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서흥(瑞興), 자(字) 대유(大猷), 호 한훤당(寒暄堂)
1454년(단종 2) 한양 정릉 출생,
1472년(성종 3) 순천 박씨와 혼인
1470년(성종 1) 김종직 함양군수 부임
1477년(성종 8) 선산향교 모임 참가
1480년(성종 11) 생원시 급제, '정지교부계' 결성
1485년(성종 16) 김종직에게 '풍간'시를 보냄
1487년(성조 18) 부친상
1490년(성종 21) 여름 김일손과 함께 가야산 유람
1492년(성종 23) 남효온 임종
1494년(성종 25) 경상감사의 유일 천거, 남부참봉
1495년(연산 1) 전생서 참봉
1496년(연산 2) 군자감 주부와 사헌부 감찰을 지냄
1497년(연산 3) 형조좌랑
1498년(연산 4) 무오사화로 희천으로 유배
1500년(연산 6) 순천으로 배소를 옮김
1504년(연산 10) 갑자사화로 참형
* 프롤로그
김굉필은 '성리학의 참뜻을 실천하고 전파한 일세의 사표(師表)', '정몽주가 단서를 열었던 동방 도학을 밝힌 진유(眞儒)'로 추앙되고 있다. 사림정치의 전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점도 거론된다. 그러나 이러한 선양이 김굉필에게 다가설 수 없는 걸림돌이 아닌지?
유교의 신성 영역인 문묘에 올랐고 '동방오현(東方五賢)'의 으뜸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찬양만 할 수 없는 오늘날 다시 찾아야 할 인간의 매력은 무엇일까? 아마도 '빛을 감추고 흔적을 숨기며 미래를 설계하는 진중한 포부'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을 밝히기란 쉽지 않다. 생애가 무척 단조로웠고,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배와 죽음의 최후 몇 년을 제외하곤 극적 요소나 일화가 거의 없다.
김굉필은 젊은 시절 한때를 제외하면 평생을 고요하게 살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침묵에 관한 공자의 '잘 꾸민 말은 덕을 어지럽히며' '나라에 도가 없으면 자신을 거두고 감추며,' 또한 '더불어 말할 수 없는데도 말을 하면 말을 잃는다'와 같은 교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 같았다. 『논어』「위령공편」에 나온다. 『중용』도 말하였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언론을 일으키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침묵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글은 침묵의 해석이며 은밀함의 복원이다. 이를 통하여 '말과 글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김굉필의 웅변을 듣고 싶고 또한 근엄하고 냉정한 치장 뒤에 감추어진 '실망하고 분노하고 감정을 숨기지 않았던 모습'을 드러내고 싶다.
1. 미로(迷路) 찾기
* 무거운 세월
김굉필은 평생 열심히 공부하였다. 남효온이 '파루를 친 뒤에야 침소에 들었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고 전하고, 선조 치세 초반 임금의 명을 받은 유희춘이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의 언행과 약간의 글을 모은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에도 나온다.
김굉필은 만년에 단칸방에 단정히 앉아 책상을 마주 대하고 글을 보며 밤이 깊어도 자지 않으므로 연자(蓮子) 갓끈이 책상에 대질리어 잘그락 소리가 나면 그 소리로 그가 아직도 글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김굉필은 성종 11년(1480) 생원이 되었지만 대과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다. 성균관 시절에는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에 열중한 것 같다. '나이가 같고 도가 비슷한' 진사 최부(崔溥), 진사 박담손(朴聃孫), 진사 신희연(申希演), 생원 송석충(宋碩忠) 등과 같이 '뜻과 마음을 나누며 서로 의심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로 만든 모임이었다. 강응정, 남효온 등의 '소학계(小學契)'와 같은 성격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지리 1142번지. 김굉필의 선대는 본래 개경과 한양에서 살았는데 김굉필 역시 정릉 즉 오늘날 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자못 호기가 있어 '한양의 시가(市街)에서 놀 때에 뭇 아이들이 두려워 피하였는데 무례하고 거만한 아이가 있으면 그 집에서 파는 고기나 두부를 갈겨 버리곤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현풍과의 인연은 예조참의를 지낸 증조부 김중곤(金中坤)이 현풍의 토성대족(土姓大族)이던 곽씨(郭氏)와 결혼하며 시작되었는데, 조부와 부친이 현풍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종가는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는데, 마을 입구에 의병장 곽재우의 집안인 현풍 곽씨의 12분의 충효열을 기린 정려각과 '소학세향(小學歲鄕)'이라는 커다란 표지석이 있다. |
성종 14년(1483) 식년문과가 있던 해에는 금강산과 송도를 유람하기도 하였다. 그때 금강산은 누구와 동행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송도는 신영희(辛永禧)와 함께 갔다. 당대 문장 성현(成俔)에게 북송의 문호 '소식(蘇軾)의 경지를 넘나들고 있다'고 칭찬받았어도 과거를 보지 않으면서, 남효온과 같이 죽림우사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김굉필은 두 군데에 흔적을 남겼다. 금강산의 발령(髮嶺) 아래 송라암(松蘿庵)의 벽에는 '절구 한 수를 적고 김대유 이름 석 자를 새겼으며,' 개성의 영취산(靈鷲山) 현화사(玄化寺) 석탑에도 '이름을 적어놓았다.' 남효온의 「유금강산기(遊金鋼山記)」와 「송경록(松京錄)」에 전한다. 이렇게 이름을 남길 수밖에 없는가 하면서 쓰라린 가슴을 쓸어내렸을지 모른다.
김굉필은 '소학동자(小學童子)'를 자처하였다. 남효온의 증언이다.
김굉필은 손에서『소학』을 놓아본 적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국가 일을 물으면 '소학동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으며,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다른 책을 읽었다.『사우명행록』
물론 서른 살까지 『소학』만 보았다는 것은 과장이다. 성종 8년(1477) 여름 김종직이 지도하는 선산향교 공부모임에서도 중국 상고의 사적이 실려 있는 '삼분오전(三墳五典)' 즉 『서경』을 열심히 읽었다. 또한 유호인이 김굉필에게 건넨 시에 「상사(上舍) 김굉필이 선정암에서 역사를 읽다」가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역사책을 즐겨하였을지 모른다. 상사는 대과를 준비하는 생원이나 진사를 일컫는 호칭이다.
따라서 남효온의 증언은 '항상 『소학』을 책상에 두었다'로 읽어야 한다. '소학동자'도 겸양 혹은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찾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마 공자의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정치를 말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새겼으리라.
김굉필은 호를 갖지 않았다. 처음에 '비를 만나도 겉은 젖지만 안은 젖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옹(簑翁)을 생각하였으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혼연(渾然)한 처세의 길이 아니다'고 하여 바로 취소하였다. 조식이 수집한 김굉필의 몇 가지 일화 모음인 「유사추보(遺事追補)」에 있다. 한훤당(寒暄堂)은 합천 야로현 처가 마을 개천 건너 바위 아래 지은 조그만 서재의 당호(堂號)였을 따름인데, 말년이 되자 사람들이 호로 삼았다.
한때 젊은 시절에는 거친 숨을 몰아 쉰 적이 없지 않았다. 여름을 못가에서 보낼 때 지은 「못가의 누각에서 읊다」를 보자.
달빛은 끝없는 대지에 자물쇠를 채우고 月鎖無邊地
못은 머물지 않는 하늘을 머금었네 池涵不住天
내 이곳에 와서 여름날 보내니 我來消畏日
빼어난 경치가 좋아 바람 타고 다님과 같구나 絶勝馭冷然
달빛이 대지를 가두고, 못은 하늘을 머금고 있다고 하였다. 자신의 뜻과 포부를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넓게 가져야 하겠다는 기상으로 읽힌다. 처가 마을에서 가까운 가야산에 올라가 공부할 때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가야산 옥명 스님이 조성한 득검지(得劍池) 옆의 나월헌(蘿月軒)이나 조현당(釣賢堂)에서 지냈을 것이다.
* 항상 고요하였다
김굉필은 사교가 별로 없었다. 역시 남효온이 전한다. "일찍이 집밖으로는 읍(邑) 근처에도 나가지 않았다." 한동안 '농부 차림'의 초립(草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실제 농사도 지었던 모양이다. 유호인의 「김굉필과 헤어지며」앞부분에 나온다.
만 그루 소나무가 비탈진 밭두렁을 에워싸는 곳에 萬本蒼髥抱壟斜
한 배미 땅을 파고 갈아서 뽕과 삼을 키우누나 一區耕鑿長桑麻
경사지를 일궈 뽕나무를 심고 삼[麻]을 키웠던 것이다. 김굉필의 몇 편 되지 않는 중 수작으로 꼽히는 「마음을 풀다」는 세상과의 인연을 당분간 접고 살겠다는 심정을 읊은 것인데, 혹시 유호인에 대한 대답이었는지 모른다.
홀로 한가롭게 사니 오고 가는 이도 끊기고 處獨居閒絶往還
다만 외롭고 차게 비추는 밝은 달을 불러보네 只呼明月照孤寒
그대는 번거롭게 나의 살림살이 묻지 말게 煩君莫問生涯事
두어 이랑 뜰을 메운 자욱한 물안개와 겹겹의 산뿐 數頃烟波數疊山
김굉필은 말이 없었고 또한 자신을 숨겼다. 역시 남효온이 전한다.
김굉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도(道)가 더욱 높아졌는데, 세태를 돌이킬 수 없음과 세도가 실행하지 못함을 알고 빛을 숨기고 자취를 흐렸는데 사람들 역시 이를 알아주었다. 『사우명행록』
빛을 감추고 자취를 흐렸다는 도광회적(韜光晦迹)은 조조(曹操)의 참모들이 유비(劉備)를 미리 제거하려고 하자 재능을 숨기며 몸을 낮춰서 위기를 모면하였다는 고사의 도광양회(韜光養晦)와 같다. 따라서 세상과의 인연을 접는 은둔(隱遁) 혹은 둔세(遯世)와는 차원이 다르다. 중국이 개혁과 개방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진하면서 외부세계에 알리지 않으려고 하면서 즐겨 사용한 단어가 바로 도광양회였다.
김굉필이 자신의 의사를 마냥 감춘 것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송도를 같이 유람한 신영희에게 절교를 선언한 적이 있었다. 『연려실기술』「연산조고사본말」의 〈무오당적(戊午黨籍)〉에 있다.
"남효온과 이총, 이정은, 허반은 청담(淸談)의 폐해를 입은 진나라 사습(士習)이 있어서 10년이 못 가서 화가 미칠 것이니 그대들과 더 이상 왕래하지 않겠다."
일찍이 성균관에서 만난 후로 기맥을 통한 남효온이 세상을 거리낌 없이 비판하며 죽림우사를 결성하고 이총과 허반 등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것이 못마땅하여 이들을 중국 동진 말기 청담파에 견주고 절교를 선언한 것이다. 일찍이 주희도 청담파를 '겉으로는 청고(淸高)하지만 실은 관직을 구하고 권세를 좋아하며 뇌물을 받았다'고 하며 질타한 바 있었다. 남효온 등의 비분강개가 초래할 위험에 대한 경고였지만 자못 심각하다.
* 시병(詩病)을 앓다
김굉필은 시문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사화로 없어진 탓도 있지만 시문을 즐겨하지 않았다. 훗날 문인과 후손이 여러 차례에 걸쳐 보완 편찬한 『경현록』에 시 12수와 부(賦) 1편이 전할 뿐이다. 이 중 김맹성(金孟性)에게 올린 시가 네 수나 되는데, 전부 성종 9년(1478)에 지었다. 두 사람이 무척 가까웠음인데, 이때 김굉필은 25살, 김맹성은 42살이었다.
김굉필은 결혼 직후 김종직에게 배우기 전, 처외가인 성주의 가천(加川)에 들렸다가 그곳 출신 김맹성을 처음 만났다. 성주 가천은 김굉필의 생가가 있는 현풍과 처가가 있는 합천의 길목이라서 이후로도 자주 만났다. 젊은 시절 황학산의 능여사(能如寺)에서 김종직과 같이 공부한 평생지기이며 나중에는 사돈까지 맺은 김맹성은 지지당(止止堂)을 당호로 삼았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걸어두었다고 한다.
만사에 무심하게 잡념 없애는 공부를 하다가 萬事無心學坐忘
깊이 생각하여 새 집 이름을 지지라고 지었네 尋思止止牓新堂
우주는 자연이라 하늘의 빛도 절로라네 自然泰宇天光發
광활하다 어진 삶이여 길도다 의로운 길이여 廣矣仁居義路長
'지지(止止)'는 하늘을 보면 욕심을 그친다는 앙지(仰止)와 『대학』의 '멈춤(止)을 알아야 뜻을 정할 수 있다'는 다짐이 함께 담겨 있다.
성종 7년(1476) 김맹성이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조정에 나간 후로 한동안 뜸했는데, 고령으로 유배 오면서 다시 만났다. 사연이 있었다. 성종 8년(1477) 왕실의 인척인 현석규와 임사홍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조정을 떠들썩하게 하였을 때, 사간원 정언으로서 김맹성이 '현석규의 처사가 지나치다'고 규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임사홍과 붕당을 맺은 유자광이 배후에서 사간원의 현석규 배척을 선동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당파로 몰려 쫓겨난 것이다. 성종 9년(1478)이었다. 벼슬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정의 동태에 어두웠다고는 하지만 결코 떳떳할 수는 없었다.
김굉필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지지당에 올린다」에서
이제 고령 땅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기겠으니 徙隣欲向高陽地
틈나는 대로 시병에 가는 침을 놓아주소서 詩病時時得細鍼
하였다. 반가움이 앞서 '그동안 시문 짓기가 힘들었는데, 이제 경사(經史)를 연마하도록 따끔하게 가르침을 주소서' 한 것으로 들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유배를 와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김맹성이 그렇게 받아들였을까? 혹시 시문을 지을 만큼 편하지 못한 자신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대하며 '시병을 고쳐달라고 하니 무심하다' 하였을지 모른다.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김굉필의 「마음을 적은 두 수를 지지당께 올리다」가 있는데 첫 번째가 이렇다.
임금 곁 옥당의 봄날에 붓을 휘두르니 日邊揮翰玉堂春
푸른 구름 자욱하더니 뒤따라 먼지를 일으켰지요 靄靄靑雲鬧後塵
영남에 와서 띳집에서 책을 베개 삼아 누워 있는 밤 嶺外枕書茅屋夜
곱고 고운 외로운 달은 이제 저의 차지랍니다 娟娟孤月屬斯人
김굉필은 위로와 사과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만 '조정에서 먼지를 일으켰다'고 하고 '외로운 달은 자기 차지이다' 하였다. 어찌 들으면 서운할 성도 싶다. 이렇게 읽힌다. '곤혹스러움에 예쁜 달마저 쓸쓸히 여기실 터이니 제가 대신 즐기겠습니다.' 김맹성은 긴장했다. 다음은 「김굉필에게」중 첫 수다.
깨끗한 그대 마음 세상 밖의 봄이로다 灑落胸中物外春
구름 뚫고 솟은 날개 속세를 떠났다네 凌雲逸翮逈離塵
묻노라 그때 기둥에 글을 적은 나그네가 누구였으며 爲問當時題柱客
다른 날 비단 버린 사람까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일세 須知他日棄繻人
앞 두 행은 김굉필이 세속에 뜻이 없는 듯 시원스레 살아가는 모습을 적은 것이리라. 그런데 후반 두 행은 다른 뜻이 깔려 있는 듯하다. 3행 '기둥에 글을 적은 나그네'는 촉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장안으로 가면서 다리 기둥에 '높은 수레를 타지 않으면 이 다리를 지나지 않겠다고 하였다'는 고사에 있고, 4행 '비단 버린 사람'은 한나라의 종군(終軍)이란 사람이 관문을 통과하며 증빙으로 받은 비단 한쪽을 '황제의 사절이 되면 비단 쪽지가 무슨 소용인가 하며 버렸다'는 고사를 옮겼다. 모두 장안에 들어가 출세하여 돌아온 내용이다. 왜 하필이면 이런 고사를 인용하였을까? 이런 뜻을 담은 것이 분명하다. '그대는 조정의 파란을 겪지 않으니 좋겠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강호에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니 우선 조정에서 뜻을 펼 생각을 하여야 한다.' 김굉필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이렇듯 성종 9년(1478) 한 해에 여러 차례 시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 이후로 다시 시문을 교환하였다거나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해 「연보」 기사에 '이후로 문장을 짓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혹여 「연보」편찬 당시에 '시병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내지는 '시문으로 오해를 일으킬 수는 없다'는 김굉필의 독백이 전해졌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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