의술과 명필로 상당한 신뢰를 쌓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묘사림의 숨은 그림

어느 날 조광보(趙廣輔)가 박경과 김공저의 대화를 엿들었다. 한때 식견이 고명하다는 평판도 있지만 간혹 발광 증세가 있었는데, 연산군 치세에 '간신 임사홍의 목을 누가 벨 것인가!' 소리친 적도 있었다. 약을 구하러 김공저를 찾았을 때였을 것이다.

조광보는 거리낌 없이 큰 소리를 쳤다. "박원종과 유자광이 없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 친동생 조광좌(趙廣佐)가 걱정이 되어 문서귀(文瑞龜)에게 알렸다. 평소 '유자광은 변화무상한 소인이다'고 한 언행을 믿고 돌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형을 설득해 주도록 부탁한 것이다. 문서귀는 조광좌의 처삼촌이며 조광보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조광보를 만나본 문서귀는 '큰 소리'의 뿌리가 박경과 김공저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심정(沈貞)에게 알렸다. 그리고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박경을 찾았다. 문서귀를 모르지 않았던 박경은 '박원종과 유자광을 없애야 새로운 정치를 펼쳐진다는 생각을 여러 사람에게 알렸다'는 사실을 서슴없이 말해주었다.

박경과 문서귀는 김식(金湜)의 집에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박경은 '병권을 잡은 사람이 없으니 대사가 어려울 것이다'고 하였다. 문서귀도 분명 '박경 등은 생각뿐이었구나' 하였을 것이다. 그때 김식의 집에는 조광조와 조광좌도 있었다. 조광조는 김식과 절친한 친구였고, 조광보·광좌와는 재종간(再從間)이었다.

문서귀에게 모든 사실을 들은 심정은 남곤과 상의하였다. 남곤 역시 김공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다. 그리하여 상중이던 남곤이 상복을 입은 채로 대궐에 나가 고변을 하게 되었다.

박경과 김공저는 참형을 당하였고 두 사람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고발하지 않은 정미수, 김감 등과 영문도 모른 채 말려들 뻔했던 이장길은 유배를 갔다. 조광보는 광증 때문에 곤장을 당하였을 뿐 풀려났고, 조광조·조광좌·김식은 모임에서 들은 사실을 공술하는 선에서 무마되었다.

'박경·김공저 옥사'는 시대의 변화와 백성의 소망을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 욕심과 오만한 권력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분노와 어쩔 수 없는 불만'이 빚어낸 풍경이었다. 여기에 숨은 그림이 있다.

하나, 조광보의 외침. 조광보는 국청에서 '문서귀는 항상 유자광이 우리 스승 김굉필을 죽였기 때문에 무사를 구하여 가만히 습격하려고 하였다'고 소리를 쳤다. 문서귀는 김굉필의 제자였던 것이다.

둘, 이장길의 변신과 악행. 이장길은 김굉필과 동문수학한 이승언(李承彦)의 첫째 아들로 김굉필에게 배웠다. 한때 '이현손·이적(李勣)·최충성(崔忠成) 등과 함께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로 이름이 높았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 나온다. 그러나 무과로 발신한 후로는 연산군의 폐희(嬖姬)와 결탁하고 임사홍을 추종하였으며, 심지어 동생 이장곤(李長坤)이 유배지 거제에서 망명하자 체포에 나서 제수의 손발을 묶는 등 패악을 저질렀다. 이러한 변신과 악행을 알게 된 이황이 넌더리를 쳤다. "정자의 문하에도 형서(邢恕)와 같이 악행을 저지르는 제자가 있었는데 이장길이 바로 형서가 아닌가!" 그런데 이장길이 체포되자 다른 동생 이장성(李長城)과 이장배(李長培)는 도망을 갔다. 이장배는 김굉필의 둘째 사위였다.

공교롭게도 김굉필의 제자와 사위가 옥사의 고발자와 본의 아닌 연루자 그리고 도망자였던 것이다. 누가 이 엉킨 실타래를 풀 것인가? 또 하나의 숨은 그림에 해법이 있다.

셋, 국청에서의 조광조·김식 등이 공술한 박경의 포부와 정론. 박경은 거침이 없었다.

'유생들이 과거 공부에 구애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지 않는다.'
'과거가 선비를 뽑는 좋은 법이 아니며 인재 등용은 자품(資品)이 아니라 능력으로 해야 한다.'
'어진 종친을 육조 등에 등용하고 서얼은 허통하여야 한다.'


박경은 훗날 기묘사림의 혁신정치가 추구하는 정책을 이미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이 시행하는 조정이 들어서고 서로의 앙금을 없애는 정치가 이루어지면 동지와 친지 사이의 배반과 음모, 고변과 도망은 줄어들 것이었다.

부활의 미완성

중종 5년(1510) 봄 진사가 된 조광조는 김식 등과 같이 성균관에 출입하였다. 이 시절 모습이 『중종실록』에 전한다.

김식·조광조 등이 김굉필의 학문을 전수(傳受)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고 관대(冠帶)를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서 빈객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는데, 성균관에서 '저들이 스스로 사성 십철(四聖十哲)이라 일컫고 있다' 하며 예문관·승문원·교서관과 통모(通謀)하여 죄를 얽어 몰아넣으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중종 5년 10월 10일

조광조 등이 성균관에서 배척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김굉필과 최부 등의 '정지교부계', 강응정과 남효온 등의 '소학계'와 같은 모임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성균관에서의 수신을 중심하는 학풍쇄신운동, 나아가 성인 배우기에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굉필은 이렇게 살아나고 있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산등성이가 다람쥐 같다고 하여 다람재라고 하는 고개 아래 낙동강 개경포가 훤히 보이는 곳에 있다. '도가 마침내 동쪽으로 왔다'는 '도과동(道果東)'의 뜻이 있는 도동서원은 선조 원년(1568) 비슬산 아래 쌍계동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8년(1605)에 이곳으로 옮겼다. 서원 앞 큰 은행나무는 조식과 이황의 문인으로 김굉필의 외증손이 되는 정구(鄭逑)가 심었다. 기록에 드러난 행적을 중심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학술적 문장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조정과 국왕을 비판한 적도 거의 없으며, 천거로 나선 조정에서 관직도 높지 않았으며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 사실에 김굉필이 곤혹스러울 것이다. 또한 현란한 언변을 과시하다가 간혹 무거운 침묵을 겹칠 줄 아는 수사적 처세술을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날카로운 언변과 순발력 있는 논설을 내세운 적이 없는 김굉필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맥락에서 그의 언행과 침묵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그의 묵언과 과문(寡文)이야말로 내일과 호흡하며 미래를 설계하기 위하여 빛을 감추고 흔적을 숨겼던 고육책이었구나, 할 것이다.

김굉필 사후 13년, 그리고 '박경 옥사' 10년. 중종 12년(1517) 8월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으로 정몽주가 '동방 도학의 효시'라면 김굉필은 '성리학의 연원을 찾아낸 오직 한 사람으로 만세의 사표'라는 주장을 올렸다. 두 사람의 문묘종사를 건의하는 상소였다.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조광조, 김식 등 신진세력의 뜻이기도 하였다.

집권실세인 정광필·김전·남곤·심정 등은 반대하였다. "김굉필은 힘들게 절개를 지키고 깨끗하게 몸을 닦은 고절(苦節) 청수(淸修)의 선비일 따름이다." 김굉필 종사론이 신진사림의 세력 확대로 연결되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정광필은 '김굉필 종사론'이 제기되기 전까지는 '성리학의 정파(正派)를 얻은 현자'라고 치켜세웠었다. 자제를 김굉필에게 보내 배우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웃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지만 도(道)를 밝혔다고 하는 장소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정치적 이해득실로 말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공자의 학문을 밝게 들춰낸 적이 없다' 혹은 '글로 밝혀 후세에 전한 입언수후(立言垂後)의 공이 없다'는 이유를 제시하였다.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왜 글이 없으며, 무엇을 가르쳤는가는 애써 함구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조광조 등은 공자의 참뜻을 잠심(潛心) 혹은 전심(專心)하며 실천한 점을 내세워 반격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학술의 구체적 성과가 드러나지 않음을 달리 변명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정몽주만 종사하고 김굉필을 제외하기로 결론이 났고, 기묘사화 이후 더 이상 제기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김굉필과 김종직의 차별화가 진행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개성의 산사에서 같이 공부한 기준(奇遵)이 처음 밝혔다.

김굉필은 처음에는 김종직에게 수업하여 그 문호를 조금 알았지만, 송나라 유현이 남겨준 단서는 자득(自得)하였으며, 평소에 정도(正道)를 닦은 공(功)이 지극하였기에 사림들이 사모하여 착한 마음을 일으켰고 다투어 본받고자 하였다. 『중종실록』 12년 8월 8일

김굉필이 김종직에게 수업하였지만 송학의 참뜻은 스스로 얻었으며, 또한 존재로서 후진을 분발케 하였다는 것이다. 기준은 사도(師道)의 본질과 진흥을 묻는 책문(策問)에도 이렇게 답한 바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세의 스승으로 최충·이색·권근·김종직을 말하지만 최충은 공맹의 학문이 아니고, 이색은 문사(文詞)를 예쁘게 가꾸고 이록(利祿)을 취하고자 하였으며, 권근은 이학의 종장이라고 하지만 입신과 사업이 비루할 뿐이며, 김종직은 정몽주를 도학의 비조로 삼고 제자를 가르쳤다고 하지만 사도를 진기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입사도(立師道)」

최충·이색·권근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도학을 전수한 김종직조차 스승의 길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고 평가한 것이다. 기준이 생각하는 참 스승은 문장과 과거 수업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실천을 인도하는 데에 있었다. 즉 학자의 천선(遷善)이라는 진정한 책무의 차원에서 살피면 김종직 또한 미진하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적지 않았으나 기준이 생각하는 진정한 스승은 김굉필이었는지 모른다.

김굉필과 김종직의 관계에 따른 평가는 훗날 더욱 굳어졌다. 김굉필 종사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거친 1년 후의 실록의 사론에 나온다.

김굉필은 처음에 당세의 명유(名儒)인 김종직의 문하에 수학하였는데, 그의 학문이 문장(文章)에 치우치므로 마음으로 꺼려하여 오로지 성학에 뜻을 두었다. 『중종실록』 13년 4월 28일

김굉필이 김종직과 결별한 것은 문장 중심인가, 도학 중심인가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이황과 조식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16세기 중엽 사림의 정론으로 굳어졌다. 김굉필을 동방 도학의 독보적 존재로 부각하고 김종직을 '문인'으로 치부한 평가에 대하여 김굉필은 미소 지을까? 아닐 것이다. 언제까지 갈라섬에 집착할 것인가 하며, 여태껏 경계 짓는 말과 글로 세상을 바꾸려 하는가 하지 않을까?

에필로그: 스승과 제자의 유쾌한 풍경

오늘날에도 김종직과 김굉필의 관계를 갈라섬만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김굉필과 김종직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16세기 자료가 두 사람의 갈라섬을 확정한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종직에 대한 존경이 남달랐던 김일손은 기꺼이 김굉필과 가야산을 갔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김종직과 김굉필이 소통하고 화해하였다는 징후를 애써 찾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제관계의 진정한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은 한결같지 않다.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있다면 '입신출세에 필요한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지식과 요령의 전달 역할'이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만남은 선택이 아니라 상황과 제도에 의하여 주어지며 서로의 이해와 필요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삶의 가치와 인생의 행로'로 묶이면 사정이 다르다. 여기에 진정한 사제관계가 성립한다. 이때 스승과 제자는 서로 배움이 있어야 하며, 특히 잘못을 바로잡고 덕목을 실천함에는 양보가 있을 수 없다. 공자가 말하였다. '세 사람이 가면 스승이 있고', '인을 감당함에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또한 진정한 스승과 제자라면 서로 숨김이 없어야 한다. 공자가 주유천하하면서 위나라를 갔는데, 위영공(衛靈公)의 부인으로 근친상간의 소문이 있고 정치적 음모를 꾸미는 등 평판이 좋지 않던 남자(南子)의 요청으로 공자가 만나자, 용맹하나 온화하고 남이 단점을 말하면 즐거워한 그러나 성격이 다소 급한 자로(子路)는 좋지 않은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공자도 맹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잘못된 일을 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 하늘이 나를 버리실 것이리라!"

공자 역시 제자를 서슴없이 비판하였다. 능란하고 눈치 빠르게 시세를 탔던 염구(冉求)가 백성에게 세금을 스스럼없이 걷어대자 '그는 우리의 무리가 아니다. 아이들아, 북을 울려 그를 공격하라' 분노하였으며, 말을 잘하지만 게으르고 조금은 반항적인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고 있자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거름흙 담장은 흙손질을 할 수 없다'며 넌더리를 쳤다.

공자는 말하였다. '말 잘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고 지나치게 공손한 것, 그리고 원망을 감추고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좌구명(左丘明)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러워한다.' 좌구명은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며 『좌씨전(左氏傳)』과 『국어(國語)』라고 하는 역사책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종직이 제자들에게 과거를 요구하고 이들이 벼슬에 나간 것에 보람을 느꼈다고 하여도 이들 대부분이 김종직과 역사적 의미의 진정한 사제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스승을 직접 비판한 김굉필이 진정한 의미의 제자이며, 마침내 김굉필과 화해한 김일손이 진정한 우애를 보였던 것이다.

대학입시나 국가시험, 나아가 지위와 재물로 맺어진 관계의 즐거움이 쉽게 세파에 휩쓸려가는 요즈음에도 세상을 향한 진실과 희생을 매개로 한 진실관계가 오래도록 변치 않는 지란(芝蘭)의 향기를 주고받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학벌로 나뉘고 지역으로 갈리고 세대로 갈라서 혹심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15세기 후반 엄청난 한파를 견디다 쓰러진 사림들이 무어라 할까? 스승은 사람에 있지 아니한데 하물며 학교에 있을까, 고장의 빛을 찾았을 때 손님이 오는 길이 열리거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 같으며, 진정한 모습을 가리고 온통 찬양하거나 가볍게 배척하니 유교의 가치가 묻히는 것이 아닌가, 할 것 같다.

또한 스승과의 갈림, 동료와의 틈새가 있었다고 하여도 지금까지 확대재생산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음이야말로 '다름과 나눔을 통한 관계'를 거부하는 권력과 재물의 개입과 공세에 포위당한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고, 그러면서 우리 각자의 도전과 좌절, 우리의 아픔과 죽음을 등대 삼아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인식하기 바란다면 갈라섬과 엇갈림을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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