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의 여러 측면을 살펴보았고, 이것이 왜 반드시 본원적으로 제거되어야 하는지를 정치적, 경제적, 법적 측면에서 따져보았다.
'지구정치경제'의 관점에서
그런데 필자는 이 기획연재의 초두에서 이 문제를 '지구정치경제학(Global Political Economy)'의 관점에서 접근하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하는 핵심적인 방법은 정치, 경제, 법으로, 그리고 다시 국내, 국제로 나누어 생각하는 데서 생겨나는 여러 칸막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갇히지 말고 '전체로서의 사회적 현실'을 '흐림 없는 눈으로 보고 직접 판단'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지구정치경제의 차원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상황을 둘러보고, 다시 한 번 현재의 상태를 음미해보는 것으로 이번 기획연재를 마무리하자.
말은 쉽다. 하지만, 어떻게 국내와 국제, 그것도 여러 갈래의 분과 학문들로 나뉘어 있는 현재 우리의 인식구조를 넘어서서 그러한 종합적인 인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전체로서의 사회적 현실'이라는 것은 마치 큰 고래 '모비 딕'과 같아서 늘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아른거리는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이리저리 찔러대는 인간들의 좀스런 사회과학적 인식의 작살을 맞고 그 밧줄에 몸이 칭칭 감겨도 유유히 물을 내뿜으면서 심연과 같은 푸른 바다 저편으로 사라져버리곤 하는 존재가 아닌가?
로버트 콕스(Robert Cox)는 지구정치경제학의 방법으로 '역사적 구조들(historical structures)'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경제학자나 정치학자, 법학자 등이 제각각 멋대로 만들어낸 '모델'과 같은 이론적 구조가 아니다.
실제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부대끼고 얽히다 보면 때로는 의도와 무관하게, 때로는 의도한 대로 만들어져 다시 사람들 자신의 행동에 조건으로 작용하는 어떤 삶의 틀이 생겨난다. 그 틀은 우리 가족 내부처럼 미시적인 차원에서도 만들어지지만, 전 지구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도 만들어진다. 그 구조들은 분명히 우리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뒤에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의 가능성과 방향을 상당부분 규정해버리는 단단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것이 바로 '역사적 구조들'이다.
'역사적 구조들'은 경제냐 정치냐 법이냐 하는 틀과 무관하게 직접 우리의 일상생활과 닿아 있는 아주 구체적인 삶의 일부분이다. 이러한 구조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소멸하면서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나가고, 또 그 삶에서 만들어지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 콕스가 제시한 방법의 골격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직간접으로 규정하는 구조들은 무수히 많고, 우리가 그것들을 모두 다 뒤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떤 구체적인 사안을 연구할 때 과연 어떤 구조들이 그 사안과 관련해 의미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런 구조들을 연구대상 목록에 올려야 하는가?
여기서 콕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었던 프랑스의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이 도움이 되는 열쇠말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국면(conjuncture)'이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있을 때 그것을 차분히 관찰하면 마치 백묵 위에 사인펜으로 찍어놓은 점이 수분의 삼투에 따라 퍼지며 여러 색으로 갈라지듯이 그 사안과 관련하여 그 사안을 규정하고, 또 그 사안에 의해 규정당하는 몇 개의 관련 있는 구조들을 분간해낼 수 있다. 그 구조들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떤 순간에 어떻게 만나 어떤 결과를 낳느냐를 가늠하게 해주는 '국면'이라는 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어떤 '국면'에 있는가?
우리는 앞에서 이미 이런 방법의 틀을 빌어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를 규정하는 여러 가지 역사적 원천들이 1990년대라는 '국면'에서 어떻게 얽히면서, 어떻게 그 뒤의 지구정치경제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살펴본 바 있다. 그렇다면 2006년에 느닷없이 한미 FTA와 그 안에 포함된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라는 사안에 맞닥뜨린 우리의 '국면'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이며, 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앞에서 본 바 있듯이, 1980년대 이후 자본에 의한 지구화는 두 단계로 전개된다. 먼저, 냉전의 기간에 단단한 갑각류처럼 각각 자신의 고유한 국내 체제를 지키며 존재하던 다양한 국가자본주의 정치경제 체제는 1980년대에 IMF와 세계은행의 활약으로 인해 대부분 '구조 조정'을 통해 그 단단한 껍질을 벗겨내게 된다.
그 주요한 방법은 공기업의 민영화, 산업구조의 변동, 시장의 개방, 노동계급 등 사회세력들의 약화, 시장기율의 강화 등이었다. 이렇게 사회 전체가 근본적인 재구조화를 겪게 된 시점에 이번에는 외국 투자자들이 각국으로 들어가 그곳의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거나 새로이 만들어나가는 두 번째 단계가 펼쳐진다.
최근에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에 의해 시달리고 있는 여러 나라들을 이런 역사의 큰 흐름 속에 놓고 다시 바라보자. 이런 나라들 대부분은 한 번씩은 외채위기와 같은 외부충격을 겪었고, 이어 자본의 지구화가 요구하는 내부 사회체제 변동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이 대세로 굳어진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세계의 투자자들이 본격적으로 그런 나라들에 침투해서 주요한 산업 및 금융 인프라를 비롯해 가지가지의 기간시설과 산업부문을 장악했다. 여기서 나오는 힘을 기반으로 그들은 새로이 여러 가지 수익성 높은 '비즈니스'의 기회를 열었고, 이렇게 해서 새롭게 열린 투자의 기회가 또 다른 자본의 유입을 부르는 순환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언젠가부터(아마도 김영삼 정부 때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 계기였던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럽과 북미의 나라들을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현실 판단에 사용하는 거울로 삼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현실을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개발도상국과 견주어보고 판단하는 데 대해 직감적인 거부반응까지 갖게 됐다. 멕시코보다는 캐나다의 케이스를, 대만보다는 일본의 케이스를 중시했고, 싱가포르보다는 네덜란드를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게 됐다.
그렇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향방을 결정지은 침로가 과연 미국이나 일본 쪽에 가까운가, 아니면 아르헨티나나 멕시코 쪽에 더 가까운가를 냉철하게 생각해볼 때가 됐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결합으로 외환위기를 곧 극복해낸 슬기로운 국민' 운운하던 김대중 정부 시절의 수사학은 이제 그만두자. 몇 번의 거품과 흥청거림이 있었을 뿐, IMF의 충격은 갈수록 생생하고 뼈아프게 온 국민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 양극화와 가계부채와 비정규직의 고용불안과 청년실업은 우리 모두 익히 아는 바 아닌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와 같은 흐름에 휘말린 우리나라의 내부에는 어떠한 구조변동이 생겨났는가다. 전두환, 노태우 때까지 우리의 정치경제 체제를 작동시키던 기제와 관행과 원리는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그 체제의 기둥이었던 금융체제, 산업구조, 기업 소유지배구조, 노사관계 등 모든 것이 그 후 근본적인 재구조화를 겪고 있다.
IMF 사태 이후 변동을 겪지 않은 부문이 있는가. 은행은 거의 완전히 외국인 소유로 넘어갔다. 재벌기업들은 설비투자와 고용의 확대라는 행태를 버린 지 오래다. 공공부문의 굵직굵직한 공기업들은 민영화, 사유화의 흐름 속에서 구조적인 격동을 겪고 있다. 돈의 흐름이 바뀌었고, 투자의 행태도 바뀌었다. 의료, 교육, 교통, 지역발전 등 어느 한 군데라도 이 급격한 구조변동의 흐름에 휘말리지 않은 곳이 없다.
이것은 바로 1990년대에 남미의 수많은 '외채위기 선배' 나라들이 겪었던 것이다.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도 1990년대에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휩쓸었던 자본의 지구화라는 흐름 속에서 그동안 살아 왔다. 그간 우리 사회에 일어난 구조변동은 일본이나 스웨덴과 같은 세계의 흐름에 속한다기보다는 지구의 밑바닥을 흘러 온 흐름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흐름이야말로 1997년 이후 2006년까지 한국사회의 운명을 만들어 온, 저항하기 힘든 지구정치경제 차원의 '역사적 구조'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역사적 구조'의 흐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인가? 여기서 다시 브로델과 콕스의 지혜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브로델이 말한 대로, 현재란 결코 단선적 인과율로 무엇인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기계적 과정의 산물이 아니다. 현재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여러 '구조들'과 '흐름들'로 분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분해된 구조들과 흐름들 중에서 우리의 역량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 브로델의 용어로 말하면 '가능한 것의 한계(limits of the possible)' 너머에 있는 것들과 우리의 힘으로 선택하거나 새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들을 신중하게 갈라내야 한다. 그리고 콕스가 말한 대로, 역사적 구조는 우리를 제약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신중한 숙의와 선택을 통해 집단적 실천의지를 모아낸다면 우리는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갈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를 '저항 없이 받아들여야 할 글로벌 스탠더드이며 역사적 당위'라고 당연시하는 것이 왜 적극적인 태도이기는커녕 가장 무기력한 숙명론적 태도인지를 알 수 있다.
외채위기를 겪고 IMF와 세계은행에 의해 거시적 구조조정을 당했던 나라들이 바로 이렇게 '외국 투자자들이 들어와 국내의 산업구조와 금융체제 전반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여 그런 방향으로 흘러간 흐름이 이미 있었고, 그 종착역이 아르헨티나요 멕시코였다. 그 종착역은 자신들을 몰아가는 엄청난 힘의 흐름을 여러 구조들과 작은 흐름들로 분석하여 무엇이 가능하지 않고 무엇이 아직 가능한지를 따져가며 새로운 국면과 흐름을 열어내는 작업은 뒤로 한 채 그저 '그럼 무슨 대안이 있는가?'라는 대안 아닌 대안을 휘둘러댄 결과였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을 둘러보자. 그러한 '업그레이드'의 논리에 따라 은행도 산업구조도 공공서비스도, 심지어는 아주 기초적인 의료, 교육, 가족 등의 사회적 구조들조차 재편되고 허물어지고 있는 마당에 외국 투자자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에게 감히 우리 국가의 주권에까지 간섭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운명을 타개'하는 대안인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르헨티나를 확실하게 뒤쫓아가는, 그러나 되돌아올 수 없는 편도 기차표(one-way ticket)일 뿐이다.
지구정치경제 차원에서 오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국면' 속에는 외국 투자자들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우리의 경제와 사회를 '업그레이드'시켜달라고 일임하는 대신 우리가 주체적으로 우리의 경제와 사회를 구축해나갈 수 있는 여지가 아직 대단히 많이 남아 있다.
먼저 우리 사회의 최대 현안인 양극화와 만성적 실업을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산업정책과 사회연대정책을 통해 새로운 산업구조와 사회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한 정책과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면서 인간과 자연이 최대한으로 풍요로워지고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제도의 틀을 우리는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포괄적인 하나의 '한국적 모델'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공공서비스와 각종 기간시설 및 제도의 장기적 발전 방향, 그 조직 및 운영 원칙, 그 실현 방안을 골간부터 하나하나 세워나갈 수 있다. 그러한 포괄적 틀이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의 토론 속에서 합의된다면, 그것을 사회에 안착시키기 위한 각종 법적, 제도적 장치를 정비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우리의 법체제, 공공서비스, 기간산업, 금융체제, 산업구조 등의 틀이 어느 정도 안정된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가 주인으로서 외국 투자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확실하게 안정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체제의 골간을 확보해 놓은 뒤에는 외국 투자자들도 그 안정된 틀 속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서 그 틀에 힘을 불어넣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우리의 대안' 만들기에 나서자
그때가 되면 비로소 우리도 외국 투자자라는 손님들에게 어떤 규칙과 어떤 한도 안에서만 영업을 하라고 책임 있고 분명한 태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가 시행된다고 해도 터무니없이 온 사회가 휘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구조변동'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빨려들어 어지럽게 맴돌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배 위에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까지 들여놓는다면 그 배는 선체 조각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산산히 부서져 흩어질 위험이 있다.
이렇게 어지러운 구조변동의 혼란 속에 있는 대한민국이 살 길은 그 주도권을 미국 투자자들에게 맡기는 것뿐이라는 것이 현 정부의 인식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산업정책도 공공서비스도 사회 각 부문의 관행이나 질서도 모두 미국식으로 일괄 통일하는 것이 현 정부가 생각하는 '업그레이드'인 것 같다.
물론 1997년 이후 우리가 휘말려든 '역사적 구조'의 흐름에 맞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질서를 만들어나가고 합의해나가는 일이 쉬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야말로 다른 대안이 없다.
먼저 우리가 원하는 산업구조와 산업정책, 우리가 원하는 정치경제 모델, 우리가 원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인간과 자연이 온전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삶 등에 대해 먼저 판단하고, 그런 것들을 먼저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것이 필자의 생각에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라는 도전 앞에 선 우리에게 지구정치경제학의 관점이 던져주는 지혜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도깨비공주(物の怪姫)>를 보면, 옛날 옛적 숲과 동물과 평민과 무사와 권력자와 남자와 여자가 모두 서로 서로를 원수로 삼아 아귀다툼을 하는 나라가 나온다. 모두 다 할 말이 있고 모두 다 논리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모두들 자기 논리에 눈이 멀어 제각각 곤두박질을 친 결과 생겨나는 현실은 실로 아비규환이다.
그래서 아이는 "흐림 없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직접 판단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물론 그런다고 쉽게 답이 나올 리는 없다. 현실은 턱없이 복잡하고 상황은 갈수록 꼬여만 간다. 사람들은 아이를 비웃는다.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아이는 기를 쓰고 외친다. "그래도 함께 살아가는 일은 할 수 있어요!"
결국 상황을 수습한 것은 산도 숲도 동물도 평민도 무사도 권력자도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 아이였다. 지금 우리가 진정 '흐림 없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를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정말로 '함께 살아가는 일을 고민하고 있는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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