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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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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0>

광인

그 사람.
그 사람이 산정식당 고개를 넘어 천천히 학교 정문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실한오리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그 사람, 미친 사람이었다.

내 앞에 가던 여고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흩어져 내빼 달아나고 난 뒤 뻣뻣하게 굳어져 서있는 내 앞을 지나 천천히 그 키 큰 벌거숭이 미친 사람이 시커먼 불알을 흔들거리며 뿌우옇게 초점 흩어진 눈, 산발한 머리채로 목포시내 쪽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싸늘한 한줄기 퀴퀴한 바람결이 내 몸을 스쳐 지나는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어디서 맞았는지 어디서 당했는지 모를 흉한 생채기가 이곳저곳에 나있고 핏물진물이 더덕더덕 묻어있었다.

공산당 했다고 몰매를 맞아 미쳐버렸다한다. 묶인 채 보는 앞에서 그 아내가 강간을 당해 미쳐버렸다한다. 빨갱이라 해서 집은 불을 질러 한참을 타는데 그 집안에서 시커먼 숯이되어 벌벌 기어나온 뒤 울다울다 마침내는 미쳐버렸다 한다.

‘무얼하러 시내쪽으로 가나?’
내 의문은 그것이었다.
‘가지말지, 가면 또 매맞을텐데…’
내 걱정은 그것이었다.

어렸을 적 치렁치렁한 무슨 물체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는 듯 세계와의 불화와 분리가 깊어지던 그 불행과 소외의 감각이 그대로 내 앞을 가까이서 가까이서 가까스로 가까스로 지나가고 있었다.

미친다는 것.
미친 사람.
그것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그때 그 무렵의 어린 내가 어찌 알았으리?

***전쟁**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유엔군이 진주했고 중공군이 개입했다. 6.25는 한마디로 제3차 세계대전이었다. 다만 그 형식이 국지전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미국과 러시아의 사상적 적대 즉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을 골자로 하는 전세계적 갈등의 뜨거운 표현이었다.

전선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북상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또다시 남하했다. 그리고는 내내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 무렵 아이들의 동요가 있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우스워 죽겠네’

우스워 죽겠네!
과연 우스운 일일까?

민간인까지 합쳐 4백만이 죽었고 부상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우스운 일일까? 아니라면 이 전쟁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알 수 없었다.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남북 양쪽의 이데오르그들이나 광신자들 이외에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훗날 해월 최시영 선생의 문답을 통한 한 가르침 가운데서 그 의미를 희미하나마 깨달을 따름이었다.

‘후천개벽, 후천개벽 하는데 후천개벽은 도대체 언제 오는 겁니까?’
남계천의 질문에 대해
해월선생이 답한다.
‘만국의 병마가 다 이 땅에 들어왔다 만국의 병마가 모두 다 이 땅을 떠날 때’
그리고 또 답한다.
‘장바닥에 비단이 깔릴 때’

장바닥에 비단이 깔릴 때!
아마도 그것은 상고에 있었다는 신령한 호혜시장(互惠市場)인 신시(神市)가 현실에 실현되는 때일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인간과 신 사이의 근본적 화해에 의해 선물처럼 경제사회적 상호혜택을 주고 받는 그 아름다운 이상사회는 그럼 언제 이루어지는가?

그때가 바로 이때다.
만국의 병마가 다 이 땅에 들어왔다가 만국의 병마가 모두 다 이 땅을 떠날 때.

그렇다면 다 떠나고 남은 것은 미군뿐이다. 미군이 최종적으로 이 반도를 떠날 때가 곧 신시(神市)가 이루어지는 때인가? 정말로 그러한가?

6.25 전쟁의 의미는 여기에 있는 것인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다. 나 역시 그 무렵 그 동요를 가끔 노래불렀고 아무 뜻도 모른 채 킥킥거리며 불렀었다. ‘만열네’가 모이면 그 노래를 부르며 내내 킥킥대었으니 어른들의 전쟁장난이 우스꽝스러워서였을 것이다.

나는 그 무렵 외가에 얹혀살았다.
아버지가 안계신 우리 가족은 생계가 막연했기 때문이다.
텅빈 우리집은 ‘만열네’의 군사본부였고, 우리의 병정놀음은 계속되었으며 대나무와 송판 등으로 무기를 만들고 전쟁흉내를 내는 것은 여전했으나 나의 군인중독은 슬그머니 사라졌고 군인그림은 뜸했다.

내 마음안에 그 누우런 티끌바람 이는 날 아버지의 그 떠날 때 모습이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가족을 서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헤어진 채 서로 그리워하고 있었다.

전쟁.
그렇다.
다름아닌 그 이별이 곧 나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촛불처럼 영혼이 애태우고 애태우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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