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3일 16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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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단약(丹藥)은 없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⑦
연산군은 끝내 남효온을 좌시하지 않았다. 생모의 죽음에 대한 앙갚음을 빌미로 일으킨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부관참시를 하고 뼈가루를 행주나루의 백사장에 뿌렸다. '소릉복위상소'가 왕실을 비판하는 풍조의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공신 천하에 대한 공세
이종범 조선대 교수
길을 찾으니 힘을 잃었어라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⑥
남효온은 세상과 단절하다시피 살았다. 깊은 고독도 이제 익숙하였다. 그런 중에도 어슴푸레 기쁨이 있었다. 성종 17년(1486) 세 살 아래 이달선과 열 살 아래 김일손이 당당하게 문과에 합격하였을 때였다. 자신은 과거를 포기하고 살지만 후배들이 제 몫을 하고 있어서 무
국토를 읽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⑤
고독의 빛깔 남효온의 친구들은 점차 곤란한 처지에 빠지고 떠나갔다. 성종 16년(1485) 여름 「나를 읊는다」제7수에서 덕우는 장형을 당하여 살점이 없고 德優杖下無完肉 효백은 양식이 떨어져 목숨이 위태롭네 孝伯粮化身命危 하였다. 덕우(德優)는 자주 어
공부의 길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④
옛적에는 왕위의 승계가 세습이 아니라 선위나 추대였음을 말한 것인데, 고대의 사실을 말한 것이라 들으면 이 또한 그만이지만, 어찌 들으면 얼마든지 안타까운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아련하다. 이렇듯 남효온의 「명론」은 '천일합일론'에 '혁명
나의 스승 나의 친구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③
남효온이 언제 처음 김시습을 만났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소릉복위상소'를 올리기 전이었다면, 국가적 금기를 드러낸 최초의 언론에 어떠한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이 남효온이 19세 연하임에도 '추강'으로 존칭하고 있음을 보
술과 노래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②
한강은 공부하기에 좋은 문화 공간이기도 하였다.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는 독서당을 호당(湖堂)이라고 하는 것도 한강이 훤히 보이는 풍광 좋은 곳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독서당의 엘리트 관료를 유인하며 조정과 도성의
전선의 형성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①
남효온(南孝溫)의 삶은 아낌없는 버림과 거침없는 언설의 연속이었다. 술과 노래는 분노이며 일탈이었으며 고독과 실의에서 시작한 방랑은 차라리 순례였다. 그러나 내일을 향한 교류와 소통에는 무척 열성이었다. 그때 남긴 글은 소망과 해원의 발산, 역사와 국토의 발견이
이제 떠나리라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시습: 머리를 깎았다고 못 가르칠 것은 없다 ⑥
역사가 계보그리기, 경계치기가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쯤 김시습이 사림의 역사에서 어떠한 위상에 있는가 한 번쯤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아니다. 김시습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백성을 살리지 못하고, 누구를 선양하며 자기를 도모하는가, 그러니 나를 팔지 말
호소와 선동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시습: 머리를 깎았다고 못 가르칠 것은 없다 ⑤
역사에서 충의사적을 드러내는 것은 옛날의 충신 의사를 위로하는 것을 넘어 오늘의 건강하고 의로운 분발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읽힌다. '역사에 절의의 선비, 용기의 선비로 이름을 남기려거든 분발하라.' 그리고 덧붙였다. "군자의 의리와 신하의
좋은 임금을 만나고 싶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시습: 머리를 깎았다고 못 가르칠 것은 없다 ④
임금이 백성의 삶을 먼저 생각하고 나라의 앞날을 미리 걱정하면 한시라도 편할 수 없었다. 안일은 백성의 몫이었다. 옛날의 성군이 그랬다. 그럼에도 홀로 다스릴 수 없었기에 현량한 신하를 찾았다. 요임금은 후직(后稷)을 얻었고, 순임금은 고요(臯陶)를 찾았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