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15세기 후반 권력의 오만과 부패에 넌더리를 쳤던 시대적 양심들의 진실을 향한 투쟁과 내일을 여는 성찰은 추상에 그쳤는가? 이러한 의식과 지향에 대한 당대의 호응은 어떠하였는가? 나아가 이들의 낙담과 자각, 시련과 진취, 재기와 좌절, 분노와 소망은 정녕 지난날의 서사일 뿐인가?
어느덧 연재를 마감하자니 부족한 점이 많았다. 먼저 세조의 정변과 찬탈에 공훈을 세운 훈구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를 적지 못하였다. 또한 전하고 싶은 인연과 사연을 인물에 따라 나누어 들추다 보니 무척 산만하여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였다. 이러한 어설픔과 아쉬움을 한데 묶어서 종장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정변과 찬탈의 유산
세조의 정변(1453)과 찬탈(1455)은 치밀하고 신속하였다. 시세의 급변함을 견디지 못하고 낙향한 몇몇 신료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숨을 죽였다. 세조의 문무를 겸비한 기상과 무서운 기세에 무너진 것이다. 일화가 있다. 활쏘기가 뛰어난 세조는 '사냥을 나가면 짐승 피로 겉옷을 벌겋게 물들였다'고 하는데, 문신들은 이러한 야성과 무용에 겉으로 태연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기가 질리기 마련이다.
당시 정예관료의 모집단인 집현전 학사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단종복위운동(1456)이 일어났을 때에는 적지 않게 공포에 시달렸다. 양성지(梁誠之)는 복위운동과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얼마나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던지 나중에는 공모의 혐의까지 받았는데, '그때에 누가 두려워하지 않았겠느냐?'고 한 세조의 보증 덕분에 무사하였다. 『성종실록』14년(1483) 6월 11일 양성지 졸기(卒記)에 나온다.
세조 치세 아래에서 정예관료는 육조의 정무는 의정부의 의결과 서명을 거치게 한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나 왕권을 정점으로 '승정원-의정부-육조'의 균형과 견제를 지향하였던 정치구상과 포부를 드러낼 수 없었다. 그 대신 권력과 재물을 얻었으며 승차가 빨랐다. 조정의 공백이 가져온 세대교체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세조의 즉위 당시 환갑이었던 정인지(鄭麟祉)를 제외하면 정창손(鄭昌孫), 구치관(具致寬),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 핵심 공신들은 거의 50대 전후에 영의정에 올랐다. 물론 공신을 한 자리에 오래 머물게 하여 권력을 몰아줄 수 없다는 세조의 용인술이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실제 세조는 자신의 공신을 믿지 않았다. '이시애(李施愛)의 난(1467)' 때에는 한명회와 신숙주까지 일시 구금하고, 이때 공을 세운 '신(新)공신'을 전면에 배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훈이 오래된 '훈구(勳舊)'의 실체와 기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專]가 무리[衆]를 언제까지 제압할 수 없듯이 임금은 아무리 신하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무시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예종 치세와 성종 치세 초반 훈구공신 중 소수 핵심은 승정원으로 출근하고 숙직하는 원상으로서 '겸(兼)이조' '겸(兼)병조' 등의 직함을 가지고 국정을 요리하였다. 소위 원상제(院相制)는 정권의 분립과 균형의 취지를 훼손한 과두제(寡頭制)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패악으로 악명 높은 홍윤성(洪允成)이 45살에 영의정이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의정부가 원로대신 훈구공신들의 연락사무소로 격하된 것이다.
한편 훈구공신은 '남이(南怡)의 옥(1468.10)'을 방조하며 익대공신(翊戴功臣)을 나눠가졌다. 궁궐 숙직 중에 남이가 혜성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 하였는데, 유자광이 밀고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이시애의 난'으로 일등공신이 되어 28살에 병조판서에 올랐던 남이는 예종 즉위와 더불어 쫓겨나 불만이 없지 않던 참이었다. '신공신'을 제거하려는 '구(舊)'공신의 노회한 그물치기와 이를 눈치 챈 유자광이 던진 미끼를 남이가 그만 덥석 물었던 것이다.
훈구공신은 성종 즉위에 즈음해서도 또 하나의 공훈을 보탰다. 예종의 원자 제안대군(齊安大君)과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아니라 성종이 왕위를 승계한 것은 '택현(擇賢)'의 명분이 있었다. 태종이 세자를 갈면서 다음 서열인 효령대군을 제치고 충녕대군을 선택할 당시의 논리였다. 그런데 태종의 신료들은 공훈을 입에 담기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세조의 공신들은 드러내놓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을 꿰찼다. 신하가 임금을 세운 공훈을 주장하는 자체가 권력의 오만이며 군주제의 비명일 따름이었다.
화려한 외도(外道), 일가주의(一家主義)
훈구공신은 국권(國權)과 사권(私權)의 경계를 가볍게 여겼고 왕실과 사가(私家)를 혼동하였다. 좋은 예가 있다. 성종 7년(1476) 정월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수렴청정을 마감할 때였다. 첫째 딸을 세자 시절의 예종에게 들이고, 둘째 딸을 잠저(潛邸)의 성종에게 시집보내 마침내 중전으로 삼았던 한명회가 나섰다. "신은 평상시에 대궐에 들어와 안심하고 술을 마셨는데, 만약 대비께서 정사를 내놓으신다면 이는 동방의 백성을 버리시는 것이며, 신 또한 안심하고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훈구공신은 권력을 즐겼으며 또한 집착하였다. 사위 김질(金礩)과 함께 사육신의 거사계획을 처음 고발한 정창손은 '산업을 경영하지 아니하여 사는 것이 쓸쓸하였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였지만, 조정 모임에서 매양 넘어지면서도 사직하지 않고 88세로 세상을 뜨기 얼마 전까지 영의정을 놓지 않았다. 김시습이 거리에서 만난 정창손에게 '너 그만 두어라' 한 것도 단순한 헤적거림이 아니었다.
최항은 재상이 되면 예문관 대제학을 사임하던 당시의 관행에도 불구하고 계속 겸임하다가 처남인 서거정(徐巨正)에게 넘겨주었다. 권근(權近)의 외손이기도 한 서거정은 22년간이나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면서 무려 23차례의 문과를 주관하였다. 권근도 오랜 동안 예문관을 맡았으니, 한 집안에서 반세기 동안 학문과 문장의 기준을 세우는 문형(文衡) 즉 학문권력을 구가하였던 셈이다.
또한 이들은 재물과 관련하여 추문을 뿌렸다. 당대 최고 학자이며 원로로 대우받은 정인지나 세조 치세 국방과 재정 등 여러 분야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여준 양성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인지는 '성품이 검소하여 생활은 소박하게 하면서도 재산 늘리기를 좋아하여 수만 석이 되었는데도 이웃 사람의 집까지 차지하였다'고 하고, 양성지는 돈 냄새 풍기는 '동취(銅臭)'라는 세간의 평을 얻었다. 또한 최항은 '사위를 봄에 있어서 인품을 논하지 않고 부자만을 취택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훈구공신의 권력과 재화에 대한 집착은 가히 '일가주의(一家主義)'라 할 만한 것이었다. 수기치인을 통하여 세상과 더불어 착함을 이룬다는 '겸선천하(兼善天下)'의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정변과 찬탈에서 건져낸 서글픈 전리품이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훈구공신은 과거를 망각하며 기억을 부정하였다. 실록의 기본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에도 반듯이 사관(史官)의 이름을 적도록 하였다. 어두운 과거사가 비판적 사론과 함께 실리지 못하게 할 셈이었던 것이다. 『세조실록』의 편찬이 진행될 즈음에 원숙강(元叔康)이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쓰게 함은 옛 제도가 아닐 뿐 아니라 바른대로 쓰는 사람이 없을까 두렵다'고 건의하였을 때에도, 훈구공신은 좌시하지 않았다. 결국 원숙강은 고문을 받다가 죽고, 사초를 고친 사실이 드러난 민수(閔粹) 역시 관노가 되는 형벌을 받았다. 기억의 억압을 통한 역사 왜곡과 과거사 은폐 과정에서 빚어진 불행한 사건이었다. 원숙강은 수양대군의 집권에 반대하며 원주로 숨었던 원호(元昊)의 손자였다.
이러한 시대에 청맹과니를 가장하며 낚싯대를 드리웠던 사람들은 한숨을 쉬었다. 원호 이외에 선산의 이맹전(李孟專), 파주의 성담수(成聃壽), 함안의 조려(趙旅) 등이었다. 김시습은 세상을 비웃으며 떠돌았다. 이들의 은거와 방랑은 진실을 기억하기 위한 비타협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비판언론과 기억운동
성종 9년(1478) 4월 이심원(李深源)의 '세조의 공신은 물러나게 하자'는 상소는 훈구파의 두터운 장벽을 균열시키는 기폭제였다. 훈구파의 권력독점과 이기주의가 빈번하게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국왕의 특혜 인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론을 담당하는 신진관료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원로중신 사이의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비판언론의 활성화에 힘입어 성종 치세 후반이 되면 훈구파의 대안세력으로 사림파가 부상하였다.
비판언론은 사림파 형성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는 데에 필요하였지만 그 자체로서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국가의 권력구조가 부여한 언론은 현실비판의 무기이기에 앞서 정예관료의 출세를 보장하는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문장과 언변 그리고 순발력을 갖춘 언관이라면 출세와 재물을 위해서라도 얼마든지 준열하고 멋들어지게 간쟁과 탄핵을 수행할 수 있으며, 나아가 파당적 이해까지 대변할 수 있다면 현란한 '나팔수'로 각광받을 수 있는 텃밭이요 무기가 언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언론의 진정성은 언관의 시대의식과 미래를 향한 소망 등과 함께 살펴야 한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확연한 구분선은 어두운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치유할 것인가 하는 역사의식이었다.
세조의 정변과 즉위가 몰고 온 공포의 시대에는 어두운 상흔의 기억은 숨은 노래로 나타났다. 김종직의「조의제문」과 세상에서 숨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비롯한 여러 시문이 대표적이다.
성종 9년(1478) 4월 남효온이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이미 왕이 아닌 노산군'의 생모라는 이유로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문종의 능침에 묻힌 관곽(棺槨)이 파헤쳐진 사건을 거론한 것이다. 세자빈 시절 단종을 낳고 문종이 즉위 이전에 세상을 떠난 그녀의 능침이 소릉(昭陵)이기 때문에 '소릉복위상소'라고 한다. 왕실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도덕성이 추락시킨 세조 치세의 최대 약점으로서, 그동안 누구라도 말하지 못하였던 금기사항을 건드린 것이다. 역사의 상흔을 치유하자는 역사투쟁과 기억운동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후 남효온은 「육신전」을 통하여 '사육신 충신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사림파는 비판언론의 활성화 이전에 기억운동을 통하여 존재를 드러냈다. 재야에서 시작한 기억운동은 점차 조정을 무대로 전개되었다. 그동안 억압당하고 부정되었던 소수의 사적 기억을 사초를 통하여 '공식화' '국가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표연말(表沿沫), 신종호(申從濩), 홍한(洪瀚),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등이었는데, 이중에서 김일손(金馹孫)의 사초가 압권이었고, 이로서 무오사화가 발단되었다.
이러한 기억운동은 중종 치세 초반 노산군의 입후치제(立後致祭)와 소릉복위 실현으로 일차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단종의 복위와 사육신(死六臣)의 복권은 17세기 말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때 숙종은 이런 시를 남겼다. "단종 복위하던 날, 세조의 덕은 더욱 빛나니, 평생의 소원을 이루셨으리니, 내 기쁨이 또한 어찌 오래 가지 않으리!"
학문권력의 향배와 철학운동
사림파는 국가의 역사 및 인문지리 편찬사업에도 참여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과 같은 국가문헌을 수정하고 보완하였다. 그동안 훈구파가 전담하였던 국가 차원의 학술사업을 분장(分掌)하면서 훈구파 독점의 학문권력(學文權力)을 분점(分霑)한 것이다. 그만큼 사림파의 위상이 높아졌다.
여기에서 사림파는 도덕적 문명국가를 향한 역사적 화해와 협력의 시각을 제시하였고, 국토를 보는 인문적 관점은 지방의 문화역량과 자치자율에 대한 믿음을 키웠다. 이러한 의리론(義理論)과 정통론(正統論) 나아가 문화국가론은 훈구파와 차별화된 역사관이며 국토의식으로 김종직과 문인집단이 한 복판에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 무엇을 위한 학술이며, 누구를 위한 문장인가를 고민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국가의 학문, 조정의 문장에 비판적인 새로운 학문관(學文觀)으로서, 인간의 길을 위한 학술과 문장 즉 '도(道)의 학문'과 '도의 문장'을 추구하는 흐름이었다. 이른바 도학파(道學派)의 출현으로 김굉필과 정여창 등이 선도하였다.
도는 공자가 '사람이 길을 넓히지, 길이 사람을 넓히지 않는다'고 하였듯이, 사람이 주인이 되고 함께 가야 하는 인간의 길[人道]이었다. 또한 『주역』의 '한번 음이면 한번 양이 되는 까닭을 도라고 한다'는 우주원리 즉 천리(天理)의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도학은 하늘의 이치를 따라야 한다는 인간의 도리를 최우선으로 삼았고, 문장은 도를 담는 재도(載道)의 도구로 여겼다. 송나라 주돈이 이래 주희에 이르는 학술과 문장에 대한 주장을 살핀 것이다.
도학파는 성인 배우기를 공부를 삼고 경전의 내면화ㆍ자기화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전을 암기하여 옮길 수 없다거나 송나라 학자의 경전 풀이가 난해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간을 살리는 문명을 추구하였던 성인의 뜻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일상에서 본받으려는 노력이 앞서야 했던 것이다.
도학파는 성인의 마음을 제 마음으로 삼는 '잠심(潛心)' '전심(專心)' 공부를 위주로 삼았다. 물론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길의 통일을 어떻게 증명하고 설명하자면 문장으로 드러내는 저술도 필요하였지만 이것은 다음 문제였다. 김굉필과 정여창 등이 훗날 '말과 글을 세워 후학을 가르친 입언수후(立言垂後)의 공이 없다' 혹은 '학문의 증거가 없다'고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김시습에게 도학분야의 저술이 많았다. 워낙 천재적이기도 하였지만, 자기와의 긴장과 세상에의 관심을 놓치지 않으면서 송나라 학문을 자유스럽게 섭렵할 수 있을 만큼 '버림[棄]의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시습의 철학적 성취는 상당 부분 남효온에게 전수되었다. 김시습과 남효온은 송나라 장재(張載)의 '기학(氣學)'을 선호하였다. 우주 자연철학에서 현상과 운동의 구체성과 실존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비하여 정여창과 김굉필은 구체적 운동과 현상에 앞선 선험적 원리, 궁극의 이치를 강조하는 '리학(理學)'의 편에 섰다. 특히 정여창과 남효온은 마음을 보는 입장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이 문제로 잠시 논쟁을 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철학논쟁의 제1막이었다. 그러나 16세기가 되면 서경덕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성리학자가 '리학 중심', 나아가 '주희 위주'의 입장을 취하면서 기학의 관점은 묻히고, 주희 아닌 다른 학자의 학설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새로운 실천윤리와 약간의 엇갈림
사림파는 자아 완성의 목표와 기준을 성인에 두었다. 따라서 일차적 관심은 하늘에서 받은 본성의 자각과 일상적 실천이었다. 물론 세상과의 만남, 시대와의 대화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공자의 '오로지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도 정치를 하는 것이다' 하는 가르침을 깊이 새긴 것이다. 수기는 치인의 전 단계가 아니라 치인 그 자체였다. 그만큼 『소학』의 실천을 중시하였다. 맹자도 말하였다. "옛 사람은 뜻을 얻지 못하면 수신(修身)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냈다."
사림파는 여건이 맞지 않으면 얼마든지 현실참여를 유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 벼슬을 앞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의 여건이란 '나라에 도가 있는가, 없는가?' 혹은 '임금과 신하가 의리로 만나는가, 그렇지 못한가?' 등이었다. 임금의 책임, 신하의 의무를 동시에 고려하는 군신윤리(君臣倫理)를 모색한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임금과 신하는 맹목적 주종관계가 될 수 없다는 군신계약론(君臣契約論)에 가깝다. 이때에 16세기 사림의 출처관(出處觀)이 형성된 것이다.
또한 사림파는 '스승은 사람에 있지 않고 도에 있으니, 스승 삼는다는 말은 도를 스승으로 삼는다는 말이지, 가르치는 사람을 스승 삼는다는 말이 아니다'는 생각을 키웠다. 김굉필의 동지이며 문인인 최충성(崔忠成)의 논문 「성인이 백세의 스승이다(聖人百世師論)」에 나온다. 스승과 제자는 과거와 출세와 같은 현실관계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길을 함께 추구하는 긴장관계를 생명으로 한다는 새로운 사우론(師友論)이었다.
김굉필의 스승 김종직에 대한 비판도 출처관과 사우론의 변화라고 하는 시대적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16세기 중반 새로운 학풍의 결정체인 학단(學團)을 이끈 이황과 조식 등이 김굉필을 도학의 적통으로 추앙하였다. 따라서 김종직과 김굉필의 관계설정은 이후에 어떻게 고착되고 과장되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사제의 분열 혹은 스승과의 의절 혹은 결별의 차원에서 단정을 내릴 사안이 아니다.
한편 사림파는 성종 치세 초반부터 소통과 교류의 장을 찾았다. 강응정(姜應貞), 남효온 등의 '소학계(小學契)'나 김굉필, 최부(崔溥) 등의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 등이었다. 여기에서 '우리 당[吾黨]'의식이 싹텄다. '오도(吾道)의 동지'라는 의미로 훗날의 붕당의식과는 다른 동질의식이었다. 훗날 무고로 배척당하게 되지만 김종직과 문인집단이 '경상도선배당(先輩黨)'으로 지목된 일이 있었고, 김일손은 평안도평사로 가는 벗을 보내며 자신들을 '오당(吾黨)'이라고 자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대와 결속은 훈구파에 의하여 배척되었고 사화를 거치면서 집단피해를 당하였다.
물론 사림파가 한결 같게 동지적 유대를 과시하고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남효온, 홍유손(洪裕孫), 신영희(辛永禧) 등이 '죽림우사(竹林羽士)'를 자처하였을 때, 정여창과 김굉필 등은 '세상을 깔보고 시사를 격렬하게 비웃는 것은 동진(東晋)의 청담풍(淸談風)이다'고 비판하면서 균열이 있었다. 실제 김굉필은 신영희에게 절교를 선언하기도 하고, 남효온 역시 김굉필과 갈라섰음을 알리고 끝내 화해하지 않았다.
이러한 갈림을 오늘날 '절의파=청담파'와 '도학파=사림파'로 구분하지만 완전한 분화는 아니었다. 굳이 나눈다면 전자가 직접 대응의 현실비판에 역량을 쏟았다면 후자는 미래준비를 위한 역량 축적의 길을 가고자 한 정도의 차이였다. 자아실현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마음의 여정
이번 연재에서 다루었던 여섯 사람의 만남과 갈림도 정리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함양과 현풍·현풍에 살면서 일찍부터 교류한 정여창과 김굉필은 지금도 '지동도합(志同道合)'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는 회현방(會賢坊) 같은 동네에 살았다. 두 사람은 성균관 시절에 만난 남효온과 공부하고 토론하며 무척 친밀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현실 대응방식 즉 직접 비판인가, 차분한 모색인가를 두고 아스라한 결별의 아쉬움을 남겼다.
이들 세 사람의 김종직 및 김시습과의 관계가 흥미롭다. 정여창과 김굉필은 20대 초중반에 김종직에게 처음 찾았는데, 정여창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였다면, 처음에는 열렬하였던 김굉필은 나중에 갈라섰다. 이에 비하여 남효온은 일찍이 배우거나 만난 적이 없었지만 김종직을 무척 존경하였다. 전라도 여행 중에는 감사로 내려온 김종직을 찾아가고 나중에는 밀양까지 가서 만났다. 그리고 김굉필과 정여창의 스승에 대한 태도를 은근히 비판하는 글을 남겼다.
한편 남효온은 불교관의 차이로 다소 소원한 적이 있었지만 김시습을 스승이자 벗으로 삼았을 만큼 처음부터 밀접하였고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었고 김일손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하여 정여창과 김굉필은 김시습을 만난 적도 없고 만나려고 한 자취도 없다.
그런데 세조의 정변과 찬탈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김시습과 김종직은 온통 엇갈리는 행보를 보였다. 김종직이 한양에서 벼슬할 때 김시습은 지방을 떠돌았으며, 김종직이 지방관이 되고 모친상을 당하여 밀양에서 지낼 때 김시습은 한양 근처 수락산에서 살았다. 그리고 김종직이 조정으로 복귀하자 이번에는 김시습이 관동으로 떠났다. 혹여 김종직이 경상도 평사로 경주에 갔을 때 김시습이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우연히 옷깃이라도 스쳤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겠다. 그러나 김종직이 경주에 들어섰을 때에 김시습은 마침 원각사 법회로 한동안 출타 중이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편할 것 같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를 리가 없었다. 김시습의 어린 시절 천재성은 세종까지 듣고 상급까지 내리면서 온 나라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김시습 역시 산중에 살면서도 손님이 찾아오면 반듯이 도성 소식을 묻곤 하였으니, 문장과 학술 그리고 많은 후진이 따르는 김종직의 명성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 찾았다는 흔적이 없다. 두 사람과 모두 가까운 남효온이나 김일손에게도 소식을 물었다거나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요청한 자취도 아직까지는 찾아볼 수 없다.
다섯 사람과 두루 만난 사람은 김일손이었다. 김종직과 김시습보다는 한 세대, 나머지 세 사람에 비하여 십 년 연하이지만 조금도 어색함이 없는 만남을 끝까지 유지하며 학문과 소망을 교환하며 서로의 근황을 알렸다. 문장과 기상, 정론과 언론으로 이들의 신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기도 하였다. 한편 남효온과 청도의 운문사, 정여창과 지리산, 김굉필과 가야산을 올랐다. 특히 남효온과 함께 원주의 원호, 파주의 성담수 등을 예방하기도 하였다. 김일손의 기억운동에 있어서 강력한 격려자이며 동지가 남효온이었다.
이들에게 한 자리의 만남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역사를 기록만으로 전부 파악할 수 있다거나, 한 시대의 인물을 평가하는 데 오늘의 노선과 관점이면 충분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갈라섬과 엇갈림을 전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학문을 지적 쾌감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한 인간을 역사의 무덤에 가두어놓고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흐름의 공간'을 위하여
전기 사림파는 한 길을 같이 가지는 않았지만, 진실을 향한 투쟁과 미래를 향한 성찰의 뜻과 길은 같았다. 이들의 갈라섬과 엇갈림조차도 거짓과 욕망을 잉태한 시대의 아픔을 마감하려는 나름의 선택이었다. 또한 그들의 도전과 좌절, 그들의 아픔과 죽음이 있었기에 다음 세대의 길이 열렸음도 자명하다.
지난 세기 절규와 상흔, 도전과 희생의 가치를 진실의 광장에 드러내지 못한, 그러면서 아름다운 패자를 배려하지 않았던 인식의 빈곤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그동안 우리는 전기 사림의 진실과 성취를 너무 가볍게 취급하였다. 15세기 후반 실천적 양심의 가시밭길을 부국강병의 추구, 제도 문물의 완성이라는 강국론(强國論)과 실용론(實用論)의 굴레에 가두어 놓았던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들의 학문의 깊이와 성향의 다양함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여전히 15세기와 16세기를 갈라놓고 후자의 주류 견해를 기준으로 전자를 재단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경계 치기와 계보 그리기였으며, 한 편에 대한 추앙과 다른 한 편에 대한 폄하였다. 이러한 갈무리는 결코 객관적이지도 않고 역사적 사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올바른 역사학은 한 인간의 행동과 발언, 소망과 분노, 나아가 침묵과 좌절까지도 시대의 상황과 맥락에서 관찰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하여 단절과 배제가 아닌 계승과 전환의 궤적을 찾을 수 있어야 하며, 노선과 분파를 넘어서는 교류와 소통의 흔적을 엿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실천적 역사학은 미래를 향한 전망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어떤 시대, 어떤 장소에서 일어났던 간에 세상을 향한 진실과 열정을 가진 인간들의 갈등과 경쟁, 멈춤과 늦춤을 하나의 강으로 한 데 묶어 흐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장소와 시간에 따라 흩어져 있는 기억을 '분절을 넘어 연계로' '단절을 넘어 통합으로' 가져가는 '흐름의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아름다운 패자에 대한 겸허한 회상이며 경건한 부활의식이다.
지난 몇 달 동안 과분한 격려와 관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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