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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과 언론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일손(金馹孫): 당신의 죽음은 하늘의 시샘이었다 ④

역사의 상흔을 치유하지 않으면 중흥할 수 없다

김일손은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에게 『소학』과 『통감강목(通鑑綱目)』, 그리고 사서(四書)를 익혔다. 그리고 밀양을 찾아 상중의 김종직에게 배웠다. 17세 때였다. 김종직은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나의 의발(衣鉢)을 전할 사람은 그대인데, 훗날 문병(文柄)을 차지할 것이다." 문병은 문형으로 국가의 학술과 문장의 표준을 세우는 직임이었던 성균관 지사까지 겸임하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말한다.

김일손은 19살에 문과에 도전하였는데 같이 응시한 두 형을 위하여 아프다는 핑계로 퇴장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때 두 형 김준손(金駿孫)과 기손(驥孫)은 나란히 합격하였다.

김일손은 부친상을 마친 직후 성종 17년(1486)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23세였다. 그때 책문(策問)이 '중흥의 대책을 논하라'였다. 즉 '옛적부터 제왕이 천하를 얻고 대업을 이루었으나 자손이 지키지 못하여 쇠퇴하고 부진하다가 중흥하곤 하는데 연유와 사적을 설명하라.' 또한 물었다. '천하의 형세는 정해진 운수가 있어 인력을 용납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치도(治道)를 다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먼저 '형세, 운수, 치도'의 관계를 정의하였다. "도(道)가 벼리[綱]이니 도를 얻으면 형세와 운수는 말할 필요가 없다." 즉 형세와 운수는 사람의 처사와 사람의 노력에 의한 치도의 실행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일치일란(一治一亂)과 일합일리(一合一離)도 치도의 문제이지 형세와 운수에 의탁할 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풀어나갔다.

치도의 주인은 임금이며 그 요체는 수기임인(修己任人)이다. 수기는 밝은 임금 즉 명군이 되기 위한 바탕이며, 이때 비로소 좋은 재상을 얻는 임인을 수행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성군이라도 양상(良相)이 없으면 천하를 안정하여 나라를 세울 수 없다.

흔히 역사는 창업주에게서 용기와 지혜 그리고 강인함의 덕목만을 평가하는데 그렇지 않다. 물론 군웅이 각축하고 백성이 의지할 데가 없던 난세를 마감하고 새 나라를 세우자면 그러한 덕목이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수기임인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민심을 얻고 천명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기임인이 창업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 청계서원(淸溪書院)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김일손은 1495년(연산군 1) 벼슬을 그만두고 정여창과 더불어 강론하며 살고자 함양 남계에 청계정사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모친이 세상을 떠나 뜻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탈상 후에 이곳으로 왔다. 여기에서 무오사화가 일어나서 연산군에게 잡혀갔다. 1907년 지방 유림이 청계정사 터에 서원을 조성하였다. 남계서원 바로 옆에 있다.



그러나 역사를 살피면 창업의 국가는 얼마 후부터 쇠퇴하고 민심이 흩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중흥'과 '멸망'의 기로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중흥을 정의하였다.

무릇 중흥이란 이미 끊긴 천명을 다시 맞아 이어가고 이미 흩어진 민심을 다시 가두어 합치는 것이니 넘어진 나무의 그루터기에 싹이 트는 것과 같고 고인 물이 다시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중흥책(中興策)」

이때 임금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물며 용기와 지혜, 강인함의 측면에서 창업주를 따를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가? 다름 아닌 수기임인이다. 이렇게 적었다.

중흥의 도는 수기임인인데, 수기는 중흥의 실체[實]이며 임인은 그 활용[用]이니 수기를 하지 않고서는 임인을 할 수 없습니다.

김일손은 금상의 치세를 중흥기로 보았다. 그러면서 단언하였다. '아아, 중쇠(中衰)가 없다면 어찌 중흥(中興)이 있겠습니까!' 왕조 창업 백 년 동안에 나라가 일시 쇠퇴하고 민심의 이반을 겪었다는 것이다. 세조와 예종의 치세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들린다. 그러나 중흥이 절로 올 수는 없었다. 임금은 자신을 닦고 착한 선비를 등용하여야 하지만, 먼저 반드시 해결하여야 할 일이 있었다.

천지의 억울함을 풀고 일월의 어둠을 열면 기강과 법도가 찬란하게 수복될 것이며 예악문물이 다시 떨칠 것이니 이러한 다음에 중흥의 성대함이 열린다고 하겠습니다.

천지의 억울함과 일월의 어둠은 무엇일까? 단종의 죽음과 현덕왕후의 폐출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중흥을 위한 일차적 과업으로 어두운 과거의 상흔을 치유할 것을 제기한 것이다. 당당하고 우렁찬 경륜이며 포부였다.

비판과 대안

김일손은 주로 예문관·홍문관·사간원·사헌부에서 봉직하였다. 또한 항상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기주관(記注官) 등을 겸임하며 경연에 출입하였다. 언관과 사관을 맡으며 국가 학술과 문장에 관한 사업에 종사한 것이다. 정예관료의 길이었다.

김일손의 언론은 준엄하고 냉정하였다. 훈구대신에게는 거침이 없었다. 특히 윤필상·이극돈·성준(成俊) 등이 권력을 남용하고 세력 부식에 열중한 사례를 폭로하며, 이들을 권세 있는 귀족, 즉 '권귀(權貴)'로 비판하였다. 사대부의 길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김일손의 언론은 비판에 머물지 않았다. 단적인 사례가 있다. 성종 22년(1491) 3월 지방관의 불법과 탐학을 줄이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대부분 신료가 사헌부와 의금부의 관료를 파견하여 감시하고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일손은 달랐다.

국가에는 예문관이 있어 춘추관을 겸하면서 시사(時事)를 기록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방은 야사(野史)가 없기 때문에 불법을 저질러도 악명이 후세까지 전해지지 않고, 품행이 탁월하고 기위(奇偉)한 사람의 이름도 아울러 묻혀 전해지지 않습니다. 지방에도 정치와 풍화(風化)에 관계되는 일을 기록할 수 있도록 기주관을 두어야 합니다. 『성종실록』 22년 3월 21일

'지방에 기주관을 두자' 한 것이다. 기주관은 5품의 관료가 겸임하는 사관(史官)이었다. 엉뚱한 것 같다. 그러나 춘추관의 직제를 보면 발언 의도를 살필 수 있다.

춘추관의 동지사(同知事)·지사(知事)·영사(領事)는 정2품 이상 판서와 정승이 겸임할 뿐 실무는 맡지 않았다. 기사의 수정과 편집은 정3품 수찬관(修撰官)과 종4품~종3품 편수관(編修官)이 맡았다. 그리고 기사의 작성과 검토는 5품 기주관과 그 이하 품계인 기사관의 몫이었다. 굳이 구분한다면 기주관은 기사를 검토하여 보완하는 위치라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날마다 사건의 정리와 평론이 이루어졌다. 국사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고 역사적 포폄(褒貶)을 위한 문치적 장치였다.

김일손이 말하는 '지방기주관'은 '춘추관의 분소(分所)'와 같았다. 지방에도 사건이나 인물을 기록하는 '야사(野史)'제도를 통하여 지방의 불법을 방지하고 훌륭한 인재를 발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방기주관 기구를 어떻게 구상하였는가, 즉 수령을 책임자로 하고 향교의 훈도나 교수를 기주관 정도로 생각하였는지, 아니면 별도로 중앙에서 파견하려고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야사' 제도를 지방 정치와 문화의 핵심기구로 상정하였음은 분명하다. 자못 큰 그림이었다.

다른 신료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영의정 윤필상이 나섰다. "조정에 이미 사관이 있어 시정(時政)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으니 다시 새로운 법을 마련할 필요가 없다." 결국 김일손의 제안은 없던 것이 되고 말았다.

임금의 기대와 걱정

성종은 김일손의 포부와 기개 그리고 경륜을 높이 샀다. 아마 세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것도 좋았던 모양이다. 자신 치세에 이룩한 성대한 문치의 징표라고 생각하였는지 모른다.

성종은 김일손 형제가 모친을 봉양하며 살 수 있도록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세조의 으뜸 공신이며 영의정을 지낸 최항이 살았던 집까지 내렸다. 흥인문 근처의 낙산 아래 영천동(靈泉洞)의 낙산원정(駱山園亭)으로 개울과 바위가 어우러져 자못 상큼한 정취를 돋우고 샘 위에 이화정(梨花亭)이라는 작은 초가까지 딸려 있었다. 그런데 한양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지 모친이 자꾸 귀향을 고집하자 백형 김준손이 함양군수로 나가며 반납하였는데, 성종은 요동질정관에서 돌아온 김일손에게 내렸다.

언젠가 성종이 동부승지 조위에게 김일손에 대한 소감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조위가 승정원에 봉직한 기간이 성종 21년(1490)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였으니 아마 저간이었을 것인데, 『탁영선생연보』 연산군 원년(1495) 2월에 전한다.

김일손은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의 재능과 기량을 갖추었으며, 풍채는 장대하고 기절은 곧고 바르다. 또한 의론은 준엄하고 정연하여 대각(臺閣)을 통솔할 만하고, 지략은 넓고 깊어 낭묘(廊廟)의 직책을 맡길 만하다. 언론을 위하여 백부(柏府)의 요직을 맡겼고, 학문을 위하여 경연과 한원(翰苑)의 직위에 오르게 하였으며, 반드시 경사(經史)의 직책을 겸임하게 하였으니 장차 보상(輔相)으로 크게 쓰고자 함이다.

대각은 사간원, 낭묘는 의정부, 백부는 사헌부, 한원은 예문관, 경사의 겸임은 홍문관과 춘추관을 말한다. 간쟁과 실무, 학문과 문장 그리고 언론의 기량을 고루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차 보상 즉 임금을 보좌할 정승에 오를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이다. 두 차례의 북경행도 사대외교의 경험을 쌓게 하려는 성종의 배려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걱정이 없지 않았다. 역시 조위에게 말하였다.

김일손은 성품과 행적이 너무 준엄하고 고상할 뿐 아니라 젊어서인지 기상이 너무 날카롭고 언론이 심히 곧으니 그의 노성(老成)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성종은 김일손이 기상과 언론이 지나치게 비타협적인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방으로 잠시 내려 보낼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아마 '그대 조위는 김일손과 절친하니 이 말을 조용히 전해야 할 것이다' 하였으리라. 실제로 김일손은 얼마 후인 성종 22년(1491) 10월 충청도 도사로 나갔다. 감사를 보좌하며 서무를 총괄하던 직임이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리다

김일손의 언론은 임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의 숨김이 없었다. 성종 20년(1489) 7월 예문관 검열로 있으면서 '임금이 술을 좋아하고 희첩을 가까이하며, 종친과 기락(妓樂)을 즐기는 폐단'을 아뢰었다. 폐비사건을 겪을 만큼 후궁이 많고, 또한 대왕대비와 왕대비, 대비는 물론 월산대군을 위로하는 연회를 자주 열었던 사실을 적시한 것이다. 그리고 국정의 요체로 '학문권장·욕망억제·학교진흥·풍속교정·궁금엄정(宮禁嚴正)·유일등용(遺逸登用)·간쟁가납(諫諍加納)·충간분변(忠奸分辨)'을 건의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국가의 금기사항도 서슴없이 들춰냈다. 성종 21년(1490) 3월 『춘추좌씨전』을 강의하는 경연에 나갔을 때였다. 김일손은 '방번(芳蕃)과 방석이 후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이 자신의 넷째인 광평대군(廣平大君)과 다섯째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봉사손으로 삼고 사당까지 세웠다'는 전례를 거론하였다. 비록 태종에게 죄를 입었어도 인륜의 도리로서 제사는 잇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끊어진 세계(世系)를 이어주는 것이야말로 임금의 어진 정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뢰었다.

당초 노산(魯山)은 유약하여 책무를 이기지 못하였을 뿐 종사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고혼(孤魂)이 의탁할 곳 없이 떠도는지라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혼령이 어찌 근심이 없고 마음이 편하겠으며 상심하지 않겠습니까? 『탁영선생연보』성종 21년(1490) 3월

노산군의 후사를 정하여 제사를 지내자는 건의였다. 노산군의 입후치제(立後致祭)! 이제껏 아무도 하지 않았던, 세조의 손자인 금상의 치세, 그 시절의 공신이 여전히 실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더구나 '노산군은 종사의 죄인도 아니다'고 하였다. 성종은 놀라울 뿐이었다.

성종 22년(1491) 10월 충청도사로 나갔는데 때마침 '흰 무지개가 달을 관통하는 이변'이 있었다. 성종이 구언교를 내리자, 이번에는 현덕왕후의 원상회복 즉 소릉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김일손은 세종 즉위년(1418) 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종이 외척을 견제하려고 금상의 국구(國舅)인 심온(沈溫) 일가를 역적으로 몰살하였는데, 결코 세종의 중전인 소현왕후(昭顯王后) 심씨(沈氏)를 내쫓지 않았음을 거론하며 아뢰었다.

아무 죄 없이 이미 세상을 떠난 현덕왕후를 노산군의 생모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서민으로 강등한 조치는 아무리 보아도 잘못이다. 「청복소릉소(請復昭陵疏)」

김일손은 공자의 '삼 년 동안 아버지의 길을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의 참뜻을 풀이하며 '선왕의 조치를 바꿀 수 없다'는 소릉복위 반대 논리를 논박하였다.

아들 된 자로서 아버지가 잘못이 있어 고쳐야 할 바가 있다고 하여도 바로 고치지 않고 삼 년을 기다려 서서히 고치라는 것이지, 아버지의 길이 잘못이지만 종신토록 고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청복소릉소」

소릉폐치가 세조대의 일이고 지금은 예종을 지나 금상에 이르기까지 3대가 되고 또한 37년을 넘었으니 '이제는 고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남효온의 소릉복위 상소 이후 13년만이었다.

얼마 후 성종은 한때의 국모였던 노산군 부인 송씨에게 적몰재산을 돌려주었고, 송씨는 정미수(鄭眉壽)를 양자로 삼아 제사를 맡겼다. 정미수는 문종의 부마인 정종(鄭悰)이 역모에 걸려 죽은 후에 관비가 된 경혜공주(敬惠公主)가 낳은 유복자로 노산군의 조카였다. 문종의 외손으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혈육이었던 것이다.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거두었는데, 성종이 어린 시절 임금이 되기 전 궁궐 밖에 살 때에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는 사연이 있었다.

외로운 행보

김일손은 임금의 배려가 항상 부담스러웠다. 성종 23년(1492) 3월 인사문제를 다루는 이조전랑(吏曹銓郞)이 되었을 때는 '소년등과(少年登科)가 불행이다'라고 하면서 거듭 사직을 간청하였다. "지금 서른이 되지 않았는데 예문관·홍문관을 거치며 사관을 겸직하고 이조의 전랑까지 올랐으니 세상에서는 청선(淸選)이라고 하지만 전하의 은총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성종 23년(1492)은 김일손에게 유독 힘들고 슬픈 한 해였다. 김종직이 세상을 떠나더니 여름에 중형 김기손이 불귀의 객이 되었고, 가을에는 남효온까지 저승으로 갔다. 이원·신영희(辛永禧)·정성근(鄭誠謹) 등을 만나 탄식하였다. "우리 도의 외로움이 더해가니 조야의 불행이다."

임금이 배려하였을까? 고향에도 다녀오게 할 요량이었던지 임금의 유시를 각 고을에 전하는 경상도 방면 반유어사(頒諭御使)로 삼았다. 1493년(성종 24) 정월에 길을 떠났다. 용인의 객관에서 호남 방면으로 나가는 정광필(鄭光弼)과 하룻밤을 지냈다.

정광필이 훈구대신과의 마찰을 걱정하며 언사의 과격함을 충고하였다. 대뜸 일갈하였다. "사훈(士勛) 그대마저 비굴한 논리를 펴는가." 사훈은 정광필이다.

일대의 위인이 될 만한 자네가 나라에 도덕이 무너지면 침묵하며 용신(容身)에 만족하고, 나라에 도덕이 행해지면 재주와 명망으로 벼슬을 높이며 만족해한다면 될 말인가? 그대가 빠뜨릴 수 없음이 강직함일세.

정광필의 성품과 행실, 언론과 학문을 인정하였지만 현실 안주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던 차에 그간의 아쉬움을 토해냈던 것이다. 김일손은 정광필이 재상의 재목이기는 하지만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지는 못할 것 같은 느낌도 숨기지 않았다. "그대가 재상 자리에 올라 임금을 보필할 때 간사한 말에 속아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가 욕을 당하게 될 때에도 그대는 피눈물을 흘리며 죽음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돌려놓아 간흉을 내치게 하지는 못할 걸세."

사실 그랬다. 정광필은 연산군 말년 갑자사화에서 잠시 유배를 떠났으나 중종반정 이후 승승장구하여 중종 11년 (1516)에 영의정에 올랐다. 54세였다. 그리고 '신무문(神武門)의 변' 즉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처음에는 조광조 등을 구원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남곤과 심정 등에게 굴복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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