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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길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金宏弼): 침묵, 미래와의 대화 ③

학도를 모으다

김굉필은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였다.「길가의 소나무」이다.

늙은 소나무 하나 길가에 먼지 뒤집어쓰고 一老蒼髥任路塵
괴롭게도 오가는 길손을 맞이하고 보내네 勞勞迎送往來賓
찬 겨울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을 歲寒與汝同心事
지나는 사람 중에서 몇이나 알 수 있을까 經過人中見幾人


공자의 '차가운 겨울이 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나중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는 어록을 생각하며 지었을 것이다. 혼탁한 세상에 나의 곧은 뜻을 훗날 알리리라 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를 피력한 것이다. 소나무가 밀양에 있다고 하는데 김종직을 배알하고 오는 길에 지었을지 모른다.

김굉필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후진 양성의 길이었다. 남효온이 전한다.

김굉필이 후학을 불러와서 정성껏 쇄소(灑掃)의 예(禮)를 집행하니 육예(六藝)를 닦는 학자들이 앞뒤로 가득하였다. 『추강냉화』

쇄소는 바른 행실의 기본으로, 배우는 사람은 바로 제집부터 쓸고 닦는 일부터 시작한다는 『소학』의 가르침이며, 육예는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로서 과거시험과는 거리가 있는 기본교양이었다. 김굉필은 사람됨의 도리와 행실 그리고 선비의 덕목을 가르친 교사이며, 사숙(私塾)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성종 21년(1490)에는 아예 현풍의 모친까지 모시고 한양에서 터를 잡았다.
「한훤당선생청초호주즙도(寒暄堂先生靑草湖舟楫圖)」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의하면 김굉필은 '그림에 능하였다[善畵].' 그러나 작품은 남아 있지 않는데 최근 경주의 어느 고가에서 양양의 명승지인 청초호를 그린 이 그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편찬한 오세창(吳世昌)은 박규수와 같이 활동한 개화사상가 오경석(吳慶錫)의 아들로 한말에 애국 계몽 지사로 활동하고 훗날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는데, 서예가이며 감식가로서 또한 금석문 연구로 최고의 권위가 있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미술인 모임 서화협회를 발기하였다. 한편 김굉필은 '안견의 묵화 열 폭을 병풍으로 만들어 간직하였다.' 열 폭 그림은 검푸른 전나무와 늙은 소나무[蒼檜老松], 푸른 나무와 파릇한 버들[碧樹靑楊], 오래된 나무와 무성한 대숲[古木叢篁], 거문고와 학 그리고 소와 양[琴鶴牛羊], 낚싯줄을 드리우고 달을 보는 모습[垂綸翫月], 구름 낀 산 아래 초가[雲山草屋], 백리의 물길[百里長河], 천 척 폭포[千尺懸瀑]라고 한다. 이 병풍은 갑자사화로 집안이 적몰될 때 도화서(圖畵署)에 압수되었다가 민간에 흘러들어갔는데, 조식에게 배운 오운(吳澐)이 처가 집에서 얻어 김굉필의 손자인 김립에 전해주었다고 한다. 조식의 「한훤당의 그림 병풍에 적다[寒暄堂畵屛跋]」에 나온다. 조식은 병풍을 본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선생께서 이 병풍을 마주보고 누워계실 때나 눈길을 주고 감흥을 일으키실 적에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상쾌한 바람 같은 선생의 영혼이 흐릿하게 그림에 남아 있는 듯하고, 사모하는 마음 사이에 예전의 모습이 오히려 보이는 듯하다."



성종 22년(1491) 이심원이 강학장소를 찾은 적이 있었다. 이때 지은 「김대유에게 주다」가 전한다. 이심원은 감탄하여

그대는 본디 욕심 없이 세상 걱정하면서 吾子固囂囂
거문고를 즐겨 탔지 瑤琴性所賞


하였다. 세상을 위하여 강학에 열중하는 모습을 거문고 연주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많은 후진이 모이니 우리 동지의 힘이 커질 것을 기대하였다. 한 구절이 다음과 같다.

듣는 사람 많아지고 聽者日以多
우리 터전 넓어가니 我地日以廣
금성옥진이 아닌가 金聲與玉振
이제 우리 동지에게 보이리라 也應在吾黨


옛적에 악기를 연주할 때 처음에는 쇠북을 쳐서 시작하고 옥으로 만든 경쇠로 마무리한다는 금성옥진(金聲玉振)은 맹자가 '백이(伯夷)와 이윤(伊尹)과 유하혜(柳下惠) 세 성인을 집대성하고 때에 맞추었으니 시중(時中)의 성인이다'라고 공자를 찬양하면서 '쇠[金]로 소리를 내고 구슬[玉]로 거두었다'고 한 구절을 옮긴 것이다. 『맹자』「만장하(萬章下)」에 나온다. 김굉필을 공자에 비유하였으니 극찬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이심원은 남효온과 같이 왔다. 아마 김굉필과의 불화를 잊으라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효온은 서운한 감정을 풀지 않았다. 임종에 즈음하여 김굉필이 찾아오자 등도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을 가르쳤을까

김굉필이 남긴 단 한편의 부(賦), '추호라도 태산과 견줄 수 있다'는 「추호가병태산부(秋毫可竝泰山賦)」가 있다.

추호는 형체와 외관만 보면 보잘것없는 무의미한 존재이며, 태산은 웅장한 외형 때문에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의미의 존재였다. 그래서 흔히 현상의 천차만별을 추호와 태산으로 비유하곤 한다.
먼저 현상은 다르지만 본질 혹은 원리는 같다고 하였다.

나는 안다네, 천하의 사물은 吾知天下之物
이치가 있고 분수가 있으며 有理有分
만상(萬象)이 모여 하나가 되는 이치란 理會萬而爲一
만 가지로 나뉘고 갈려도 헝클어짐이 없다네 分萬殊兮不紊


즉 현상이 아무리 달라도 관통하는 이치는 하나라는 성리학의 핵심이론인 '리일분수(理一分殊)'를 풀이한 것이다. '태극이 음양을 낳는다'는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로 부연하였다.

하나가 둘을 낳은 후에 以一生兩之後
사물은 만 가지가 같음이 없지만 物有萬其不同
그 소이를 미루어 따져보면 然推究其所以
마침내 근본이 같은 줄 훤하게 알리라 卒爛漫而同宗


우주자연과 삼라만상이 현상적으로는 크고 작음, 드러남과 감춤이 있지만 실체는 동본(同本) 동종(同宗)이라는 것이다. 즉 우주만물의 불변과 변용을 '하나의 리[理一]'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리는 '추상의 리'가 아니라 '구체의 리'였다. 모든 만물은 '형체가 있기 전의 도(道)'와 '형체가 있은 다음의 기(器)'를 아울러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똑같이 '리'로서 추상적 천명을 받았다. 그러나 인성의 구체적 발현은 달랐다. 원리와 현상을 혼동하고 제 안목, 제 지식에 들어온 것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어찌 세상 사람들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쫓아 何世人遺本而逐末
천차만별에 현혹당할까 眩千差與萬別
어떤 이는 대롱으로 하늘을 살피고 或用管而窺天
어떤 이는 송곳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或用錐而指地
이것이 크고 저것이 작다고 싸우며 爭此大而彼小
시끄럽게 시시비비를 가리려고만 하니 閙非非而是是


우주와 자연의 가지런한 질서의 원리가 하나의 이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인간은 갈등하고 분란을 일으킨다고 진단한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현상의 불합리, 현실의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사물이 가지런하지 않음이 雖然物之不齊
또한 사물의 실상이라 物之實也


그러나 하늘이 부여한 도덕 가치인 인륜은 보편적이며 누구라도 흩뜨릴 수 없는 가치였다.

자줏빛이 어찌 붉은빛을 어지럽힐 것이며 紫豈可以亂朱
피가 어찌 곡식을 자라지 못하게 할 것인가 稗不可以亂穀
만일 이것을 혼동하여 하나라고 한다면 苟混同而一之
인륜과 풍속을 어지럽히지 않을까 恐亂倫而亂俗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다는 믿음의 다짐이었다. 그래도 본말을 혼동하고 말만 앞세우며 허장성세하고 있음이 한탄스러웠다.

「추호가병태산부」는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길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노래였다. 결코 추상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출세와 부귀를 목표로 하는 좁은 안목, 짧은 지식에 안주하며 교만하고 분쟁하는 모습에 대한 비판을 오롯이 드러내며 진실을 향한 실천의 금도(襟度)를 곳곳에 밝혔다.

또한 자제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절제된 표현도 좋다. 그러나 격분하거나 낙망하지 않았다. 하나의 사안, 하나의 사건을 넘어 인간의 본성과 실천, 선비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거시적 안목을 간직하려는 소망이 그만큼 간절하였음이리라.

특히 이 노래가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문장이 쉽고 간결하며 명쾌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지식 차원에서 바라보면 시시콜콜할지 모르지만 '피가 곡식을 방해하고, 자줏빛이 붉은빛을 흐릴 것인가' 등과 같이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예시도 삶의 현장에서 힘껏 찾은 끝에 나온 것이라 생각하면 차라리 감동적이다. 그러나 미완의 작품이었다. 마지막 구절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쉽구나, 단서를 구하지 않고 惜乎不求其端
마지막을 찾아보지 않으려 함이여 不訊其末
말만 크고 마땅함은 지나치니 言有大而過當
그림자를 엮어 바람을 가두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如繫影而促風


인륜에 대한 희망을 위하여 말에 앞서 실천하는 독실궁행(篤實躬行)에 유념하여야 한다고 한 것인데, 그렇다면 다음에 어떻게 하면 이러한 잘못된 마음과 생각을 마감할 것인가로 나아가야 할 것인데, 아쉽게도 여기에서 그쳤다.

만약 조금 더 나갔다면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조심하고 경계하여야 함을 덧붙였을 것이다. 아마 이런 구절이었을지 모르겠다. '군자는 제 몸에서 찾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서 구하는 법, 사람과 하늘이 만나자면 공구계신(恐懼戒愼)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야지.'

혹자는 문장의 평이함을 단점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르치기 위한, 아니면 초학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꾸민 글이라고 생각하면 전혀 느낌이 다르다. 어떻게 하면 초학자에게 우주와 인간, 원리와 현상의 관계는 무엇이며, 자연의 섭리나 조화를 따르지 못하는 사회의 불합리와 인간의 욕심, 아집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가르칠 수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송나라 학자의 자연철학 실천윤리를 곧바로 주입하기보다는 아무래도 운문(韻文)이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하고 지은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 노래는 학식의 깊이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교안(敎案)이었음에 틀림없다.

아아, 이대로 끝나는가?

김굉필에 대한 주위의 시선이 차츰 따가워졌다. 무엇 때문에 가르치는 일에 그토록 열심인가 하는 의심과 비방이 일어났던 것이다. 실제 임사홍은 김굉필을 무척 싫어하였다. 훗날의 실록기사에 나온다.

김굉필은 평생 한결같게 처신과 학문을 정자와 주자를 지표로 삼고 성학(聖學)에 잠심하여 얻는 바가 몹시 높았으며, 일동일정(一動一靜)이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이 중도의 규범을 지켰다. …… 폐조(廢朝) 때에 임사홍(任士洪)이 그것을 위선(僞善)이라 하여 살해하였다. 『중종실록』 13년 4월 28일

정여창이 넌지시 '그만두는 것이 어떤가?' 충고하였다. 고향이 서로 멀지 않아 일찍부터 자주 만났고, 성균관에도 같이 다녔으며, 서울에서는 회현방 한동네에서 살며 뜻이 같고 도가 같은 '지동도합(志同道合)'의 동지였다. 김굉필은 단호하였다.

중 육행(陸行)이 불법을 가르치는데 수업하는 제자가 천여 명이나 되자 한 벗이 '화를 입을 것이 두렵다' 하며 말리자, 육행은 '먼저 안 사람이 뒤늦게 안 사람을 깨우치고, 먼저 도를 깨달은 사람이 뒤늦게 깨달은 사람을 깨우치는 법이니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알릴 뿐이다. 또한 화복은 하늘에 달린 것이지 내가 어찌 관여하겠는가?' 하였다고 하니 육행은 비록 중이라서 취할 것은 없으나 그 말은 지극히 공평하다. 『추강냉화』

세상의 비방과 훗날의 화를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 생활을 접지 않을 수 없었다. 성종 24년(1493)이었다.

문하를 출입하던 명양부정(鳴陽副正) 이현손(李賢孫)이 전송하였다. 정종의 후예로 13살 연하였다. 「모친을 모시고 현풍으로 가는 김선생을 삼가 전송하다」 세 수가 있는데 첫 번째가 이렇게 되어 있다.

청구는 문화가 높은 나라 靑丘文獻邦
예부터 문사가 많았지만 古來多文士
조그마한 글재주를 내세우며 우쭐댈 뿐 雕蟲競自售
지극한 도리를 찾지 못하였네 未有尋至理
그래도 큰 도가 없어지지 않아 大道終不泯
선생께서 남녘에서 실마리를 잡으셨다 夫子生南紀
용문에서 도학을 창도하니 龍門倡道學
따르는 사람이 잇달아 일어났다 從者相繼起


우리나라 학문은 문장을 위주로 하여 성리학의 근본이치를 몰랐는데 김굉필이 새로운 도학의 학풍을 열고 문파를 세웠음을 찬양한 것이다. 7행의 용문은 인망이 높은 귀인이지만 김굉필이 잠시 강학한 양평의 용문산일 수도 있다. 그리고 둘째 수에서

중간에 각자 흩어졌으니 中間各分散
이욕으로 스스로 허물어짐이라 利欲甘自毁


라고 하였다. 많이 모인 후학이 갑자기 흩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굉필의 낙향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인데, 혹여 과거시험을 생각하며 찾아온 제자들이 싫증을 냈거나, 김굉필을 시기한 임사홍과 같은 무리의 견제와 규찰이 심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현손은 김굉필이 떠나면 정녕 의지할 스승이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북받쳤다. 평소 따르던 이심원은 '공신은 물러나야 한다'는 상소로 일가의 미움을 받고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고, 호방하고 거칠 것이 없이 살았던 남효온이 세상을 떠난 마당이었다. 셋째 수에 담았다.

성광은 깊은 계곡에서 늙어가고 醒狂老丘壑
추강이 세상 떠난 지 오래인데 秋江長已矣
선생 또한 가버리면 先生今又去
소자는 어디에 기대야 하는지 小子竟何倚


성광은 이심원, 추강은 남효온이다.

김굉필은 현풍과 합천을 오가며 지났다. 한때의 도전과 성취가 그대로 묻히는 듯하였다. 깊은 침묵에 젖어들었다. 그렇게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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