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10일 12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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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4>
쌀
홍석이를 생각하면 대번 떠오르는 것이 쌀이다. 본디 쌀은 귀한 것인데다 삼년을 내리 흉년이 들었으니 왜 안 그러랴! 그 귀한 쌀을 과자삼아 씹어 먹으며 놀던 생각이 난다.내 짝꿍 홍석이는 하이도 섬 출신의 자취생이다. 정직하고 의젓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홍석이가 하루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3>
채석장
학교갔다 오는 대성동 고갯길 곁 깊은 골짜기 너머엔 큰 채석장이 있다. 간혹 그곳에서 시퍼런 옷을 입은 죄수들이 돌을 깨곤 하는데 돌깨는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이 유난히 기이하게 느껴지고 죄수들의 발목에 메인 검은 연쇄(連鎖)들이 참혹하게 느껴지곤 했다.그리고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2>
연극
학교에 재입학해서 배정된 반에 갔을 때, 그 반은 학예회를 위한 연극연습이 한창이었다.국군과 인민군이 싸우는 연극인데 주제가는 이런 것이었다.‘형님은 인민군으로동생은 국방군으로……………승리는 아우게 있다.’연극을 보면서도 그랬고 연극이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1>
대구
드디어 아버지에게서 소식이 왔다.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대구에서였다.대구로 곧장 오라는 것이었다.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도리어 날이 갈수록 더 치열해졌으나 아버지가 소속된 육군 군예대극단은 대구에서 장기간 머물러 정규적 연예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0>
광인
그 사람.그 사람이 산정식당 고개를 넘어 천천히 학교 정문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실한오리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그 사람, 미친 사람이었다.내 앞에 가던 여고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흩어져 내빼 달아나고 난 뒤 뻣뻣하게 굳어져 서있는 내 앞을 지나 천천히 그 키 큰 벌거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9>
흉년
전쟁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형편없는 구닥다리 유물론자, 그것도 관념적 유물론자에 지나지 않는다.전쟁은 인간과 신 사이는 물론이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진행된다. 전쟁 때는 반드시 흉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8>
나산
그 무렵 공비토벌대로 나가있던 문태숙부가 자기 있는 나산(羅山) 지서로 나를 놀러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나는 좋아서 가겠다고 했다.어린애는 어린애였다.그때의 아버지.서투른 말솜씨로 몇마디 하셨는데 그곳은 전투가 심해서 사람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없는 곳이라는 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7>
음독
그 웃음과 눈깔사탕!그것은 음독자살의 시작이었다.아버지는 이튿날 방첩대에서 돌아올 때 사가지고 온 양잿물을 눈깔사탕과 함께 나 몰래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다. 심부름을 시키는 아버지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담 너머로 흘깃 넘겨 봤을때 아버지가 무엇을 입에 물고 얼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6>
병정놀이
숨어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잡혀간 뒤 텅텅 비어 아무도 없는 우리집.우리는 그 집을 본부로 하여 병정놀이에 열중하였다.만열이가 여전히 대장이었지만 잘 나타나지 않았고 덩치가 큰 나이백이 형들 두 사람이 대장 행세를 했고 온갖 명령이나 갖은 작전이나 기합을 늘 주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5>
해병
그날 밤나는 그 무서운 해병대를 보았다. 외갓집 큰 방에 이모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짝이 쾅하고 넘어져 들어오며 휙하고 뛰어든 시커먼 사람이 있었다.‘손들엇!-’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우리는 모두 손을 쳐들고 벌벌 떨었다. 여자와 아이들뿐인걸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