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그 무서운 해병대를 보았다. 외갓집 큰 방에 이모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짝이 쾅하고 넘어져 들어오며 휙하고 뛰어든 시커먼 사람이 있었다.
‘손들엇!-’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손을 쳐들고 벌벌 떨었다. 여자와 아이들뿐인걸 알고 총부리를 내리며 그 사람은
‘손 내리시오.’
라고 정중하게 말했는데 그가 바로 해병대였다.
키가 작고 얼굴이 새카맸다. 종완이라는 수병이었다. 상륙한 해병여단은 외가 바로 곁에 붙어있는 산정국민학교에 진주했다. 외가와 해병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날 피난갔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삼촌이 돌아왔고, 외가는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는데 해병들이 학교 담을 넘어 들어와 김치며 반찬이며 장 등을 끼니때마다 얻어갔다.
외할머니는 ‘더 가져가라, 더 가져가라’ 하며 듬뿍듬뿍 퍼주셨고 해병들은 ‘어머니, 어머니’하며 외할머니를 자식들처럼 따랐다.
외할머니는 대여섯이나 아들을 삼아 친아들과 같이 대접했고 이들은 목포를 떠난 뒤, 그리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까지도 외가나 어머니와 연락을 했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나와 똑같은 ‘영일’이란 이름을 가진 얼굴 예쁜 수병이 있었는데 그를 졸졸 따르며 ‘영일아! 영일아!’하고 불러대던 한 못생긴 수병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부상당한 덕에 외할머니의 특별대접을 받았는데 닭을 한 마리 삶아주자 저는 그저 먹는 시늉만 하고 영일이란 수병에게 다 가져다주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호모일까?
그러나 내 기억에는 참으로 깨끗하고 순진한 청년들의 전장에서의 우정이었다.
그 주둔 해병대의 일부가 영암 월출산의 빨치산을 토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큰 아버지를 향해 총을 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멀리서 매일 쿵쿵거리는 포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버지 걱정을 한 적은 별로 없었고 ‘만열네’와 놀기 바빴으니 어린애는 그저 어린애에 불과했다.
뭐랄까?
어린애의 인식이나 사유는 아나로그가 아닌 디지털적이라고 할까? 형광등 스타트 전구 같다고나 할까? 어떤 때는 이 생각이 툭 불거졌다가 또 어떤 때는 저 생각이 쾅 터진다 할까?
하긴, ‘기리니깐 기리티, 기리티 않으면 기릴 리가 있갔어?’란 서북농담처럼 어린시절을 낙원이라 부르는 까닭도 그처럼 집요하게 한 생각만에 묶이지 않는 유목민 같은 그 어린 성정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병대와의 인연은 나의 그 집요한 버릇의 하나인 ‘군인그림’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종이고 마루고 벽이고 마당이고 간에 나는 끊임없이 철모쓰고 총들고 제복입은 군인 그림을 내내 그렸으니 말이다.
***체포**
언덕위의 우리집에서 나는 여러 사람의 체포를 목격했다.
영채형이 부엌 아궁이에서 체포되어 끌려갔고 재호삼춘과 근태숙부가 철삿줄에 묶여서 끌려갔고 또 인민군에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낙동강 전선에서 부상당한 뒤 우리집에 세들어 살던 억수씨네 방에 와 잠시 얹혀있던 이름 모를 청년이 한사람 그 무렵 어느날 마루 밑에 들어가 숨어있다가 오후에 체포되어 끌려갔다.
체포되어 철삿줄이나 노끈이나 수갑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게 있어 다 한가지의 똑같은 모습으로 각인지워져 있다.
뭐랄까?
아직 태를 끊기 이전의 어머니 몸에 탯줄로 연결되어 웅얼거리며 끌려다니는 간난애기랄까?
훗날, 체포되고 체포되어 맨날 끌려다니다 보니 묶여 끌려갈 땐 누구나 어린애처럼 되는 이유를 알것만 같았다. 스산한 상심과 허무를 뒤에 남기고 사라지는 늙은 간난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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