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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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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3>

채석장

학교갔다 오는 대성동 고갯길 곁 깊은 골짜기 너머엔 큰 채석장이 있다. 간혹 그곳에서 시퍼런 옷을 입은 죄수들이 돌을 깨곤 하는데 돌깨는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이 유난히 기이하게 느껴지고 죄수들의 발목에 메인 검은 연쇄(連鎖)들이 참혹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리고 그들이 없을 땐 채석장 전체를 지배하는 큰 적막, 흰 바위들을 때리는 눈부신 햇살들이 아득한, 그러나 한없이 쓰라린 고독한 지옥… 그래 그 느낌은 지옥이라고 밖엔 표현할 도리가 없다. 고요하고 흰 고독지옥.

반대편 언덕 위 높은 솔개산 마루엔 주교당이 서있는데 그렇다면 그 검붉은 벽돌의 첨탑이 흰 채석장의 지옥에 대비되는 천당이었을까?

내 유년의 기억으론 그 철탑 역시 또 하나의 지옥, 숨막히는 압도의 지옥이었다. 하늘도 땅도 모두 지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늘과 땅의 분열을 통일할 인간만이 구원이었다.

***양비와 옥청**

그 애 이름이 양비였다.
외가에서 신작로 나가는 골목에 버티어 선 커다란 정미소 친척집에 얹혀살던 시골출신의 중학 2년생. 그리고 또 한 아이는 그 정미소 한 방에 세들어 살던 옥청이라는 외자 이름의 동급생 아이. 이 두 아이가 그 무렵 내가 새로 사귄 아이들이었다.

양비는 생김새가 둥글둥글한데 무뚝뚝하나 조그만 일에도 얼굴이 새빨개지며 수줍어하는 전형적인 시골아이였고 옥청이는 큰 눈에 항상 물기가 어린, 여위고 조그마한 외톨박이였다. 양비는 목포 인근의 무안군이 집이었고 옥청이는 아버지를 일찍 여윈 뒤 어머니와 함께 사내 동생 하나 데리고 사는 목포 시내 출신이었다.

옥청이 어머니는 요즘같으면 시민운동가로서 가끔 트럭을 타고 다니며 마이크로 무슨 선전내용을 방송하곤 하는 것이었는데 기이한 것은 옥청이가 그것을 못내 부끄러워하던 것이다.

그 옥청이가 사는 정미소 앞방에 놀러 들어갔다가 일본잡지책을 한권 본적이 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그 잡지에 실린 삽화 한 컷이다. 일본식 가옥의 다다미방안에 앉아있는 일본여자의 연필 데쌍인데 그 그림의 쓸쓸함, 스산함이 내내 잊히지 않고 남아 그림을 그릴 때마다 되살아나곤 했다.

데쌍은 물론 채색화의 밑그림이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수묵처럼 그 자체로서도 그림으로서의 독립성을 갖는다. 데쌍의 그 기이한 울적함에서 독자적인 미학적 특질, ‘흑(黑)과 백(白)’의 미감을 파헤친 것은 앙드레 말르로였던가?

양비와 옥청이, 그리고 그애 동생과 나, 이렇게 넷이서 양비네 시골집에 놀러가 하룻밤을 자고 온 일이 생각난다.

대숲에 둘러쌓인 커다란 초가위에 짙푸른 밤하늘이 있고 큰 마루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앉아 시절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아! 그 주먹만한 별떨기들! 마치 손을 내밀면 닿을 듯 가까이 보이던그 별떨기들! 그리고 흙내나는 뒷방에서의 하룻밤. 또 그 이튿날 내가 좋아하는 나무인 대를 몇 개 얻어서 질질끌고 넷이 함께 기찻길 철뚝을 따라 목포로 돌아오던 길, 그 길가의 큰 두눈의 물기!

옥천이는 그날 이후 집에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찾는다고 제 동생을 데리고 티끌바람이 몹시 불던 날 시내 친척집에 간다며 떠나간 뒤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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