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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와 결별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金宏弼): 침묵, 미래와의 대화 ②

어색한 미소

김굉필은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자 문하에 들었다. 처음에 곽승화(郭承華)와 같이 간 모양이다. 훗날 임진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고조이다. 예로부터의 관행에 따라 예물과 글을 바치는 속수집지(束脩執贄)의 예를 올렸을 것인데, 두 사람의 글은 없고 김종직의 「김·곽 두 수재(秀才)에게 답하다」두 수가 전한다. 수재는 과거를 준비하는 학생이다.

김종직이 첫 수에 적었다. "궁벽한 땅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니 무슨 행운인가, 진주 같은 작품 현란하게 펼쳐 보이네." 반가움이 물씬하다. 다음은 두 번째다.

그대의 시들은 옥에서 연기가 나듯 看君詩語玉生煙
이제부터 진탑을 걸어놓을 것 없겠네 陳榻從今不要懸
부디 은나라 반경을 끝까지 캐물으려 하지 말고 莫把殷盤窮詰屈
마음을 천연처럼 맑게 하여야 함을 알아야 할 걸세 須知方寸湛天淵


진탑(陳榻)은 후한(後漢)의 명신인 진번(陳蕃)이 다른 사람은 받아주지 않으면서 오직 서치(徐穉) 한 사람만 오면 특별히 걸상을 내려놓았다는 '진번하탑(陳蕃下榻)'의 줄임이다. '그대들이 앉을 의자를 마련하겠으니 올려놓을 틈도 없이 자주 찾아오라' 한 것이다. 옛 고사를 인용한 과장 섞인 풍격이지만 듣기가 좋다. 그리고 「반경(盤庚)」을 끝까지 캐물으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천연(天淵)에 두라고 하였다.

천연은 높은 하늘과 맑은 연못으로 『시경』「대아편(大雅)」'솔개는 솟아 하늘을 벗어나고 물고기는 못에서 뛰어놀고 있네'의 줄임이고, 「반경」은 탕왕의 첫 도읍지가 홍수로 사람이 살기 어렵게 되자 천도를 단행한 반경이라는 임금의 업적을 서술한 『서경』「상서(商書)」의 편명으로 예로부터 난해한 글로 꼽혔다. 김종직은 난해한 글보다는 마음을 높고 맑게 가지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런데 정녕 「반경」이 난해하므로 캐묻지 말라고 하였을까?

「반경」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모두 천도를 반대한 귀족에 대한 확고부동한 경고였다.

너희 귀족이여, 짐은 너희들이 좋은 일에 화합하지 못함을 백성에게 알릴 것이니 그러면 백성들도 해독을 끼치는 무리가 바로 너희임을 알 것이다.

짐은 너희 귀족과 멀고 가깝고 간에 인척이 되지만 이에 상관하지 않고 죄는 징벌하여 죽음을 내릴 것이요, 착한 덕은 표창하리라.

나라의 평안은 너희 귀족에게 달려 있고 나라가 잘못됨은 짐이 형벌을 제대로 행사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천도를 하려는 것은 장차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이어가려고 함이지 너희를 위협하려는 것이겠느냐, 오히려 너희를 받들고 기르고자 함이다.


「반경」은 백성을 살리는 일을 자기 이익을 내세워 방해하는 세력을 제압하자면 설득도 중요하지만 형벌의 단호함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담는 글이었다. 이렇게 읽힌다.

천도는 시대의 과제이고 백성이 원하는 바인데 귀족이 반대하고 있으니 백성에게 알려서 누가 나라에 해독을 끼치는가를 알게 할 것이고, 비록 왕의 인척이지만 상벌을 엄격히 적용할 것이다. 또한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귀족에게 달려 있지만 왕 역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세우지 않아서 나라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는 책임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귀족은 형벌이 두렵거든 천도가 백성을 살리라는 하늘의 명령을 삼가 받드는 일임을 알아야 할 것이요, 또한 천도가 귀족에게 유리함을 알아서 적극 협력하기 바란다!

임금은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단호하게 귀족을 억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왕권을 능가하는 권신의 농단, 권력의 소수 독점의 시절에는 좀 더 신중히 읽을 필요가 있다. 임금과 백성 나아가 나라의 '공공의 적'으로 권력집단을 지목하는 식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용히 숨죽이며 힘들게 읽어야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글이 「반경」이었다.

김종직은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일까? 아니면 마음을 높고 맑게 가지고 가야 「반경」같은 난해한 글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전자였다면 어색한 침묵이 흘렀을 것이고, 후자였다면 겸연쩍은 미소가 스쳤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임은 틀림없다.

『소학』의 발견

김굉필은 김종직에게 배우면서『소학』을 다시 살폈다. 주희의 문인인 유청지(劉淸之)가 초학자가 원시유교의 수행관(修行觀)과 성리학의 형이상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경전과 선현의 논설과 언행을 가려 뽑은 책이었다. 일찍부터 학자의 필독서로 장려하고 널리 보급하였지만, 여전히 『대학』의 입문서 내지는 과거 급제에 필요한 기초과목 정도로 치부되었었다. 김굉필 역시 벌써 『소학』을 독파했을 것이다.
김굉필 유묵(遺墨)

『경현록』수록. '굉필이 호란하게 적었다'는 '굉필호초(宏弼胡草)'로 보면 친필이 틀림없다. "매형의 절조를 가장 사랑하노니(最愛梅兄節) / 바람과 서리에도 시들지 않구나(風霜獨未凋) / 백년 사귀자고 기약하였건만(百年期作契) / 귀밑이 벌써 희어짐을 어이하fi(其奈鬢簫蕭)." 이 시는 정여창을 모시는 남계서원에서 베껴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정여창에게 건네준 시는 아닌지? 그렇다면 매형은 정여창인 셈이다.



김종직은 『소학』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의당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광풍제월'은 초목은 비 온 뒤끝 바람에 더욱 번득이며 달빛은 비가 갠 뒤에 더욱 맑다는 뜻으로 흔히 성리학적 우주론을 처음 제창한 북송의 대학자 주돈이의 쇄락(灑落)한 인품을 말한다. 주돈이가 창도하여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이르기도 한다. 성리학도 수신에서 시작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김굉필은 새삼스러웠다. '성리학도 성인의 삶과 뜻을 실천하는 공부일 따름이구나!' 『경현록』에 「소학을 읽고」가 있다.

글공부를 하였어도 아직 천기를 몰랐는데 業文猶未諳天機
『소학』에서 지난 잘못을 깨달았네 小學書中悟昨非
이로부터 정성껏 자식 도리를 다하며 從此盡心供子職
이제 구차하게 좋은 옷 살찐 말을 부러워하지 않으리 區區何用羨輕肥


천기(天機)는 우주 자연의 미묘한 조화를 말한다. 근대의 자연과학적 천문학이 아니라 추상적 천명의 인식틀이다. 즉 인간의 근원인 하늘을 공부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이제 비로소 일상적 도덕 실천이 중요함을 깨달았다는 고백이었다.

3행 '정성껏 자식 도리를 다하며'는 주자학을 원나라의 국정교학으로 삼은 대학자 허형(許衡)의 '『소학』을 신명과 같이 믿겠으며 부모와 같이 공경하겠다'는 어록을 인용하였다. '우리 임금이 요순이 되고 우리 백성이 인수(仁壽)의 영역에 들게 하는 기본이 『소학』에 있다'는 명언을 남긴 허형이었다. 수기가 곧 치인이라는 것이다.

김종직도 반가웠다. "이 말은 성인을 만드는 근기(根基)이니, 노재(魯齋) 이후 어찌 또 그런 사람이 없겠는가." 노재는 허형의 호다. 그런데 세 번째 행이 「점필재연보」에는 '앞으로 절로 명교(名敎)의 즐거움이 있으리니'로 되어 있다. 인륜과 명분의 가르침을 오로지 추구하겠다는 뜻이니 맥락은 비슷하다. 혹여 '허형을 곧바로 인용하기 보다는…' 하며 고칠 것을 주문하였는지 모르지만 『경현록』의 표현이 절실하다.

간절한 소망

김종직이 모친상을 마치고 조정에 나서려던 참이었다. 김굉필이 다섯 수를 올려 소망을 올렸다. 김굉필의 시는 전하지 않고 김종직의 답장 「김굉필에게」다섯 수만 전한다. 첫 수가 이렇게 시작한다.

백수가 외람되게 임금님 전교를 받았으니 白首叨蒙一札頒
시골에 살면서 청렴과 겸양을 내세울 것은 아닌 듯 幽居空寄讓廉間
그대 나라를 고치라는 말은 너무 이른 계책이 아닌지 君言醫國太早計
우리 도는 예로부터 굽혀 있기도 어려웠다네 吾道從來骪骳難


벼슬을 사양하고 은둔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에 조정에 나서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의 나라를 고치라는 의국(醫國)의 계책은 아직 때가 아니다,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교의 이상은 구현에 앞서 보존하기조차 어려운 날이 많았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김굉필이 어떤 말을 하였는지 어렴풋이 살필 수 있다. 아마 조정에 나설 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마당에 이왕 나서실 것 같으면 나라를 고치는 일에 매진하여 주시라는 바람을 적었을 것이다. 다소 격렬하게 시대의 병폐를 지적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을 것이다.

또한 김종직은 도를 실현하는 일이 어렵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그럴 만한 힘이 없음도 토로하였다.

대사를 어찌 내가 감당하리 大事吾何敢擔當
고질병엔 예로부터 좋은 처방이 없었다네 膏盲從古少良方
장차 임금의 고문에 참여할 때에 細氈顧問如將備
반드시 그대 시 다섯 장을 외우리라 要取君詩誦五章


자신은 시대의 변화와 나라의 개혁과 같은 국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능력이 없음을 숨기지 않고 다만 '그대의 뜻은 잊지 않겠노라' 하였다.

김굉필이 열성적으로 건의하였다면 김종직은 무척 미온적으로 반응한 셈이 된다. 그러면서 셋째 수에서 "세간의 만사가 참으로 소가 싸우는 것 같다"는 말로 때가 되지 않았음을 말하면서 이렇게 당부하였다.

한공이 오궁 보낸 것은 배우지를 말고 莫學韓公送五窮
장차 송옥의 웅풍부 같은 글을 짓게나 且同宋玉賦雄風


'한공의 오궁(五窮)'은 한유가 자신에게 부족한 지혜, 학문, 문장, 운명, 교유 등 다섯 가지를 한탄하며 글을 지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송옥의 웅풍부(雄風賦)'는 초나라 굴원의 제자인 송옥이 초나라 임금의 교만과 사치를 풍자하며 지은 노래였다.

'학문 지혜의 부족을 탓하거나 교유와 문장을 멀리하지 말고 세상과 임금을 향한 기상을 드러내라.' 이렇게 들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게 간곡하게 건의할 것이 아니라 조정에 당당히 나서 임금에게 직접 주장하라.' 심상치 않다.

스승과 갈라서다

성종 16년(1485)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되자, 김굉필이 시를 보냈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 전한다.

도는 겨울에 가죽옷 입고 여름에 얼음을 마시는 것에 있는데 道在冬裘夏飮氷
비가 개면 가고 장마 지면 멈추는 것을 완전하다 하겠습니까 霽行潦止豈全能
난초도 세속에 따르면 마침내 변하는 것이니 蘭如從俗終當變
이제 소가 밭 갈고 말을 탄다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誰信牛耕馬可乘


뜻이 분명하다. 도는 일상으로 추구하여야 할 과제인데 지금 스승께오선 시세 탓만을 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하며, 그래서 지금 세상에서 스승이 변했다고 하니 누가 앞으로 말씀을 바로 따르겠습니까? 추궁한 것이다. 그런데 1행의 '겨울에 가죽옷 입고 여름에 얼음물 마시는 것'을 말한 주희의 의도를 세밀하게 살피면, 여기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

일찍이 맹자는 존주(尊周)를 포기하고 도리어 제(齊)나라로 하여금 통일천하의 혁명에 나서도록 촉구하였는데, 이 때문에 북송의 사마광(司馬光) 등으로부터 존주를 향한 공자를 거역한 것으로 호되게 비판받은 바가 있었다. 이에 비하여 주희는 맹자를 옹호하였다. "공자는 주를 높였는데 맹자가 주를 존중하지 않은 것은 겨울에는 가죽옷 입고 여름에는 베옷을 입으며 배가 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즉 공자와 맹자가 살던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맹자는 존주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미 쇠락하여 명맥을 다해버린 주나라를 정성껏 지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앉아서 그 화를 끊임없이 당하게 만들어서 어찌할 것인가!'

만약 김굉필이 이러한 뜻을 담고 적었다면 '나라에 대한 충성, 임금에 대한 충성도 세도를 실천한 다음의 문제이며,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편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한 셈이 된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싸늘한 비판적 풍자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믿고 친한 사이라도 수용하기 쉽지 않은 풍간(諷諫)이었다.
김종직은 당혹스러웠다. 답장을 보냈다.

분수 넘치는 벼슬이 이어져 얼음을 깨게 되었으나 分外官聯到伐氷
임금 바르게 하고 풍속 고치는 일 어찌 할 수 있을까 匡君捄俗我可能
가르침 따르는 후배가 날 보고 못났다고 조롱하지만 從敎後輩嘲迂拙
시세와 이해를 따라 구차하게 편승하지는 않으리니 勢利區區不足乘


김종직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도 후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있고, 또한 시세에 아부하며 이해득실에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척 서운하였다.

김굉필의 도발과 같은 비판, 쉽지 않는 사건이었다. 이런 사실이 널리 퍼진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은밀하게 이루어졌으리라. 그런데 남효온이 어떻게 알았을까? 『사우명행록』에 두 사람의 시를 옮기고 '마침내 갈렸다'고 적었다.

이듬해 성종 17년(1486) 이런 일이 있음을 알게 된 김일손은 무척 서운하였다. 「김굉필이 점필재선생께 올린 시를 따라 짓다」를 다섯 수나 지어 보냈는데 다음은 첫 번째다.

여름 벌레 어찌 차가운 얼음을 말할까 夏蟲那可語寒冰
대성도 겸손하면 오히려 하나도 할 수 없는 일이 있거늘 大聖猶謙一未能
옛 사람은 은밀함을 드러내지 않았음을 알았으면 하니 欲識古人無犯隱
앞으로 우마더러 밭 갈고 탄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莫將牛馬說耕乘


성인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스승의 잘못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들춰내는 법은 없다고 항의한 것이다. 맹자가 성인이지만 제나라의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넌지시 비친 것도 같다.

김굉필은 모른 척하였다. 오히려 진주향교 교수를 자청한 김일손을 지켜보며 좋아하며 널리 알렸다. "김일손은 교수하는 근본을 깊이 체득하여 교학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부친상을 마친 다음 성종 21년(1490) 여름에는 가야산에도 같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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