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아버지에게서 소식이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대구에서였다.
대구로 곧장 오라는 것이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도리어 날이 갈수록 더 치열해졌으나 아버지가 소속된 육군 군예대극단은 대구에서 장기간 머물러 정규적 연예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까지 마련해 놨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곧장 목포를 떠나 대구로 향했다. 꿈꾸듯 꿈꾸듯 대구로 갔다. 길고 긴 낙동강의 왜관(倭館) 다리를 건널 때의 덜커덩거리던 그 기차소리를 잊을 수 없다.
한겨울의 대구.
몹시도 추운 대구였지만 내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매일이 꿈결같았다.
대구에서도 유명한 미나까이(三中井), 그러니까 백화점 뒤편 동네, 향촌동 저 유명한 음악다방인 ‘돌체’가 있는 지금은 장관동이 되나 하는 그 골목 안 일제 목조가옥 이층방이었다.
한집에 육군 군예대극단의 단장인 극작가 김석민씨네와 무대미술과 정우택씨네가 함께 살았다.
대구의 추위는 남쪽 태생인 내게는 살인적이었다. 매일같이 눈보라에 꽁꽁 얼음 속을 극장으로 역전으로 싸돌아 다니는게 일이었다.
어머니에게 타낸 몇십원의 돈으로 대구역전 광장의 좌판장수 아주머니에게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구운 오징어 토막 몇 개를 사들고 그것을 입안에 넣고 침을 발라 녹이며 거리를 헤메고 다녔다.
무슨 구경꺼리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집안에 있어도 할일도 없고 불도 없이 추워서 차라리 나돌아다니는 거였다. 극장에 가서 상연하는 악극 ‘물새야 왜 우느냐’를 본 기억도 나고 뭐하는데인줄도 모르고 ‘자갈마당’을 돌아다니거나 그 앞 거대한 카바레 앞에서 멋쟁이 여자들과 코쟁이들이 팔짱끼고 드나드는 것을 머얼거니 바라보던 생각도 난다.
그리고 생각난다.
추운 밤에 메밀묵 장사가 기인 소리로
‘메미일묵 사려어-’
외치는 소리도, 그리고 시뻘건 영덕대게를 팔러다니는 사람들.
팔공산 가까운 벌판에 놀러갔던 일, 그리고 김석민씨네 아들 꼬마가 앙칼지게 나를 구박하던 일, 무대미술가 정우택씨가 술취해 눈이 시뻘게 가지고 야단법석하던 일 등이 생각난다.
아버지의 당초 계획대로의 나의 전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목포로 돌아오고 말았다. 낙동강의 왜관다리를 건널 때의 퉁퉁거리던 기차소리가 내내 기억에 남고 아버지와 헤어질 때 울었던 것, 목포역에 내려 연동으로 돌아왔을 때에 기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쓸쓸하고 서먹해서 도무지 이상하던 일들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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