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재입학해서 배정된 반에 갔을 때, 그 반은 학예회를 위한 연극연습이 한창이었다.
국군과 인민군이 싸우는 연극인데 주제가는 이런 것이었다.
‘형님은 인민군으로
동생은 국방군으로
……………
승리는 아우게 있다.’
연극을 보면서도 그랬고 연극이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반공의식을 강조할 때에도 역시 나와는 상관없는 먼 피안의 일들 같았다. 이미 나는 대구에서 어른들의 연극을 여러번 본 것이다. 어른들의, 뭐랄까, 슬프고 서먹서먹하고 몰인정한 삶의 세계가 내 정서에 무거운 돌들을 가라앉힌 것이다. 몇 개월의 대구여행이 몇 년은 된 것 같았고 고향의 낯익은 풍경들이 도리어 낯설기조차 했다.
***장미집**
해병대 병조장이 선물한 세파드 개에게 물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외가는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인근에서 ‘꽃피는 장미의 집’으로 알려졌던 외가는 스산한 기운이 둘러싸기 시작했고 어느날 커다란 검은 구렁이가 마당에 나와 딩구는 걸 동네 사람들이 때려죽였다.
집지킴이였던 셈인데 구렁이가 죽은 뒤 지붕이 내려앉기도 하고 기둥이 기울기도 했다.
불교식 상방(喪房)에 매일 향을 피우고 독경을 하지만 이상하게 썰렁한 집으로 변해 나는 밥만 먹으면 큰집에 나서 있거나 언덕 위 우리집에 죽치고 앉아 중학교 일학년 역사책을 줄줄 외울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어린 마음에서였지만 공부를 해야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다는 막연하지만 거의 확신에 가까운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차차 성적이 오르고 중입시험에 합격하여 들어가기 힘든 목포중학교에 무난히 입학하게 되었다.
집안이 불행하거나 스산한 아이들일수록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그저 흔한 보상심리일까, 아니면 더 깊은 어떤 다른 심리적 원인이 있는 것일까?
***유달산**
중학교 일학년에 입학해서였다.
만열네의 형들과 함께 유달산 일등바위에 오른 적이 있다.
아슬아슬한 절벽을 간신히 올라가 널찍한 일등바위 위에 올라섰을 때, 아! 그 넓은 절망에 가슴이 탁 틔웠던 기억이 난다. 부두와 해안선너머 큰 바다와 영산강 하구가 보이고 먼 월출산과 용당리 너머 화원반도 까지 희미하지만 다 보였다.
어떤 씩씩하고 낭만적인 모험심 같은 것이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고 아득히 먼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출렁거렸다.
내려오는 길에 유달사 변소에 들어가 대변을 눌 때다. 나무 판장에 연필로 여기저기 낙서들이 쓰여 있었는데 시형식이었다. 연애편지같은 것이었는데 아마도 중학교 선배들의 짓 같았다.
‘아득한 산모퉁이 너머로
네 흰 얼굴이 어리고
너를 찾아 떠나는 먼 길에
코스모스 피어 할랑거린다’
뭐 이런것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시라는 것이 다가온 첫 경험이었다.
뽀오얀 안개같기도 하고 아슴프레한 연기 같기도 한 낭만이 내 가슴에 적셔드는 순간이었다. 연애감정과 아득한 여수(旅愁)와 자연에 대한 순결한 미적 감정이 하나로 얽혀진 그런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날의 경험, 그날의 뽀오얀 낭만이 내 문학의 첫 발걸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날 유달산을 내려와 시내에 있는 과학상점에 갔을 때 갖가지 깃발을 꽂은 모형 기선들을 보면서 또 아득히 머언 항구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며 내내 기이한 감정을 품은 채 집에 돌아와 뭐라고 돼도 않은 시 비슷한 것을 밤새 끄적거렸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김래성의 ‘청춘극장’을 읽은 것이 그 무렵이었다. 큰 이모의 책을 아무거나 이것저것 가져다 읽었으니 아마 그것이 또한 내게는 첫 문학수업이었을 것이다.
‘철가면’을 읽고 밤에 검은 유리창에서 뭔가가 슬그머니 나타날 것만 같은 공포심을 느낀 것도 그 무렵이었으니 과연 문학과 가까워지긴 가까워진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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