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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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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8>

나산

그 무렵 공비토벌대로 나가있던 문태숙부가 자기 있는 나산(羅山) 지서로 나를 놀러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좋아서 가겠다고 했다.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그때의 아버지.
서투른 말솜씨로 몇마디 하셨는데 그곳은 전투가 심해서 사람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없는 곳이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구경보다도 숙부가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때 아버지 눈에 눈물이 어렸던 것 같다.
그날 밤 나는 한숨도 못 잤다.
술을 드신 아버지가 노래를 작곡작사해서 밤새도록 나를 따라부르게 했기 때문이다.

“영일아
영일아
나산 갈라냐
총알이 비오는데
나산 갈라냐
아부지 엄마두고
나산 갈라냐“

나는 웃고 또 웃었다. 밤새도록 웃었다. 왜냐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그 서투른 노래와 몸짓은 내게 대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서툴긴 해도 아버지는 그 역시 아마튜어 작곡 작사자다. 일제치하에서 한때 돈 잘 벌고 놀기 좋아하던 때 백두산을 등반하고 돌아오던 길에 함흥인지 단천인지에서 풍광으로 길이 막혀 여관신세를 질 때라고 한다.

그때 단천의 한 여관에서 기막힌 연애사건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그 무렵 신세자탄의 노래를 지어불러 내게까지 전해졌으니 객지의 쉰내 나는 향수가 절은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푸른 바다 보이니
내고향 그립노라
유달산 산허리에
얽혀매인 배들아
똑딱선도 좋으니
쉬지말고 어서와
향수에 실은 이몸을
실어가다오”

***입대**

며칠 안있어 아버지는 육군 군예대(軍藝隊)에 조명과 영사 기술자로 입대하여 군트럭을 타고 전선으로 떠나야만 되었다. 이미 방첩대에서 강제로 입대했었던 것이다. 기술이 또다시 아버지를 살린 것이다.

그날
누우런 티끌 바람은 눈 못뜨게 불어대고, 무대 쎄트와 소도구를 잔뜩 실은 육군 군예대의 트럭이 연동 신작로에 잠깐 멈췄다.
재호삼춘과 함께 아버지가 올라타고 바로 트럭은 떠났다.

쎄트위에서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흔들리며 얼굴이 검누렇게 변한 채 극도의 절망적인 표정으로 아버지는 손을 흔드셨다. 광주쪽으로 향하는 신작로 길로 트럭이 아득히 멀어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입대.
아버지는 군속이 되신 것이다. 그 뒤로 전선에서 위문공연도 하고 전투가 심할 때는 포탄도 져나르며 온갖 잡역을 다 하셨던 것이다.

그 무렵 전선에 투입된다는 것은 곧바로 죽음을 뜻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향자는 곧 총알받이로 내보내어졌던 것이다.
영채형이 그랬고 영진형도 그랬다.

그 후 한동안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간혹 재호삼춘 집으로 잘 있다는 소식이 있었던 것 밖에는.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전쟁은 막바지를 향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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