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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설계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金宏弼): 침묵, 미래와의 대화 ④

다시 서울로

성종 25년(1494) 겨울 경상감사 이극균(李克均)이 김굉필을 천거하였다. "성리학에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집중하며 행실과 실천이 반듯하다." 한양의 남부참봉(南部參奉)이 되었다. 40세 때였다. 정예관료라면 맡을 수 없는 미관말직이었지만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1년 후, 전생서(典牲暑)와 군자감(軍資監) 주부를 거쳐 사헌부 감찰과 형조좌랑으로 옮겼다. 그래도 겨우 정 6품이었다.

김굉필은 묵묵할 뿐 드러나지 않았다. 사림파와 국왕 및 훈구대신 사이에 대립구도가 확연하던 시기였음에도 어떠한 주장이나 언론을 전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료사회의 악습으로 신참에게 이상한 옷을 입히고 여러 가지 유희를 시키는 '귀복백희(鬼服百戱)'도 마다하지 않았다. 훗날 조식(曺植)은 '보통 사람과 다르게 하고자 하지 않았다'고 이해하였다.

연산군 3년(1497) 정월 예종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친동생인 한환(韓懽)의 불법축재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사헌부 감찰의 직책을 수행한 것이지, 처음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풀어낸 사안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환이 외척이었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조사했다는 징후도 없다.

또한 여러 사람과 활발히 교유하였던 것도 아니었다. 김굉필이 갑자사화로 참형을 당하자 세월이 무서워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고 지었던 반우형의 조시(弔詩) 「사화를 통곡한다(哭史禍)」서문에 나온다.

지금의 사습이 동한에서 절의를 내세우던 때와 흡사하여 기이한 화가 닥칠 것 같아 전일 동지와 많이 절교하였다.

동한 말기 절의의 선비들이 환관에 반대하다가 '당고(黨錮)의 화'를 당한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김굉필은 위기가 닥치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서운 참화가 있을 것을 예견하였던 김일손의 시국관과 거의 같았다.

김굉필은 한때 벼슬을 사임하고 현풍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임사홍의 아들이지만 부마가 된 형들과는 달리 김종직의 문인으로 학문을 갖춘 임희재(任熙載)가 이목(李穆)에게 '권오복도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이며, 김굉필도 이미 사직장을 내고 시골로 떠났음'을 알렸는데, 권오복이 연산군 2년(1496) 초에 합천현감으로 나갔으니 바로 직전이었을 것이다. 무오사화로 압수된 편지에 나오는데 『연산군일기』4년 7월 14일에 있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올라왔다. 이즈음이었을 것이다. 신영희에게 권유하였다. "동한 말기와 같은 환란이 박두하였으니 속히 숨으라." 김굉필의 말을 듣고 직산으로 내려가서 훗날 기묘사림의 주역의 한 사람인 김정(金淨) 등을 가르치며 여생을 마친 신영희가 지난 시절 사우를 회상하며 지은『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에 나온다. 그러면서 자신은 '정녕 진퇴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 혹은 '나 같은 사람은 진실로 화를 면할 수 없다' 하였다. 조식의「유사추보」가 전한다. 왜 돌아왔으며 떠나지 않았을까?

인간으로 살아가기

성균관 대사성 반우형(潘佑亨)이 '자신의 뜻이기도 하지만 선친의 유지(遺志)를 따른다' 하며 제자를 자청하였다. 연산군 2년(1496) 가을이었다. 반우형은 일찍이 서거정에게 수업하고 17살에 문과에 합격한 인재였다. 경상우수사를 지낸 부친 반희(潘凞)는 평소에 '김굉필·정여창·김일손은 문장과 도덕으로 일세의 영수인데 너도 사도(斯道)를 배우지 않으면 유속(流俗)에 빠질 것이다'고 훈시하였다고 한다. 김굉필은 사헌부 감찰로 46살이었고, 반우형은 38살이었다.
녹동서원(鹿洞書院)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문종 치세에 집현전 직제학으로 지냈던 최덕지(崔德之)를 모신 사원으로 최충성(崔忠成)도 같이 모시고 있다. 문종 치세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최덕지(崔德之)는 영암 영보촌으로 낙향에 즈음해 성삼문·유성원·신숙주 등이 지은 시가 한 권에 이를 정도로 젊은 학인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다. 박팽년은 발문에서 '한 세상을 움직일 만한 공명과 부귀를 가졌더라도 변변찮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낮추고 겸손하여 자시 자신도 가눌 수 없을 듯해도 천하 후세의 인망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 있다' 하고, 후자의 인간상이 바로 최덕지라고 추앙하였다. 최덕지의 손자인 최충성은 김굉필보다 네 살 연하이지만 제자로 입문하여 '재질이 많고 행실이 독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의 문집 『산당집(山堂集)』에 있는 「정명론(正名論)」 「성인백세사론(聖人百世師論)」 「일언흥방론(一言興邦論)」 등을 보면 그의 공부가 깊고 촘촘하였음을 말해준다. 특히 '속인간론'으로 풀이되는 「속원인(續原人)」에서는 맹자의 '인(仁)이란 사람(人)이다'는 명제를 '사람의 길은 참(實)을 갖추어야 하는데, 하늘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함에 있다'로 풀이하였다. 이 외에도 「독소학문(讀小學文)」등에서 『소학』의 가치와 독해법을 상세히 밝히기도 하였다. '자명종(自鳴鐘)'을 만들어 시간을 어기지 않고 공부한 최충성은 병약한 몸을 추스르고자 청포나 쑥을 채운 증실(蒸室), 요즘의 찜질방을 고안하였지만 성종 22년(1491) 34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김굉필은 사양하였다. "벗은 될 수 있을지언정 스승은 될 수 없고, 전날의 동지와 절교한 마당에 어찌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반우형의 의지가 너무 확고하였다. '도가 있고 없고 그리고 스승을 받들음이 어찌 나이와 관직의 문제이리요!' 「사화를 통곡한다」의 서문에 그때의 만남이 자세하다.

김굉필은 '도는 일상에 적용되는 당연한 이치일 뿐이다' 하며, 반우형에 대한 반가움과 함께 공부할 수 없는 아쉬움을 '자신을 닦는 수기(修己)와 사물을 응대하는 접물(接物)에 관한 조문'에 옮겼다. 짧은 머리글과 함께 〈동정(動靜)을 일정하게 한다〉〈마음을 바르게 하며 본성에 따른다〉〈의관을 바로하고 꿇고 앉는다〉 등 18개 조문의 「한빙계(寒氷戒)」였다. 반우형의 『옥계집(玉溪集)』에 전한다.

「한빙계」는 언뜻 조문의 제목만 보면 '자기관리를 엄격히 하라'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자기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관점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비와 관료에 대한 매서운 질타를 담았다.〈구습을 철저히 끊다〉에 이렇게 나온다.

지금 벼슬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출세에만 조급하여 의리를 돌보지 않으니 마치 처녀 총각이 혼인도 않고 구멍 뚫고 담장을 넘어 간통하는 것과 같다. 〈통절구습(痛絶舊習)〉

의리와 분수에 어긋한 재물과 권세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 차원에서 벼슬을 위한 벼슬, 출세를 위한 진취를 부정한 간통으로 비유한 것이다. 〈욕심을 없애고 분노를 막다〉에서는 더욱 매서웠다.

사람의 욕심은 음식과 남녀만한 것이 없는데, 예(禮)로써 억제하지 않으면 누가 탐욕과 음탕에 이르지 않겠으며, 사람의 분노는 벼슬과 재화를 다투는 분노가 가장 큰 데, 의(義)로써 재단하지 않으면 누가 이리나 살쾡이 같은 간사한 도둑이 되지 않겠는가. 〈질욕징분(窒慾懲忿)〉

식욕과 색욕, 그리고 관작과 재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툼이 얼마나 인간을 야비하게 만드는가를 지적한 것이다. 무사안일과 이기적 사치풍조에 대한 냉엄하고 통렬한 비판이었다.

물론 김굉필이 원천에서 재물과 권세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의 '부귀를 구할 때라면 기꺼이 말채찍이라도 잡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좋아하는 공부를 하겠다'는 어록을 인용하며 사람은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다만 분수와 도리를 넘어서는 이기심을 충족하려는 입신출세와 관작과 재물을 배척하였던 것이다.

『소학』을 넘어서

「한빙계」는 인격완성과 자아확립에 요구되는 '차가운 얼음'과 같은 계율이었다. 그러나 수기를 위한 가르침만 담지 않았다. 반우형에게도 "어찌『소학』만을 공부하고 그칠 수 있으랴!" 하였다. 그러면서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말을 알아듣는다〉〈징조를 살핀다〉 등 몇 조문에 대해서는 특별히 '혹여 틈새를 보여 소홀히 하면 금일의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당부를 보탰다. 몇 구절을 옮긴다.

난(亂)은 언어를 사닥다리 삼아 일어나니 임금의 말이 신밀(愼密)하지 못하면 신하를 잃고 신하의 말이 신밀하지 못하면 몸을 잃는다. 〈불망언(不妄言)〉

말이 경솔하면 뜻을 이루기도 전에 무너진다는 것이다.

장차 배반할 자는 말이 부끄럽고, 마음이 의심스런 자는 말이 산만하고, 좋은 사람은 말이 적고, 조급한 사람은 말이 많고, 착함을 모함하는 자는 말이 들떠 있으며, 뜻을 지키지 못하고 잃는 자는 말이 비굴하다. 〈지언(知言)〉

말은 사람의 마음과 행실의 드러남인데 각각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결국 그릇된 사람을 만나서 화를 당하고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다.

군자는 윗사람과 사귀더라도 아첨하지 않고 아랫사람을 사귀지만 모독하지 않아야 하니, 윗사람에게는 반드시 공손하되 신중하게 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반드시 화평하되 조심한다. 〈지기(知機)〉

인간관계는 내밀한 절도가 필요하며 위치와 처지에 온당한 처신이 필요함을 말하였다.

일의 징조를 아는 것이 신통이라 할 것이니, 군자는 은미함에서 드러남을 보고, 부드러움에서 강건함이 있음을 알아야 뭇사람이 우러러본다. 〈지기(知機)〉

모든 사업은 시세의 기미를 알고 양면을 살피는 안목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모두 『주역』「계사전」을 인용하여 풀어냈다.

이들 조문은 모두 세상을 살아가며 부딪치게 되는 난관과 재앙을 방지하고 극복할 수 있는 유념해야 할 지침이었다. 어떻게 보면 관료 및 사회생활의 지침으로 읽힌다. 그러나 시세에 따라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까지나 맹자의 '도가 통하는 세상에 나서면 착함을 천하와 더불어 이루어야 한다'는 '겸선천하(兼善天下)'를 위한 각오와 자세를 말한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김굉필은 세상을 책임지겠다는 선비는 자신을 인내하며 성찰하는 덕목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더구나 언제 환란이 밀어닥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굉필은 첨예하고 과격한 언론으로 시절의 위기가 양성된 측면이 있음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이렇게 풀었다.

지금 많은 선비들은 기개를 높이 세우고 의논이 바람을 일으키는 듯하며 꺼리는 바가 없으니 환란이 닥칠 것이 염려된다. 〈불망언(不妄言)〉

그러나 기개와 언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선비의 진정한 포부는 드높은 기개나 현란한 언론만으로는 이룰 수 없으므로 오히려 '제 몫을 충실히 해야 한다'에 방점을 찍는 교시였다. 시류에 휩싸이지 말고 현실감을 가지고 차분히 전진하여야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당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구차한 삶을 연명할 수 없음도 상기시켰다.

위태로운 징조를 알고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해야 할 것 같으면 군자라면 죽음 보기를 집에 돌아가듯 하고 구차할 수는 없다. 〈지기(知機)〉

물론 무작정 순교의 길을 결심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구차한 삶보다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각오에서 생긴다는 수준에서 읽으면 될 것 같다.

한빙(寒氷)'에 숨긴 뜻

김굉필이 글의 제목을 '한빙'이라고 한 것도 까닭이 있었다. 세 가지 의도를 담았다. 먼저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보다 푸르고(靑出於藍), 물이 얼어 생긴 얼음은 물보다 차갑다(氷寒於水)'고 하여 후배가 선배보다, 제자가 스승보다 진취가 있어야 한다는 바람을 담았다. 그러나 '청빙(靑氷)'이라 하지 않고 굳이 '한빙(寒氷)'이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청빙'으로는 수신과 처세의 동시적 중요성을 한꺼번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김굉필은 말한다. 반우형이 「한빙계」뒤에 적은 글에 있다.

『소학』 공부는 '얇은 얼음 밟듯이 하라'는 증자의 말씀이 대강령이 되고, 또한 『주역』은 '추워지면 얼음이 얼고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굳어진다'고 하였으니, 한빙에는 일의 기미를 알아 조심하고 두려워하라는 뜻이 있다. 〈제한빙계후(題寒氷戒後)〉

『소학』의 조심스럽고 신중한 행실과 『주역』의 일의 기미, 시세의 변화를 살피는 안목과 처신을 '한빙'이란 한 단어에 함축한 것이다. 추운 계절, '박빙(薄氷)의 행실'과 '견빙(堅氷)의 처신'은 충돌의 개념이 아니었다. 전자가 개인 수양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후자는 치국평천하를 위한 성찰이며 대응이니, 상호보완이며 결국은 하나인 셈이었다.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쉬운 듯 보이는 수신부터 두렵고 조심스럽게 하여야 실로 어렵게 보이는 변화의 기미도 알고 인사를 쉽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문자[易]가 '바뀌다와 쉽다'는 뜻을 같이 가지고 '역'으로 읽고 '이'로 읽은 것은 '변화를 알면 인사가 쉽다'는 경험지식의 산물이라는 점을 새겨보면 간단하다.

오늘날 흔히 김굉필이 '소학동자'를 자처하였으므로 「한빙계」 역시 수신의 가르침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수신에 못지않게 『주역』에서 찾아낸 일상의 교훈을 비중 있게 제시하며 기미를 살피며 변화에 대처하고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처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감히 말할 수 있다. 「추호가병태산부」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우주론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의 길을 향한 실천이성의 절대가치를 제시한 교안이었다면 「한빙계」는 수기를 바탕으로 치국평천하를 추구하는 마음가짐과 출처의 자세를 밝힌 교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아무리 겸허하고 진지하게 제자를 자청하였다고 해도, 어떻게 최고 사장(師長)에게 '『소학』을 넘어 『주역』을 알아야 한다' 하며 교과서적 수준의 글을 줄 수 있는가? 반우형이 이런 고전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을까? 수긍이 가지 않는다.

「한빙계」는 쉽게 읽을 수 없는 설계도 위에 그려져 있는 듯 하고, 엿보기 어려운 암호문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김굉필이 적은 서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반우형과 함께 공부를 해야 되겠지만, 내가 각박하게 '문을 닫고 들어앉아 손님을 사절한 지 오래 되었다'고 하자 문득 돌아서니, 나의 마음이 매우 섭섭하여 수기(修己) 접물(接物) 몇 조문을 손수 적어 반우형에게 주고 또한 나 자신을 경계로 삼으려고 한다. 〈한빙계서(寒氷戒序)〉

그대에게 「한빙계」를 주지만 자신도 경계로 삼고자 한다는 것, 마치 '「한빙계」는 그대만을 위하여 준 것이 아니다'로 읽힌다. 이런 뜻도 있는 것 같다. '그대에게 이 글이 참조가 된다면 후학에게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반우형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혹여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까? '선생님이 제가 가르칠 글을 주셨으니, 제 자신부터 경계하며 후학과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미지의 학생을 만나다

김굉필을 만난 다음부터 반우형은 도학을 자기 임무로 삼았다. 「태일설(太一說)」이라는 논설에서 '태극이 천지를 아우르는 대일통의 도를 태일(太一)이라고 한다'는 취지를 자세히 적기도 하였다. 또한 성균관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고요함을 지키지 않고 출입을 분분하게 하며 제 몸의 규율을 세우지 못하고 게으르게 과거를 응시할 날을 세는 모습'을 조용히 훈계하곤 하였다. 「태학생에게 준 시(贈太學生詩)」의 앞에 나온다.

반우형은 화창시(話唱詩)도 있지만 인륜과 처세를 주제로 한 시를 상당수 지었다. 글을 읽고 시를 배움은 '수신제가(修身齊家)와 효제충신(孝悌忠信)'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중에 「수정지지(守靜知止)」「자구방심(自求放心)」「문방자반(聞謗自反)」「안분물탐(安分勿貪)」「신언(愼言)」「견기이작(見機而作)」 등이 있다. 대강 '고요함을 지키고 멈춤을 안다' '방심에서 자신을 구한다' '비방을 들으면 자신을 돌아본다' '분수에 편안하고 탐내지 않는다' '말은 신중하게 한다' '기미를 미리알고 행동하라'는 뜻이다. 제목과 내용이 「한빙계」중의 〈동정유상(動靜有常)〉〈안빈수분(安貧守分)〉〈불망언(不妄言)〉〈지언(知言)〉〈지기(知機)〉등과 비슷하다.

또한 「만수동귀일본오륜(萬殊同歸一本五倫)」에서는 '갖가지 현상이 하나의 이치로 돌아가며 사람은 오륜을 하나의 근본으로 삼음'을 노래하였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흩어짐이 각각 달라도 모이면 같으니 마음을 잠그고 밝게 살피면 작은 기미라도 드러난다네." 「추호가병태산부」를 줄인 것과 같았다.

이렇듯 천리와 인륜의 문제에 천착하며 후진을 양성하던 반우형이 오로지 묵묵하게 자신의 장점이나 타인의 단점을 입에 올리지 않고 살았다. 훗날 정광필이 「반우형신도비명」에 적었다. "반우형의 묵여(黙如)와 절구(絶口)는 한훤당의 가르침과 이끌음을 주먹을 불끈 쥐고 따르며 가슴에 품은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반우형이 후진을 만나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한빙계」를 건넸을지 모른다. 만약 이들이 「한빙계」의 작자가 김굉필인줄 알았다면 마음의 스승으로 흠모하지 않았을까? 이른바 사숙(私淑)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언제 배웠는지 알 수 없고 실제 배운 적이 없었을 후학들이 문인록에 적지 않게 등재된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 아닐까? 훗날 기묘사림의 주역으로 연산군 치세에서 성균관에 다닌 김안국(金安國)도 이런 경우가 틀림없다. 기묘혁신정치가 궤도에 오를 즈음에 조광조가 말했다.

김굉필 같은 사람은 당시에 벼슬은 하지 못하였으나, 지금 선비들이 그의 풍모(風貌)를 듣고 선행을 하려는 자가 또한 많으니, 김굉필의 힘으로 사습(士習)의 원기(元氣)가 이같이 보존되었습니다. 『중종실록』 13년 4월 28일

김굉필이 풍모만으로 선비들에게 감화를 주었다는 것이다. 가르침을 베풀지 않았어도 배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김굉필은 반우형을 통하여, 「한빙계」를 매개로 미지의 학생과 만난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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