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웃음과 눈깔사탕!
그것은 음독자살의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이튿날 방첩대에서 돌아올 때 사가지고 온 양잿물을 눈깔사탕과 함께 나 몰래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다. 심부름을 시키는 아버지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담 너머로 흘깃 넘겨 봤을때 아버지가 무엇을 입에 물고 얼굴을 잔뜩 찌프린 채 또 무엇인가를 마루 기둥과 서까래 사이에 끼워넣는 것을 보고 큰집으로 달려가 알린 것이다.
아버지가 이상하다고.
의사가 오고 어머니가 오고 위세척을 다 끝낸 뒤에도 사흘 낮 사흘 밤을 아버지는 헛소리와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다.
그 헛소리들!
헛소리?
과연 그것이 헛소리였을까?
“영일이가 죽었다고… 순철이 지가 봤다고… 영일이를 때려 죽여서… 죽였다고… 죽여서 가마니에 넣어갖고 똥섬 앞바다에 쳐넣는 것을 지가 봤다고… 죽어갖고 가마니에다… 똑똑히 봤다고… 영일이가 죽었다고… 으흥흥… 똑똑히 알아보고 나도 죽어불라고 그랬제… 알아보고 나도 바다에 빠져 죽어불라고… 으흥흥… 영일아! 영일아아아-”
사흘낮 사흘밤을 혼수상태에서 헤매던 아버지는 드디어 깨어나셨다. 그리고는 나를 보자 또 씨익- 웃으셨다. 그뿐이다.
그러나 그날 밤 아버지는 양잿물을 또 잡수셨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발견되어 또 토해내고 깨어나셨다.
주위에서 독하다고들 모두 수군거렸다.
독하다?
아버지는 어눌한 분이다.
그래서 표현은 못하지만 방첩대에서의 취조는 아버지의 사상과 투사로서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음이 틀림없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가 살아있는 것만이 위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살로서 자존심의 상실을 넘어서려 한 것일게다.
두 번째 자살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살기로 작심하신 것 같았다.
밥을 드셨고 몸도 움직이셨다.
특히 늘 따뜻한 웃음을 웃어 그 웃음으로 걱정하고 있는 내게 말씀을 대신하였다.
물론 훗날에야 안 사실이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 때문만으로 산을 내려올 아버지는 아니라는 것. 이른바 ‘청산투쟁’에 대한 반발로 비판을 받았던 것.
‘청산투쟁’이란 이런 것이다. 산은 비좁고 빨치산은, 특히 산악게릴라는 정예이고 소수이어야만 한다. 보급조차 문제가 아닌가!
그런데 목포일원에서 월출산에 따라 들어온 사람의 숫자는 엄청난 것이었다 한다. 그들을 당성(黨性)을 기준으로 고르고 가려서 나머지는 산으로부터 내려보내는 투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쌔하얗게 모여든 사람들을 거의 다 내려보내는 그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산을 내려가 들에 나가면 바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해병대와 전투경찰대의 기관총뿐이었다. 영암 월출산 아래 벌판에는 그렇게 해서 사살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쌔하얗게 쌓였었다 한다.
아버지는 바로 이 ‘청산투쟁’의 비인간성에 대해 반대했었다 한다. 당성대신 인민성(人民性)을 주장하며 산악게릴라와 함께 평야와 마을에서의 어떤 독특한 게릴라 계획을 배합 진행시켜 그 많은 인민에게 삶의 로선과 투쟁과 용기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었고 지도부는 지금 그럴 형편이 못되는 만큼, 일단 청산했다가 다음 기회에 생존자를 다시 접선, 조직한다고 달랬다한다.
거기에 대해 아버지는 “전쟁 전에는 간부들이 모두 월북하고 선(線)을 끊어버려 수많은 투사들이 보도연맹 속으로 절망적 투항을 하게 만들어 죽이고, 지금은 청산투쟁으로 남한 인민을 쓰레기 취급한다면 도대체 앞으로 그 누구가 우리를 옳다 따르겠는가”하는 원론적인 반발을 계속했다고 한다.
지도부는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특히 당성심사위원이었던 로선생은 중간에서 고민이 많았다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평소에 그처럼 인자하고 섬세하던 로선생같은 당 사람들이 시퍼런 일본도를 빼들고 눈에 핏발을 세워 위협하는 등 공산주의와는 하등 인연도 없는 빨치산의 저 기괴한 마성(魔性)에 대해 조용하나 고집스런 비판과 반대 의사를 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럴 때에 나의 죽음의 소식을 접한 것이다.
내가 그런 까닭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은 4.19가 나던 해 봄이었다. 그 이후 내게는 아버지의 그 하산 사유가 늘 가슴에 맺힌, 풀길 없는 의혹이 되어 그리 격렬하게 행동을 선택하면서도 좌익에 대해서는 동반자(同伴者)적 관계를 크게 넘어서지 않는 태도를 지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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