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보호용 방패'가 '공격용 창'으로 변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보호용 방패'가 '공격용 창'으로 변하다

[한미FTA 뜯어보기 111 :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정치경제학(5)] 투자자 보호장치

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한미 FTA 협상에서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도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했을 뿐, 그 구체적인 내용과 이에 대한 정부의 협상방침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미국이 추진하거나 성사시킨 각종 자유무역협정과 투자협정들의 대표 격이자 그 표준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를 기준으로 이 제도를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한미 FTA는 NAFTA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간 'NAFTA 플러스'라는 말이 양국 관료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니 그렇게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는 외국에 투자하는 이들의 이익과 재산이 부당하게 침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외국에 투자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말할 것도 없이 투자대상국에서 예기치 못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 자신이 투자해 놓은 자산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것이다.

과거 멕시코의 카르데나스 정부에서 쿠바의 카스트로 정부를 거쳐 칠레의 아옌데 정부와 1970년대 말의 이란 혁명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 자본가들이 투자대상국에 갖고 있었던 공장과 기업을 순식간에 국유화당해 빼앗기는 악몽을 얼마나 많이 겪었던가? 미국 자본가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의 자본가라 해도 이러한 위험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도도 구비되어 있지 않은 나라에는 투자를 할 리가 없다. 그러니 투자협정이나 자유무역협정에 그런 제도를 집어넣는 것은 당연하다고 많은 교과서에 씌어 있고, 우리나라 외교통상부도 이런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속 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지구화된 21세기 세계경제에서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국 투자자들을 위해 일정한 보호장치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반대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 보호장치가 하필이면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라는 논란 많은 제도여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이의를 갖고 있다. 정부 관리들은 그동안 이 제도가 시행되어 온 과정과 그것을 뒷받침한 이론을 살펴보았는가? 누군가가 말했듯이 "이 제도는 1990년대 들어 투자자들을 지켜주는 방패가 아니라 투자자들이 투자대상국의 정치와 사회를 공격하는 창으로 변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물'이 아닌 '자산'이 사적 소유의 대상이 되다

NAFTA 11장에 나오는 '투자자의 이익 보호'라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출현했는지를 살펴보자. 다만 그 전에 잠깐, 19세기 이후 미국 법률의 역사에서 '사적 소유'와 '수용(收用, expropriation)'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돌아보아야겠다. 사적 소유와 수용은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를 떠받치는 기본 개념이고,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가 국제 중재재판에서 해석되고 시행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관행이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 특히 제5수정조항(Fifth Amendment)과 제14수정조항(Fourteenth Amendment)에 명기된 '사적 소유 보호' 개념은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이래의 영국 보통법(Common Law) 전통을 잇고 있다. 그 요점은 아주 간단하다. 정부는 개인의 사적 소유물을 가져갈 수 있지만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고, 적절한 절차를 거쳐야 하며, 그 개인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에서 쓰레기 폐기장을 짓기 위해 나의 알토란같은 땅뙈기를 가져갔다면? 이 경우에는 나라가 공공의 목적을 위해 내 땅을 가져간 것인데다가 관련 법절차를 모두 거친 '수용'일 테니 내가 무조건 나의 사적 소유권을 내세워 나라의 조치에 반대할 수 없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분명 나에게 그 땅의 가치에 맞먹는 배상을 해야 한다. 이는 삼척동자도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일이다. 이처럼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보통법의 장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명쾌함도 어디까지나 소유의 대상도, 수용의 대상도 다 '토지'와 같은 가시적인 사물(thing)인 게 분명할 때에나 가능하다. 미국이 남북전쟁을 거쳐 18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선 뒤에는 소유의 주요 대상이 사물이 아닌 온갖 자산(asset), 즉 소득을 창출해주는 모든 것이 된다. 이에 따라 사적 소유의 대상은 토지와 같은 구체적 '사물'이고, 수용이란 사물을 맘껏 사용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라는 단순명쾌한 보통법의 관념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1872년의 '도축장 사건(Slaughtering House Case)'을 보자. 당시 루이지애나 주의회는 루이지애나 시내에서 도축장을 독점적으로 운영할 권리를 특정 법인에 주고, 모든 도축업자들은 그 도축장에서 소정의 사용료를 내고 도축을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졸지에 터무니없이 높은 도축장 사용료를 내게 된 도축업자들은 루이지애나 주의회의 조치가 자신들의 사적 소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연방 법원에 제소했다.

그러자 대법원 판사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사적 소유의 대상은 소유자가 갖고 있는 '사물'인가, 아니면 그 사물을 사용하여 벌어들이는 '화폐적 가치'인가가 쟁점이었다. 만약 앞쪽 정의가 맞는다면 루이지애나 도축장 사건은 아무런 사적 소유의 침해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주정부가 도축업자들이 갖고 있는 사물, 즉 그들의 도축장비나 고객들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며, 그들은 그 전과 똑같이 그것들을 활용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뒤쪽 정의가 옳다면 도축업자들은 명확하게 큰 금전적 손해를 보게 되었고, 따라서 주정부가 헌법을 어긴 것이니 마땅히 그 법을 철회하든가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872년은 아직 전통적인 보통법의 사고방식이 강한 때였기에 결국 대법원의 판결은 '사적 소유의 대상은 사물이며, 따라서 주정부는 잘못이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그 직후인 1880년대의 미국은 그렇게 소 몰고 내 땅에 가서 농사 짓고 돌아와 씻고 잠자던 예전의 평온한 세상이 아니었다. 철도가 뚫리고 땅투기가 벌어지고 주식 물타기라는 신종 금융기법이 개발되는 등 한마디로 세상만사를 '나의 수익 창출능력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밴더빌트, 카네기, 모건, 록펠러 등 대자본가들이 온 사회를 헤집고 바꾸어버리는 '날강도 귀족들(robber barons)'의 시대였다. 사적 소유의 법적 정의도 그래서 점점 더 '화폐가치' 쪽으로 기울어진다.

미네소타 주정부는 철도 건설 과정에서 토지의 가치 변동을 겪게 된 땅주인들에게 배상을 하게 되는데, 그 배상액의 결정을 놓고 시비가 벌어져 마침내 1890년에 대법원까지 올라간다(Minesota Rate Case). 주정부는 "정부에서 토지의 소유권을 가져간 것이 아니며 단지 토지의 가치 삭감만 일어났으니 사적 소유가 침해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이 문제는 헌법적 사안이 아니라 주정부의 재량 아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땅주인들은 "비록 정부에서 소유권을 가져가지 않았다 해도 토지의 화폐가치가 떨어졌으니 주정부가 우리의 사적 소유물을 수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배상액은 주정부가 결정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한다(미국 헌법 제5수정조항은 배상의 기준을 시장가치에 둔다).

대법원은 어떻게 판결했을까? 뜻밖에도, 사적 소유의 대상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미래수익 창출능력'이라고 정의하면서 땅주인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따라서 미네소타 주정부가 자의적으로 배상액을 결정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한다. 20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사적 소유의 법적 정의가 정반대로, 다시 말해 단순한 '사물'에서 '사물을 통해 벌어들일 화폐가치', 즉 '소득창출 능력'으로 바뀐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자 더욱 극적인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체적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 위에 덧씌워진 '소득창출 능력'과 같은 추상적인 것이 중요하다면, 물질적 형태가 있든 없든 소득창출을 가져다주는 것은 모두 사적 소유를 주장할 대상이 된다는 인식이 퍼졌다. 이에 따라 '무형자산'들도 당연히 사적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무형자산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됐다. 의회나 정부가 공공의 목적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한다 해도 그 조치가 누군가의 '소득창출 능력'을 감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 조치가 구체적 사물과 관련된 것이건 무형의 각종 사실들(facts)과 관련된 것이건 사적 소유의 침해인 수용에 해당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그 조치를 철회하든가, 아니면 그 조치로 인해 발생하는 금전적 손해를 배상하든가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자. '무형자산'이란 사실 그 포괄범위가 넓으면서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무형자산에는 특허권이나 사업권과 같이 비교적 구체적인 것도 있지만 대중적 평판, 기업의 이미지, 더 나아가 그 이름도 아리송한 '굿윌(goodwill, 영업권)' 등 실로 '기업의 소득창출에 도움이 되는 모든 사실관계'가 다 들어간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만한 조치는 모조리 사적 소유의 침해가 되니, 정부는 조치를 철회하든가 '수용의 대가'를 치르든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그런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법의 임무가 된다면?

1980년대에 시작된 반전

예를 들어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고 해보자.

"나는 번화가 중에서도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 조그만 토스트 집을 열었다. 워낙 큰 길을 끼고 있어 행인이 많았고, 신호가 바뀌는 주기도 길었다. 그래서 아침 출근 때에는 신호를 기다리다가 향긋한 빵 내음에 취한 사람들이 가게로 엄청 꼬여들었다. 그야말로 '길목'이라는 무형자산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시청에서 신호등을 없애고 대신 그 자리에 지하도를 만들기로 했다. '길목'은 없어졌고, 사람들은 빵 내음은 맡을 틈도 없이 지하도 입구로 빨려 들어갔다. 매상이 절반으로 줄었다. 결국 시청은 지하도를 만듦으로써 나의 무형자산을 없앤 것이니 내 사적 소유를 침해한 것이다. 따라서 시청은 그 지하도를 없애거나 내게 보상을 해야 한다."

그럴까? 그렇다면 정부와 의회는 어떤 조치를 취하거나 입법을 할 때 관련되는 사회적 관계와 사실들을 모조리 다 살펴서 아무도 그로 인해 수입이 떨어지는 일이 없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일개 토스트 가게 주인이 위와 같은 주장을 한다고 하니 터무니없어 보이겠지만, 만약 무형자산의 소유자가 철도왕 밴더빌트,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금융왕 모건과 같은 사람인데 그가 무형자산을 침해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선다면 대단히 심각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돈으로 고용한 변호사들은 두었다가 무엇을 할 것인가. 대자본가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조치를 정부가 취하려고 할 때마다 변호사들을 내세워 그 조치를 간단하게 물리친다.

'사적 소유'에 대한 이런 포괄적인 정의는 20세기 초에 미국 자본주의의 관행이 되어버렸고, 결국은 대자본가 몇 명의 사업상 이익에 의해 온 나라가 휘둘리는 상황이 조성되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래서 1920년대의 걸출한 미국 지식인 두 명, 즉 경제학자인 존 커먼스(John Commons)와 사회철학자인 모리스 코헨(Morris Cohen)은 서로 일치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예전처럼 사물에만 그치지 않고 모든 사회적 사실관계로까지 그 대상이 확장된 '사적 소유'란 사실상 사회적 권력으로 보아야 한다고. 더 나아가 코헨은 이러한 권력은 이미 전통적인 국가의 권력, 즉 주권(sovereignty)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렇지만 이런 상태가 오래 가지는 않았다. 1930년대에 들어서 뉴딜(New Deal) 정부가 사적 소유를 이렇게 포괄적으로 해석하는 관행에 쐐기를 박고, 각종의 규제와 법적 조치로 그 의미를 좁혀나가기 시작한다. 세월이 흘러 1960년대가 되면 사적 소유가 그 전에 가지고 있었던 대부분의 사회적 권력은 국가의 행정과 입법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사적 소유의 의미는 '국가가 허용하는 만큼의 소득을 취득할 권리' 정도로 축소된다.

그런데 1980년대가 되자 이야기가 다시 반전된다. 신자유주의의 시작이라 할 레이건 정부 시절에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자본가들과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이 사적 소유권의 확장을 노리고 '규제에 의한 수용(regulatory expropriaton)'이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이것은 정부가 사적 소유물을 가져가거나 물리적인 침해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정부의 규제로 인해 특정한 소유권이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로 인한 피해만큼의 금액을 정부가 보상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시내의 목 좋은 곳에 땅을 소유하고 있는데 하필 그 지역에 대한 정부의 규제, 예를 들어 건물의 높이나 지하실의 깊이 등을 제한하는 규제가 도입되어 그 땅에 수익성 있는 건물을 지을 수가 없게 된다면? 이 경우에 비록 정부가 내 소유권 자체를 건드린 것이 아니고 도입된 규제도 공공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 해도 나는 그 금싸라기 땅을 놀려두는 수밖에 없으니 금전적 피해를 본 것이고 마땅히 정부가 그만큼을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정부의 각종 규제를 철폐한다는 레이건 시대의 구호와 맞물려 상당한 사회적 힘을 얻게 되었다.

미국 대법원은 이런 경우에 정부 편을 들어주는 역사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정부의 조치로 인해 물리적 침해는 일어나지 않고 소유물의 경제적 가치가 감소된 것만으로는 그 가치 감소가 아무리 심각한 것이라 해도 해당 정부 조치가 수용임을 증명하는 데는 불충분하다는 것이 미국 대법원의 판례에 의해 확립된 원칙이라는 것이 1993년에 미국 법원에서 나온 한 판결(Concrete Pipe and Prods. of Cal., Inc. v. Construction Laborers Pension Trust for S. Cal.)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사회의 전반적 변화 및 보수화가 서서히 미국 법조계와 헌법학계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92년의 한 판례(Lucas v. South Carolina Coastal Council)에서는 어떤 종류의 규제 조치는 토지에 대한 수용이 될 수 있음을 법원이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엡스타인(Richard Epstein)을 비롯한 여러 법학자들은 이런 정도의 판결도 부족하다고 비판하고 "소유물의 가치를 감소시키는 규제는 사실상 모두" 그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의 의무를 규제당국에 지운다는 의견을 표명했고, 이런 의견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법과 제도의 관행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미국의 법조계 내에는 공공의 목적을 위한 정부의 규제 조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흐름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에 '규제적 수용'이라는 개념이 순식간에 중심적인 법적, 제도적 관행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모든 투자자들이 실현되기를 원하는 '규제적 수용' 개념이 이상적으로 펼쳐진 국제조약 규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NAFTA의 11장에 명기된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 조항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