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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金宏弼): 침묵, 미래와의 대화 ⑤

유배지에서 생긴 일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지어 조정을 비방하고 국정을 논란하였다'는 죄목에 걸렸다. 양희지가 위로하였다. "반드시 살아 돌아올 것이니 응당 웃음 머금고 길을 떠나시고 부디 곤궁과 횡액 중에도 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겠네."

유배지는 평안도 희천이었다. 묘향산을 넘어 청천강 상류에 있는 깊은 산중 고을이었다. 얼마 후 이의무(李宜茂)가 이웃 고을 어천역으로 유배를 왔다. 김굉필이 첫 벼슬로 남부참봉을 받았을 때 '행실과 학문이 있는 선비에게 참봉을 시키는 것은 유일(遺逸)을 찾는 본래 취지가 아니다'고 건의하여 전생서 주부로 옮기도록 배려한 인연이 있었다. 이의무가 반가워,

같이 왔으니 잠시라도 손을 잡고 同來聊把手
각자 서로 아픈 상처를 씻어내자 一別各傷神


하는, 시를 보냈다. 겨울이 오는 길목이었다. 그리고 한 달 정도 있다가 김굉필을 방문하였는데 재미있는 소문이 들렸다. 그래서 지은 시가 「김굉필이 어린 낭자를 어여삐 여기다 수염을 많이 뽑혔다고 하니 놀리다」이다. 네 수나 되는데, 그중 처음이다.

먼지에 쌓인 피곤함에 틈도 없었을 것인데 幾許塵籠困未閑
하늘을 가르치며 높이 누어 서산을 막고 있다가 天敎高臥塞西山
미인을 무척 예뻐하여 많은 정을 주고 있으니 最憐越女多情思
두고두고 드러내 시인묵객의 웃음에 부치려네 留著騷人一笑間


배우는 학생은 무척 근엄하다고 여겼겠지만, 배우려는 생각이 없는 낭자는 김굉필을 무던히도 편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의무가 '운우지정(雲雨之情)'이라도 나누려는 것 아닌가, 놀린 것이다. 무서운 세월을 녹이는 미소가 절로 나오는 편한 그림이다.

내일을 위한 만남

반우형이 희천을 찾자 김굉필이 정색하였다. "섶을 안고 불속에 뛰어들었구나!" 반우형이 복받치는 서러움을 올렸다. 「한훤당 김선생에게 올리다」이다

북풍은 차갑고 눈마저 휘날리는데 北風蕭冷雪飛揚
책보 들고 가야 할 곳이 어딘지 길 또한 멀더이다 負芨安歸路且長
추연의 서리, 우공의 한발이 헛말이 아닌가요 鄒霜于旱皆虛語
낮밤으로 쳐다보는 하늘은 왜 저리 푸르기만 하답니까 日夜看天但彼蒼


추상(鄒霜)은 음양오행설을 제창한 추연(鄒衍)이 잘못 옥에 갇히자 서리가 내리고, 우한(于旱)은 한나라 우공(于公)이 시어머니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효부(孝婦)를 변호하다가 관직을 떠나니 삼 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고사에 나온다. 김굉필이 답하였다.

길을 잃으면 어쩔 줄 모르다가 뜻대로 되면 의기양양 失道倀倀得意揚
사람들은 거개가 소장(消長)의 이치를 모르더라 世人多不會消長
천명을 알고 인을 도탑게 하라는 가르침 받아야지 知命敦仁要順受
어찌 저 푸른 하늘에 원망을 돌리랴 詎能歸怨彼蒼蒼


'그대가 맡고 있는 성균관 대사성의 직임이라도 잘하라'로 읽힌다. 반우형에게 칠언율시 「태학생에게 준 시」가 있는데 마지막 아홉 번째가 이렇게 시작한다. "국자감에 오르니 선생께 부끄럽고, 유풍을 어긋나게 할까 두려워 못난 정성 바치네." 마치 김굉필에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가르치겠다는 각오로 들린다. 그리고 이어갔다.

엷은 얼음 밟듯이 이 몸은 전전긍긍 如履薄氷身戰戰
험준한 계곡에 들어간 듯 도탑게 뜻을 세우고 若臨峻谷意惇惇
일심으로 군자들과 함께 가기를 바라니 一心願與諸君子
다 같이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고 태평을 즐기세나 共報天恩樂太平


성균관 유생이라도 『소학』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면 치국평천하를 이루려는 꿈을 가질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겨울에 어천 찰방의 아들이 찾아왔다. 양희지의 소개장을 들고 왔다.

수재 조군은 친구의 아들로 나이 스물이 되지 않았는데 개연(慨然)히 구도(求道)의 뜻이 있던 차에 김대유 사문(斯文)이 학문의 연원이 있다 함을 알고 그의 아버지가 있는 어천에서 대유의 희천 적소로 가서 제자로서 배우기를 청하려고 한다면서 나에게 소개의 글을 요청하는지라, 그 간절한 뜻을 저버릴 수 없어 대유에게 보이는 바이니 혹시 '화를 끼치는 선물[載禍相餉]'로 생각하지 않을는지.

조광조가 김굉필의 제자를 자청하여 소개하니 가르치는 일로 또 어려움을 겪을까 걱정이 되지만 받아주라는 당부였다. 양희지의 「조수재를 보낸다」는 시는 이때 부쳐온 것이다.

열일곱 조씨 가문 수재 十七趙家秀
삼천 제자 노릇을 한다네 三千弟子行
도와 뜻을 구하는 정성이 있어 懇懃求道志
멀리 관서로 보내는 뜻을 전하네 迢遞關西志


연산군 4년(1498) 유배 첫 겨울, 17살의 조광조가 제자로 온 것이다. 훗날 이황은 이 광경을 이렇게 적었다. "난세를 당해서도 기꺼이 위험과 난간(難艱)을 무릅쓰고 김굉필을 스승으로 섬겼다." 두 사람은 실로 다정하고 숨김이 없었다.

어느 날 꿩을 얻은 김굉필이 모친에게 보내려고 말렸는데, 그만 새끼 고양이 밥이 되어버리자 심하게 여종을 야단쳤다. 조광조가 아뢰었다. "봉양하는 정성이 비록 절실하지만 군자의 사기(辭氣)는 성찰하지 않을 수 없으니 소자가 감히 마음에 의문이 듭니다." 김굉필이 벌떡 일어나 손을 잡았다. "내가 마침 스스로 뉘우치고 있던 참인데 그대 말이 이러하니 나도 모르게 부끄럽구나.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다." 참으로 흔쾌하다.

순천소요(順天逍遙)

연산군 6년(1500)은 혜성이 자주 나타나고 천둥과 번개, 우박은 때를 가리지 않았다. 민심이 흉흉한 터였다. 우의정 이극균이 '평안도가 흉년으로 굶주리는데 본래 중국과의 사신 왕래가 빈번한데다 귀양살이 하는 사람까지 많아 견딜 수 없다'고 건의하여, 평안도 지방의 적객(謫客)들을 경상도와 전라도로 옮겼다. 김굉필의 배소는 순천으로 정해졌다.
임청대(臨淸臺)와 옥천서원(玉川書院)

전라남도 순천시 옥천동. 명종 18년(1563) 순천부사로 부임한 이정(李楨)이 김굉필이 배회한 옥천에 경현당(景賢堂)을 세우고 추모하였는데, 2년 후에 지방 사림이 터를 넓히고 서원으로 바꾸었다. 전라남도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임청대는 조위가 순천의 부로와 노닐던 축대를 '임청대(臨淸臺)'라 하고 기문을 남겼는데, 김굉필도 간혹 배회를 하였었다. 그래서 서원을 세울 때 이정이 이황으로부터 '임청대(臨淸臺)'란 친필을 받아 비석을 세우고, 뒷면에 조위의 기문을 새겨 넣었다. 원래는 지금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1971년 5월에 서원 앞으로 옮겼다. 조위가 연산군 9년(1503) 11월 순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김굉필은 통곡하며 '자녀도 없고 조문하는 이도 없고 하늘도 어질지 못하구나' 하며 스스로 비용을 만들어 치상을 주관하였다. 이때 조광조가 조시 「조매계(梅溪)를 애도함」을 남겼다. 매계는 조위의 호다. 이렇게 되어 있다. "매계가 먼저 가시니 한훤당이 조사를 지으시니(梅溪先逝寒喧弔)/ 야사에 올해는 슬픔도 가득하다 하리라(野史當年感愴多)/ 도를 찾는 일 양지 바른 강가에 어린아이처럼(聞道河陽猶有子) / 서리 머금던 하늘에 누런 꽃을 보는 것 같이 하리라(霜天如見一黃花)." 그러나 조광조는 김굉필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조시를 적지 않았다. 기막힌 통곡은 붓도 잡지 못하게 하는 법일까?

의주에 귀양을 살던 조위도 함께 왔다. 전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언젠가 조위가 김굉필에게 편지를 보내 은퇴할 뜻을 비친 적도 있었다.

관료가 되어 출입이 무상하여 안정하며 생각할 겨를 없는 생활에 지쳤는데, 그렇다고 그만두면 나라의 믿고 맡김을 훼손할 것 같고, 계속하자니 진실로 마음을 보존하는 일을 영영 놓칠 것 같다. 「한훤당 김굉필에게 보내는 편지」

관료생활의 분주함으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다고 하소연한 것이다. 김굉필이 '그렇다면 그만둠이 마땅하다'고 권유하였고, 조위도 '조만간 물러나 편안하게 지내며 함께 도를 강론하는 것으로 만년지계(晩年之計)를 삼겠다'고 화답하였었다. 그러나 조위는 뜻대로 하지 못하였다.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중국의 성절사로 나갔다가, 김종직의 문집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는 죄목으로 압록강을 넘을 때 잡혀 거의 죽을 지경에 갔다가 '조의제문의 뜻을 모르고 실었다'는 주위의 변호로 겨우 살아났다.

순천에서 김굉필과 조위는 대조적이었다. 명종 치세 말기 순천 부사를 지내며 김굉필을 추모하는 경현당(景賢堂)을 세운 이정(李楨)이 늙은 향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훗날 순천의 역사와 문화를 노래로 만든 『강남악부』에 있다.

조위는 서문 밖에 살고 김굉필은 북문 밖에 살았는데, 조위는 부로들과 자주 어울려 옥천에서 노닐면서 노거수 아래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어놓고 때로는 바둑을 두거나 술을 마시기도 하고 때로는 시를 읊조리며 시간을 보냈다. 한편 김굉필은 때때로 노거수 밑 대 위를 배회할 뿐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조위는 순천을 살며시 가로지르는 옥천에서 부로와 어울리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편하게 지냈다. 그래도 좀처럼 유배지의 슬픔과 외로움을 삭일 수 없어 「만분가(萬憤歌)」에 담았다.

그런데 김굉필은 간간이 배회할 뿐이었다. 17세기 초 순천 부사를 지낸 이수광(李晬光)이 편찬한 『승평지(昇平志)』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선생은 홀로 배회하며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니 예측할 수 없는 때를 만나도 몸을 삼가고 행실을 규제함이 엄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굉필은 존재로서 사람을 감화시켰다. 광양의 청년 최산두(崔山斗)는 김굉필을 깊이 흠모하며 학문에 매진하여 중종 치세 혁신정치의 주역으로 성장하였다.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를 당한 후로는 김인후와 유희춘 등 후진을 계도하였다.

간혹 찾아오는 젊은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유계린(柳繼麟), 맹권(孟權) 등이었다. 유계린은 김굉필과 같이 성균관에서 '정지교부계'를 결성한 동지이며 이때는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를 떠난 최부의 제자이며 사위였는데, 두 아들 유성춘과 유희춘을 각각 기묘명현과 을사명현으로 키웠다.

맹권은 자세하지 않는데, 그의 모친 설씨(薛氏)가 '자식 교육을 위하여 김굉필을 정성으로 공양하였고, 참형을 당

한 후 가산이 적몰이 되었을 때에도 상장(喪葬)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지불하였다'고 한다. 유희춘이 부친에게 듣고 김굉필 손자인 김립(金立)에게 전하였는데 『미암일기』 선조 5년(1572) 9월 18일자에 있다.

김굉필은 죽음마저 조용하였다. 다만 수염을 쓰다듬어 입에 물고 '이것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다' 하였다고 한다. 누구의 조문과 조시도 없었다. 다만 반우형의 「사화를 통곡하다」가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다.

어른 공경 스승 높임으로 『소학』의 정성 가르치시고 敬長隆師小學誠
신성을 보존하고 변화를 알도록 「계사」를 밝히셨다 存神知化繫辭明


『소학』으로 사람 된 구실을 가르치고 『주역』「계사편」으로 세상의 변화를 살피도록 깨우쳐주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이다.

천상에 계신 분을 조금이나 놀라게 할까 두려워 恐驚天上人多少
감히 통곡소리도 크게 하지 못하네 不敢高吾痛哭聲


천상에서도 의연할 것만 같은 스승을 생각하면서 울음을 참겠노라 한 것이다. 그리고 심상(心喪) 3년을 보냈다.
세월은 참으로 무서웠다. 연산군은 문묘를 오락장으로 만들고, 고양 양주 등 산림을 사냥터로 만들며 민가와 분묘를 쓸어냈으며, 천문과 인사의 상관설이 싫어서 관상감을 없애고,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을 줄였으며, 말이 화를 부른다고 하며 모든 신하에게 '묵언패(黙言牌)'를 걸게 하였다. 심지어 부모를 위한 삼년상을 금지하여 단상(短喪)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이런 시절 조광조는 부친상을 마치고도 용인 선산에서 '처자가 서울에 있어도 한 번도 성중에 들어가지 않고' 오로지 공부로 일관하였다. '광자(狂者)' 혹은 '화태(禍胎)'라고 지목받을 만큼 열심이었다. 화태는 재앙의 빌미 혹은 뿌리라는 뜻이다. 일가친척들에게 '세속과 어긋나서 남의 비방을 사고 있다'는 꾸짖음까지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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