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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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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6>

병정놀이

숨어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잡혀간 뒤 텅텅 비어 아무도 없는 우리집.

우리는 그 집을 본부로 하여 병정놀이에 열중하였다.
만열이가 여전히 대장이었지만 잘 나타나지 않았고 덩치가 큰 나이백이 형들 두 사람이 대장 행세를 했고 온갖 명령이나 갖은 작전이나 기합을 늘 주곤 했다. 계급장이 있었고 명령이나 규율을 어길 때는 우리집 채마밭 귀퉁이에 있던 여자덩굴막 안에 들어가 몇시간이고 갇혀있다 나오곤 했다.

그 무렵 ‘무시고무’라는 철사 빼낸 얇은 고무가 유행했는데 그 줄로 새총을 만들고 철사를 ‘U'자 형으로 꾸불려 그 총에 끼워쏘곤 했다. 얼굴이나 특히 눈에라도 맞으면 치명적이었던 좀 위험한 병정놀이가 있었다. 이웃동네와 전쟁도 하고 멀리까지 정복여행을 떠나는 일도 있었다.

아아!
지금와 생각하니 유치하고 졸렬해서 하품이 나기는커녕, 어린 삶에 있어서 딴에는 격렬했던 바로 그 의사전쟁(擬似戰爭)이 아버지, 잃어버린 아버지, 무기력하게 실종된 아버지와 힘없는 어머니에 대한 대리전쟁 같은 것은 아니었던가 싶다.

‘새총부대’란 말이 있었을 정도로 그 유행은 극심했는데 후에 이 때문에 그 무렵의 담임선생에게 끌려가 슬리퍼로 얼굴을 여러차례 세차게 얻어맞기도 했다.

이상한 것은 국민학교 선생님을 생각할때면 반드시 다른 인자했던 선생님들은 뒷전으로 가고 꼭 바로 그날 때린 선생님이 떠오르곤 했던 일이다.

혼에 자취를 남길만큼 마음에 아프게 느껴지던 매질이었던가 보다. 왜냐하면 그때 난 이미 공부와는 멀어져 있었으니까.

***하산**

어느날 큰집에서 작은 고모가 나를 데릴러왔다. 가까운 길을 버리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 큰집으로 조심조심 데리고 갔다.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데도 아무소리 않고 따라갔다.

큰집 어둑한 뒷방에 흰 한복을 입은 아버지가 웃으며 앉아계셨다. 두려운 중에도, 그 어둠침침한 골방에서 드디어 나는 해방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사랑의 결실이 해방이라는 그 흔한 사상을 이제야 이해하겠다.

아버지는 나 때문에, 조그마한 아들하나 때문에 이념을 버렸고, 동지적 신의를 저버린 것이다. 아버지에게 그것이 무엇이었을까를 깨닫기 전에 그것이 분명 내겐 해방이었음을 그때 나는 알았다. 왜냐하면 병정놀이니 새총부대니 하던 거친 유희중독에서부터 다소곳한 슬기로움으로, 의젓한 미소로 돌아와 있었으니까.

목포에서부터 륔섹에 가득 넣고 간 당 자금인 지폐가 있어서 한복을 사 입고 또 장작 쌓은 지게도 사서지고 먼 무안길로 돌아서 오는 길엔 지방 유격대에게 수상한자로 체포되어 처형 일보전에 또 그놈의 전기기술 때문에 신분이 드러나 목숨이 살아난 적도 있고.

산에서 들로 내려왔을 때 추석 직후의 들판에 코스코스가 가득 피어 눈부시더라는 것. 코스모스 밭에 주저앉아 한없이 울었다는 것. 이런 얘기들도 훗날 듣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길로, 큰 이모의 아들로 목포 중학교 학도호국단장을 지내고 성균관대학교 정치학과에 수학중이었으며 국군수복후엔 군방첩대에서 일하고 있던 태환형의 중개로 방첩대에 출두하여 며칠동안에 진술서와 전향각서 등 형식을 마친 뒤에 아주 폭삭 늙어버린 얼굴을 하고 어느날 밤늦게 큰 눈깔사탕 두 봉지를 사들고 집에 돌아오셨다. 오셔서 나를 보며 싱긋이 웃으셨다.

그 웃음과 눈깔사탕!
그것은 무엇을 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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