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24년(1493) 가을 김일손은 독서당에 들어갔다. 강혼·신용개·이과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假讀書)의 은전을 입은 것이다. 가을의 정취에 젖어 수심이 물밀듯 밀려왔고, 아스라한 쓰라림을 이기지 못하여 책을 덮고 붓을 잡았다.
김일손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추회부(秋懷賦)」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밝은 낮은 짧아짐이 힘겨운 듯, 어두운 밤은 더욱 아득하여라. 들보의 제비는 둥지를 떠나 남으로 가니, 먼 북방에서 찾아온 기러기가 찬 서리를 맞으며 울어대는가. 땅 밑 뿌리를 찾아 떨어지는 나뭇잎에 눌렸을까, 귀뚜라미 소리가 더욱 서글퍼지네.' 그리고 강혼의 말을 빌러 자신의 비장한 심정을 읊어갔다.
날마다 옛 글을 읽고 日耕墳典
마음은 우주에 노닐면서도 心遊宇宙
요순시대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것인가 恨未置身於虞唐者耶
충량에 감개하고 感慨忠良
흉악함과 간사함을 무척 미워하다 憤疾凶邪
부질없이 지난 흥망에 이맛살을 찌푸리는가 謾顰蹙於前代之興亡者耶
악이 선을 이기고 학문과 기상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분개하는 자취를 드러내며 어두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예감한 것이다.
성종은 공신천하의 조정을 바꾸어보려고 신진사림의 언론과 학술을 지지지하였지만 어느 틈엔가 유자광과 임사홍 등을 재등장시키고 마침내 훈구공신의 전횡을 비판하는 신진사림을 '능상(凌上)'으로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한 실망이었으리라. 그리고 학문을 좋아하는 간쟁을 받아들인 금상의 치세가 끝나면 어찌 될 것인가? 무서운 공포의 쇠락의 광풍이 휘몰아치지는 않을까? 그러나 이것이 어찌 시절 탓인가? 나는 정말 떳떳한가? 김일손은 성현과 세상에 죄를 짓고 있는 자책감에 몸도 가눌 수 없었다.
위로는 성현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上負聖敎
아래로는 세상의 바람을 가엾게 하다가 下孤時望
나라의 곡식을 축내며 헛되이 날을 보냈으니 耗公廩而費日
내 자신을 살피니 감당할 수가 없어서인가? 省吾私兮不敢當
먼 길을 떠났으나 해는 이미 떨어졌으니 臨長途而景迫
옛사람 따라 발버둥 치다 힘겨워 기우뚱거림인가 企古人兮力不遑
지난 세월도 다가올 날들도 아득하였다. 그러나 강혼은 좀처럼 김일손의 슬픔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래서 '거문고 하나를 골라서 낭랑하게 어루만졌다'로 끝맺음을 하였다.
강혼은 무오사화로 유배를 갔다가 얼마 후에 풀려나와서 연산군의 애첩을 추켜세우는 글을 지어 세간의 희롱을 뒤집어썼다. 그렇다면 김일손은 강혼의 앞날의 처신을 내다보았을까?
훗날 이 글을 읽은 조광조가 이렇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문장의 품격은 천고에 드물고 품은 뜻은 강개하고 격앙하며 기개는 웅장하며 분방할 뿐 아니라 평생의 마음자취가 잘 드러나 있다."
음률의 세계
김일손은 평소에도 '음률은 성정(性情)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간혹 거문고를 다루었다. 그러다 독서당에서 본격적으로 입문하였다. 독서당은 오늘날 동호대교의 동호에 있었고 나중에는 서강대교 근처의 서호에도 있어서 호당(湖堂)이라고도 하는데 한강과 남산이 모두 잘 보이는 풍광이 좋아서 글 읽기도 좋지만 거문고를 켜는 데도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강개와 격정으로 인한 심신의 피곤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독서당의 벗들과 같이 하였는데, 거문고의 달인으로 양화진에 살던 이총이 한강을 타고 올라와 음률을 잡아주곤 하였다.
권오복이 간혹 찾아왔는데, 어느 날 육현금(六絃琴)의 유래와 함께 거문고와 학이 짝이 되어 어울린 사연을 들려주었다.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이 처음으로 여섯 줄 거문고를 연주하며 현학무(玄鶴舞)를 췄기 때문에 현학금(玄鶴琴)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학(鶴)자를 빼고 그냥 현금(玄琴)이라고 하였다. 「육현금 뒤에 적다」
김일손은 반가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은 먹을 것을 생각하지만 거문고는 먹지 않고, 학은 욕심이 있지만 거문고는 욕심이 없는데 서로 어울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림 속의 학은 욕심이 없을 것이니 그려도 되지 않을까?"
당대 화가 이종준에게 부탁하여 거문고에 학을 그려 넣었다. 거문고를 켜며 욕심을 잊고 그리고 시절의 절박한 안타까움조차 초월하겠다는 뜻을 주고받은 듯하다. '행위예술'의 장면이 눈에 잡히는 듯하다.
보물 제957호. 김일손의 18대 종손인 김성일 소유로 대구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길이 160cm, 너비 19cm, 높이 10cm로 중앙에 탁영금(濯纓琴)이라고 음각(陰刻)되어 있고, 하단부에 학이 그려져 있다. 김일손은 거문고의 유래에도 해박하였다. 즉 순임금 시절 오현금이었고 주나라 문왕 때 칠현금이 나와 이후로 유행하여 중국 진(晉)나라가 고구려에 전해준 거문고도 물론 칠현금이었다. 그런데 왕산악이 육현금으로 개작하여 신라에 전해지고 지금까지 유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동화문밖 어느 집 대문이 패이고 헐어가지만 재목이 오동나무이고 재질 또한 좋아서, 주인에게 물으니 '약 백 년이 되어 이제 부엌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하니 얻어서 제작하였다. 그래서 '문비금(門扉琴)' 즉 '문짝거문고'라고 하였다. 집에는 오현금이 있었지만 육현금을 구하고 싶었던지라, "사물은 외롭지 않고 마땅히 짝이 있는 법인데, 백년이나 공허하여 반듯이 남을 것을 기약할 수 없었는데, 오호라 이 오동이 나를 만나지 않으면 사라져서 상대할 바가 없었을 것이니 누구를 위하여 나왔다 하겠는가!" 하며 무척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당대 화가 이종준의 그림까지 새겨 넣었던 것이다. 김일손은 거문고를 시렁에 알뜰히 간직하였다. 다름이 아니었다. 「금가명(琴架銘)」에 적었다. "거문고는 내 마음을 단속하는 것이라 시렁을 만들어 높이는 것이니 소리가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문화재청 |
어느 날 권오복이 '옛것을 좋아하면서 오현금이나 칠현금을 켜지 않고 육현금을 즐기는가?' 물었다. 다섯 줄 소리보다 경쾌하고 번화한 여섯 줄 소리는 문왕 시절에 처음 생겼으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좋아하는 음률이 다르고 따라서 악기도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김일손은 옛 도를 흠모하면서도 의복은 옛 것을 취하지 않았던 소옹(邵雍)을 빌렸다.
지금 사람은 마땅히 지금의 옷을 입어야 한다. 「육현금의 뒤에 적다」
'우주연표' 혹은 '우주시간의 사이클'을 작성하여 성리학의 우주철학을 정립한 대가의 권위를 빌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악기도 변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김일손은 집에서는 순임금 시절에 유행하였다는 다섯 줄 오현금(五絃琴)을 켰다. 육현금은 독서당 몫이었다. 밖에서는 지금을 따르지만 안에서는 옛것을 취하고 싶은 '외금내고(外今內古)'의 의도가 있었다.
비록 옛것과 전부 합치할 수는 없지만 옛것에 심히 어긋나지 않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라도 태고의 유음(遺音)을 즐기려고 한다. 「오현금의 뒤에 적다」
음률에서도 소박한 옛 도를 따르겠다는 간절함이 스며 있다.
물러설 수 없다
김일손은 정녕 슬픈 세월이 오고 있음을 예감하였다. 세자가 공부를 싫어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 시강원에서 대면하니 낙담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진시황의 유자 탄압과 같은 시대가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성종 25년(1494) 7월 시강원 동료들에게 걱정을 털어놓았다. "주상이 돌아가신 다음에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변이 있을 것이다." 성종이 붕어하자 김일손은 울부짖었다.
하늘이여, 우리 동국이 요순의 치세를 다시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까? 오로지 복이 없는 창생을 버리시면 누구에게 복을 내리시려는 것입니까? 너무 하오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나이까. 『탁영선생연보』연산군 원년 2월
연산군 원년(1495) 3월 김일손은 '임금의 마음이 바른 정사의 근본이다' 하는 사직장을 내고 귀향하였다. 이때의 「한강을 건너며」가 있다.
말 한 마리 느릿느릿 한강을 건너니 一馬遲遲渡漢江
낙화는 물에 떠내려가니 버드나무가 비웃음을 머금은 듯 落花隨水柳含嚬
미천한 신하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겠는가 微臣此去歸何日
그래도 고개 돌려 남산 바라보니 봄은 이미 저물었더라 回首終南已暮春
낙화와 같은 자신의 신세를 강가의 버드나무가 비웃고 있다는 것이다. 세태에 굴복하고 떠나감에 따른 자괴감이었다. 그러나 고향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충청도 도사로 복귀하였다. 이때 유명한 「시폐(時弊) 26개조」를 올렸다. 연산군 원년(1495) 5월이었다. 도입부만 간추린다.
신하가 전하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전하는 하늘을 두려워하소서. 그러나 멀다 하지 마소서. 천도(天道)를 한 번 멀다 여기시면 하늘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하늘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만물을 보면 마음의 방자함을 막을 수 없습니다. 『연산군일기』 원년 5월 28일
여기에서 김일손은 임금의 마음공부와 솔선수범을 비롯하여 내수사의 혁파를 통한 왕실재정의 축소와 투명성 확보를 주장하였다. 각 관아를 책임지는 제주(提調)의 철폐도 제안하였다. 대신이 제주가 되어 각 아문의 운영과 실무관료를 장악하면서 오는 권력집중을 막자는 취지였다. 이외에도 사관제도의 확대, 어진 종친의 발탁, 숨은 인재의 발굴, 유향소의 활성화 등을 제안하였다. 훗날 사림의 정치 과제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릉복위'를 제창하였다. 선대에서 역사의 상흔을 치유한 사례까지 들었다. "태종이 정몽주를 베었지만 세종은 충신으로 추숭하고, 태조가 왕씨를 죽였지만 문종은 숭의전(崇義殿)을 세워 끊어진 제사를 잇게 하였다." 연산군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왕의 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벼르고 있었을 것이다.
폭군의 얼굴
이해 늦가을 김일손은 다시 조정에 복귀하였다. 하루는 뜰에 서 있는데 삭풍이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모든 풀이 엎드리는데 한 치도 못되는 촌초(寸草)가 굳세게 버티고 있었다. 문득 '질풍이 불어야 굳센 풀을 알 수 있구나' 하였다. 「질풍지경초부(疾風知勁草賦)」에 풀었다.
장하다 한 치 풀아 哿矣寸草
이 바람을 깔보는구나 今亦凌風
사람과 사물이 人之與物
이치는 다름이 없거늘 理無不同
나라의 형편이 어지러운 시절에 何異夫板蕩之歲
외로운 충절을 드높이는 것과 어찌 다를손가 拔千丈之孤忠
그렇다면 어려운 시대를 외면하고 고개 숙이는 공후장상(公侯將相)의 모습은 질풍에 고개 숙이는 잘 자란 풀과 다름이 없지 않는가! 아아, 형세는 이미 기울었나, 이렇게 마쳤다.
비록 숲에서 빼어나게 솟은 나무라도 雖然木秀於林
바람에 반드시 꺾일 것인데 風必折之
그러면 꺾인다고 무엇을 아파하겠는가 折之亦何傷兮
온 힘을 다하여 절개를 지키겠다, 혹은 물러설 수 없다는 다짐이었다. 수사선도(守死善道)의 길을 결심한 것이다.
김일손은 예전보다 더욱 강력하게 소신을 피력하였다. '경연을 폐지하지 말 것, 신하의 진언과 간쟁을 받아들일 것,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에 충실할 것'을 거듭 아뢰었다. 특히 '외척을 등용할 때에는 반드시 왕망(王莽)의 일을 경계로 삼을 것'에 힘을 주었다. 전한(前漢)의 외척이었던 왕망이 인사권을 틀어쥐고 권력을 독단하다가 결국 반국(反國)하여 '신(新)'을 세운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다. 왕실의 친인척을 마구 등용한 인사정책에 대한 비판이었다. 연산군의 반응은 싸늘했다. "총명을 조작하여 옛 법을 어지럽히지 말라."
김일손은 사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연말·최부·송흠(宋欽)·권민수(權敏手)·성중엄(成重淹) 등이 김일손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재차 건의하였지만 연산군의 대꾸가 걸작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대간은 노상 궐정에 서서 논쟁만 벌이고 있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은 지금 사왕(嗣王)에 무슨 큰 과오가 있어 이 지경에 이르는 것인가 여길까 염려가 된다. 『연산군일기』 원년 11월 30일
그리고 한술 더 떴다. "김일손 등이 나를 용렬한 임금이라고 여겨서 섬기려 하지 않는 것이고 이렇게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니 어찌 옳은 일인가!"
김일손은 다시 한 번 소릉복위를 주장하고 조정을 나왔다. 성종 치세까지 포함하여 세 번째 문제제기였다. 연산군 2년(1496) 2월이었다.
통한의 세월
고향에서 내려온 김일손은 합천군수로 있던 권오복을 낙동강이 가파르게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관수루(觀水樓)에서 만났다. 「권오복과 같이 관수루에 오르다」가 있다.
느지막이 물가 모래밭에 나뭇잎 같은 배를 매니 晩泊沙汀葉葉舟
말과 소가 어지럽게 오가는구나 紛紛去馬與來牛
강산은 만고부터 항상 이와 같지만 江山萬古只如此
인간과 사물은 잠시 살다 오래 쉬는 법 人物一生長自休
서쪽 해는 이미 뉘엿뉘엿 물이랑에 아득한데 西日已沈波渺渺
동으로 흐르는 물에 솟구치는 걱정을 흘려보내며 東流不盡思悠悠
홀로 멈춘 배에 서서 석양의 따사로움 쐬다 보니 停舟獨立曛黃久
흰 갈매기 두 마리 물을 차고 날아간다 掠水飛回雙白鷗
혼란한 세상을 말과 소의 움직임으로, 허전함과 쓰라림에 감싸인 자신과 벗의 모습을 두 마리 갈매기에 대비시키고 있다. 권오복이 따랐다.
이 몸은 천지 사이 하나의 빈 배더라 是身天地一虛舟
칼날 같은 기운이 올해는 견우성과 직녀성에 비추네 劒氣當年射斗牛
전에 나그네 생각은 무척이나 높았었지 覊思向來何落落
벼슬 생각은 버리고 편안하게 지내야지 宦情從此便休休
만고의 영웅이 이제 얼마 남았는가 英雄萬古幾人在
은은한 달빛 머금은 빈 강에 흥을 낸 적이 언제던가 烟月空江引興悠
물을 보고 산을 보면 이것이 즐거움이라 觀水觀山皆可樂
오는 갈매기 나를 잊으니 나도 갈매기를 잊어야지 鷗來忘我我忘鷗
벼슬을 버리고 차라리 친구까지 잊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 오지만 산수를 벗 삼아 어둠에 꺾이는 모습일랑 보이지 말자, 하는 듯하다.
김일손은 노환이 깊은 모친을 모시고 고향에서 살았다. 모친은 연산군 2년(1496) 윤3월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김일손은 시묘 중 참으로 조용하게 지냈다. 글이 없고 사연을 남기지 않는 시절이었다. 그래도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는 수심과 고뇌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언제일까? 권오복이 편지를 보내왔다. 무오사화가 일어난 직후 가택 수색 과정에서 밝혀졌다. 간추려 옮긴다.
그대들이 급히 개현(改絃)하여 만사를 일신하려다가 온갖 비방을 샀으니 나는 울부짖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따름이다. 비록 먼 곳에 있지만 위태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12일
개현은 악기의 현을 고친다는 말이니 요사이로 말하면 개혁이다. 급격한 개혁으로 임금과 훈구대신의 반감을 초래하여 화가 닥칠 것을 예견한 것이다. 그러나 권오복은 개혁이 필요 없다거나, 늦추어야 마땅하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는 닥쳐오더라도 '그대와 뜻을 같이 하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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